〈 93화 〉 사랑이 사랑을 가르다 (4)
* * *
의자에 앉은 륀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모습. 물론 커피는 창공이 끓여 준 것이었다.
이제 와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가 보기에 륀의 멘탈은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기만 하는 건 아침을 먹고 나서도 똑같았다.
이에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뭐라도 주려 하다가 마침 눈에 띈 것이 저번의 그 가루 커피였던 것이다. 륀은 그것을 받아들고 나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창공은 일단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며 차분하게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고... 마워... 고맙습니다..."
"에휴."
창공의 한숨에 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지간히도 위축이 되어있는 것이다. 무어라 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쉰 것인데, 그것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평소 답지 못했다.
뒷구멍 개발로 조금 기를 꺾어 놓은 다음엔 침대 위에서는 살살 녹는 것처럼 굴어도 평소에는 도도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 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창공은 사람에게 여러 면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륀의 이런 모습은 참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게... 그러니까..."
"야. 말하지 마. 말하려면 그거 다 마시고 해."
"...네."
무슨 일인지 대강 추측하는 것은 가능했다. 아마도 아스터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문제가 생길 부분도 그것 외에는 없었고, 또 그게 아니라면 륀이 이토록 정신줄을 놓을 사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따뜻해..."
마치 올라오는 김을 얼굴에 쪼이려는 듯, 륀은 잔을 눈앞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몸은 미세하긴 해도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이 뒤로도 워낙에 조심스럽게 홀짝였던지라, 륀이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기까진 15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창공은 창문을 닫은 다음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서 누워 있었다.
"다 마셨어?"
"네. 어... 주인님..."
그는 반사적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꼈지만 다시 그것 때문에 륀이 위축될까 올라가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럼 이리 들어와."
"네...?"
"들어오라고. 이불 속으로. 춥다며."
평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냥한 창공의 행동. 너무 다른 모습에 적응이 어려운 듯 눈만 껌뻑거리며 머뭇거리던 륀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사라락...
그녀가 침대에 파고들자 창공이 꼭 끌어안는다.
"조금 괜찮아?"
"...많이요."
륀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가 그러하듯 창공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명백히 이상하다고 느꼈을 테지만 지금의 륀은 평소 답지 못했기에 창공이 베푸는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따뜻... 해... 이 사람의... 품이...'
그녀는 그런 때가 많았다. 고된 연구를 마치고, 자기 방에 돌아와 홀로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선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힘들 때도, 슬플 때도 아무 말 없이 자길 꼭 안아주며 따뜻하게 몸을 데워 주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참 우연하게도 그녀의 속을 창공이 제대로 긁어 준 셈이다.
물론 창공에게 이 행위는 방금 전 륀에게 끓여 주었던 커피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야 말을 들을 게 아닌가.
게다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오묘해서, 만 번을 거칠게 매질했더라도 한 번의 친절한 행동이 있다면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창공은 지금이 바로 호의를 베풀 때라 생각했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순간, 륀의 몸이 다시 한번 떨려왔다.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소리 없는 오열.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저 안쪽에서 나는 것처럼 울린다.
"왜... 왜... 갑자기 잘 대해주는 건데... 왜..."
"..."
"그냥... 당신을 계속 미워할 수 있게 해 주면 안 돼...? 이건 전부 다 당신 때문인데... 왜 내가 착각하게 만드는 거냐고...!"
하지만 울음 섞인 물음에도 창공은 대답 없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륀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욱 줘서 그녀가 제 품에 단단히 안기도록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륀의 떨림이 잦아들고, 요동치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이제야 말할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주인님."
"응."
"주인님은... 제가 만난 남자들 중 최악이에요. 나쁜 남자예요. 아마 온 세상을 뒤져도 주인님보다 나쁜 남자는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 말은 이제 식상해."
"하긴 그렇겠죠. 어디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저뿐일까요.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냥 잊으세요. 슬프고 떨려서 아무 생각 없이 헛소리를 한 거니까."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무슨 말인지 말해 봐."
"놓아 주세요."
"이대로 말해."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쉰 다음에야 드디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았다.
"아스터가 들었나 봐요. ...어젯밤에 주인님과 저의... 어... 그... 걸요."
"그래서? 아스터가 애는 아니잖아. 어차피 너랑 내가 밤마다 뭘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말대로 창공의 입장에선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사제라도 알 건 알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밤에 손잡고 자면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는 수준의 성교육을 받진 않았을 게 아닌가.
한편 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창공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차라리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맨정신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다.
"제가 주인님께 했던 말을... 들은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을. 네가 한두 마디 했냐."
"...엉덩이 때려달라고 했던... 거랑... 이, 임신, 임신... 하겠다고... 했던 거랑..."
"그래서?"
