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94화 (94/178)

〈 94화 〉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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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아퀴탄인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해 모든 분야에서 아퀴탄을 1등에 자리에 놓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쉬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북대륙의, 아니. 다이셀리시아 최강의 국가가 키르케라는 세간의 평일 것이다. 확실히 키르케야말로 최강국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일단 인구가 세계 제일이다. 넓은 땅과 해안선에서 산출되는 물산은 수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에 제격이다. 그렇다. 영토도 세계 제일이다. 혹자는 남대륙에 위치한 레티오키의 땅이 키르케보다 더 넓다고 말하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비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레티오키의 대부분은 사막이기 때문이다. 모래와 열로 가득한 사막은 사람이 살 수도, 농작물이 자랄 수도 없는 땅이다. 레티오키의 사막은 타국의 침공을 막아 주는 천연 장벽이지만 역으로 타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반면에 키르케는 어떤가? 드넓은 국토의 대부분이 평야로서, 농사와 상행 양쪽에 제격이다. 실로 지금의 키르케의 땅에 위치했던 옛 키트라 제국이 어찌하여 그렇게 부흥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 되리라.

그러나 키르케가 대륙의 최강국에 걸맞은 외교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 커다란 체구만큼이나 키르케를 둘러싼 이웃 국가도 많고, 이들은 모두 키르케가 침략의 기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연합을 결성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가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리라. 제아무리 강대한 국가라도 타국들의 연합에 무너질 수 있음은 그 옛날 키트라 제국이 증명한 바 있다. 바로 그렇기에 키르케는 키트라 제국과의 연관성을 한사코 부정하며, 자신들은 옛 제국의 땅에 새로이 세워진 왕국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케의 막대한 힘은 항상 주변 국가들의 경계 대상이 되고 있으니, 아마 오백 년이 지나도 키르케에게서 키트라 제국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키르케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라면 역시 밀가루로 만든 면 요리다. 지방에 따라 토마토로 만든 소스나 우유로 만든 소스를 끼얹기도 하고, 또 어떤 지방은 올리브유에 소금만 곁들여 먹기도 한다.

대체로 키르케 아닌 타국에서 이것을 먹는 모습을 보노라면 포크와 스푼을 사용해 깔끔하게 먹는 것으로 취식 방법이 정형화되어 있으나, 실상 키르케인들은 접시에 얼굴을 박고 면을 입에 쑤셔 넣는 기세로 먹는 것이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 외에도 풍부한 농산물과 수산물 자원을 바탕으로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요리들이 존재한다. 북대륙에선 아퀴탄과 함께 식문화로 쌍벽을 이루는 나라가 바로 키르케라 할 수 있으니, 미식이 취미인 사람이 키르케 여행을 한다면 하루에 세 번밖에 밥을 먹을 수 없다는 현실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로베르토 베르체티 저, [다이셀리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中­

"그렇군요!"

히사시가 즐거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키르케에 대한 륀의 간략한 설명. 그중에서도 우수한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마음을 동하게 한 것이다. 사실 알펜시아의 요리가 맛있기는 해도 종류가 다양하지 못해 금방 질리는 감이 있었는데, 키르케는 다르다니 충분히 기대가 되었다.

"아, 물론 우리 아퀴탄 만큼은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아퀴탄에도 한 번 들르길 바랄게. 정말... 아름다운 땅이거든. 내 나라라서 이런 말 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게 사실인 걸 어쩔 건데."

이제 퐁파두르 쌍둥이의 자국 찬양은 예삿일이었기에 다른 일행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진짜라니까?"

"어... 그 누구도 반박 안 했는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대충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지?"

결국 그들은 창공을 바라보며 무언으로 구원을 청했고, 창공은 기꺼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륀. 그만해."

"그렇지만..."

"아퀴탄은다이셀리시아에있는모든국가들중단연제일이며이는과학적으로도증명할수있는사실이다. 됐냐?"

륀은 그제서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평소대로라면 아스터도 가세했을 테지만, 그녀는 자기가 마차를 몰겠다는 어택에게 생각할 게 있다며 고삐를 넘겨받은 터라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창문을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필시 그럴 기분이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알펜시아 말고도 다른 나라에 왔군. 다시 한번 목적지를 확인하자고. ...택이 형."

"오케이."