"질투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그 아이한테서 주인님을 빼앗아 갔다고... 탕녀처럼 굴면서 주인님의 눈을 가리고 있다고..."
"사실 그게 나랑 네 계약 조건이었잖아. 아주 틀린 말도 아니네."
"그건... 그런..."
"그래서 힘들었어? 지켜주겠다고 생각했던 동생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어차피 원망 받을 거 감안하고 한 일이잖아."
"..."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힘드네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에게 모진 말을 듣는다는 건. 그리고... 결국 그 아이의 행복을 제가 가로막고 있다는 게."
"륀."
창공은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어쨌든 아직까지 넌 순결한 처녀야. 지금 그만둔다면 더 더럽혀지기 전에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드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 이 관계를 그만둘 권한은 내게 있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만둘게."
"아..."
"하지만 그걸로 끝이야. 아스터는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될 거고. 우리랑 더 다니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돼. 난 개인적으로 네가 남아 줬으면 좋겠지만, 싫어 죽겠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고 싶진 않으니까. 그래봤자 도움도 안 되고 말이야."
륀이 망설였다. 창공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거 그만둬도 된다고. 억지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몸을 바치고,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굴욕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어차피 이 관계를 지속하면 앞으로 아스터에게서 더 모진 말을 듣게 될 거야. 다른 일행들 너 바라보는 시선도 안 좋은 거 알고 있지? 아스터가 사교성도 좋고 말도 사근사근하잖아. 아마 다들 암묵적으로 아스터의 편을 들고 있겠지. 너 그거 다 참아낼 수 있어? 지금 힘들지? 대답해."
"...네. 힘들어요...!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고..."
"그럼 그만두자. 언니에게 못된 말이나 하는 동생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보기도 싫은 남자는 앞으로 만나지도 말자. 웨리로 돌아가서 앞으로 평생 너 혼자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그렇게 죽는 날까지 살면 되는 거야."
이제 그를 떠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창공이 허락한 일이다. 그냥 입을 열어서 이 거짓된 관계를 그만두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그만둘 수 있다.
그런데... 륀의 입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였을까. 홀로 남겨질 동생에 대한 걱정?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아니. 과연 그것 때문일까?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의 품에 안긴 지금, 륀은 요사이 느끼지 못했던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적 집에서 방 침대에 누웠을 때와 같은, 가족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와 같은... 추억 속에 남은, 그렇기에 이제는 편린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그런 따스함을.
창공을 떠나 그의 품 바깥으로, 이불 바깥으로 나간다면 이 감각을 더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가기 싫었다. 나가면 안 된다.
나간다면 분명 얼마 못가 얼어 죽을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있을 게요... 조금만..."
창공이 륀의 얼굴을 볼 수 없듯, 륀도 창공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활짝. 이빨까지 드러내며.
"정말이지? 네가 마음대로 나에게서 벗어날 기회는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은 안 돼요. ...주인님."
"그래. 그게 네 뜻이라면."
륀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니, 그저 이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었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단 하나가 바로 이 온기뿐이니까.
"그런데 륀. 계속 아스터를 저 상태로 두면 위험하지 않겠어?"
"무슨."
"생각해 봐. 이대로라면 아스터는 계속해서 너에 대한 원망만 키워 나갈 거야. 그러다 보면 갈등이 생기고. 난 일행을 이끄는 사람이야. 너희 자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해. 그리고 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아스터 편을 들겠지. 나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
"마, 맞아요... 주인님 말씀대로겠죠... 저는 완전히 나쁜 년이 다 됐으니까..."
"그래서 나도 이런 말 하게 돼서 참 복잡한 심정이긴 한데, 일단은 아스터를 받아만 주자. 응?"
"그 말씀은... 저..."
애초에 륀이 창공과의 연인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게 어떤 이유였던가. 결국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그녀가 고생한 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 그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창공의 주장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스터도 언제까지나 순결하게 남을 거니까. 나도 괜히 성직자를 건드릴 생각은 없어. 그리고 이미 네가 나한테 있잖아."
"제가요?"
"난 솔직히 너만 있으면 아스터는 그다지... 여자로서도 네가 더 매력적이고."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륀은 창공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자신과 아스터를 비교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자기가 있는데 창공이 아스터에게 넘어갈 리가 없다고.
"어쨌든. 아스터를 계속 저렇게 두면 무슨 일 생겨도 반드시 생겨. 그러니까 지금은 그렇게 하자. 언젠가 포기하고 말겠지."
"네... 주인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그 대답을 끝으로 이제는 더 파고들 틈도 없는 창공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 륀.
"한숨 푹 자. 내가 안아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주인님... 따뜻하게 꼬옥 안아주셔야 해요..."
약관을 살펴보지도 않고 서명을 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 동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마디를 내뱉고 잠에 들었다.
아마 일어나고 나면 뭔가가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