어택은 가방 안에서 세계지도를 꺼내들어 모두가 보이도록 가운데에 펼쳐놓았다.

"우리는 어제 국경을 넘었고, 키르케의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야. 언젠가 한 번 비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말해 주자면... 이곳은 무주지야. 수백 년 전 키르케에서 점령했었지만 포기했고, 아르토스에 가깝지만 그곳에서도 관심을 주지 않지."

목적지인 비타는 그런 땅이었다. 토질이 매우 척박해 농사가 불가능하고, 해안선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무성한 정글이 섬을 뒤덮고 있어 개간조차 어렵다. 쓸모라고는 조업을 하는 어부들이 잠시 피항을 하거나 섬 근처에 묘박하고 재정비를 하는 식으로 쓰이는 것뿐.

따라서 정기적으로 취항하는 여객선 따위는 없다. 결국 배를 전세 내거나 그쪽으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가야 하는데, 당연히 키르케나 아르토스의 아무 항구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람 복잡하게 만드네."

나유가 그렇게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결국은 키르케에서 해결을 보려 해도 아르토스 접경지대까진 가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어지간하면 아르토스로 넘어가진 않으려고 해. 거긴 해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거든. 당장 백해만 해도 유빙이 떠다녀서 배를 띄우는 게 쉽지 않고, 힐라로스 대양쪽에선 키르케의 영향력이 막강하지."

"그러니까 당연히 비타까지 가는 배도 키르케보단 적을 거고. 이해했어."

"이해가 빨라서 좋네."

륀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도인 피오레에 들를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가리킨 곳은 키르케 남쪽, 힐라로스 대양 방면으로 툭 튀어나온 반도의 정중앙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나도 못 가본 곳이거든."

"여행 온 게 아니잖아. 우린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했어."

사실 일정이 지체된 것에는 절반 넘게 창공의 책임이 있었지만, 그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딱히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륀. 접경 지역의 항구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두고 있는 곳이 있어?"

"이스트리. 그쪽에선 규모가 제일 커."

이것으로 짧은 회의가 끝났다. 사실 내용의 대부분이 기존 사실의 재확인에 가까웠으니 길게 끌 것도 없었다. 그렇게 마차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의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들 피곤에 쩐 탓이다. 마차 여행이라는 게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마차의 멋진 승차감은 사람을 절로 피곤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여관에 도착한 다음 밥을 먹고 씻자마자 잠들기 일쑤였고, 그걸로도 모자라 마차 안에서 잠을 벌충하곤 했다. 특히나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창공의 체력 소모가 심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다 창공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

그리고 그런 침묵 속에서, 나유가 창공을 은근한 눈빛으로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한계였다. 잠자리의 즐거움,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기는 즐거움을 알게 해 놓고선 방치된 지 일주일 가까이가 흘렀다. 참으려면 못 참을 것이야 없겠지만 그녀가 체감한 기다림의 시간은 일주일이 아니라 일 년은 되는 듯했다.

게다가 창공도 똑같이 금욕하고 있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그 시간 동안 륀을 안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다른 여자를 안아주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게 하필 륀이라는 사실에 참 유감이 많은 나유였다.

때문에 아스터에게 이 사랑 쟁탈전에 뛰어들 것을 권유한 것이다. 순수하게 아스터를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목적도 물론 있었지만, 아스터로 륀을 견제하려는 속셈 또한 분명 있었다.

한데 가장 중요한 사실. 견제고 뭐고 나유는 그저 창공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다. 같은 방을 쓰는 아린 몰래 밤에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있지만 창공의 손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애달픈 마음만 더 짙어졌더랬다.

'아이씨... 그렇다고 남들 다 듣는데 오늘 섹스하자고 할 수도 없고... 빨리 다음 마을에 도착했으면 좋겠네...!'

그녀는 조급함을 꾹꾹 눌러 담으며 심호흡을 했다.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린이 눈에 띈다.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는 그녀가. 어쩐지 요새 영 표정이 개운하지가 않았는데, 무슨 고민인지 말은 하지 않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죽겠다, 진짜. 어으으!'

한숨을 푹 내쉰 나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너머의 아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아스터. 나 그리로 넘어가도 돼?"

"물론이죠. 잠깐 세울게요."

어쩌다가 마부석은 고민 있는 자들의 전용 좌석이 된 것일까. 참으로 탄식할 노릇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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