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95화 (95/178)

〈 95화 〉 밤하늘 (2)

* * *

일행이 튜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롬바르 공작령에서 제일 큰 도시인 이곳은 키르케에의 알펜시아 접경 지역에 위치한 도시들 중 가장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다만 이곳이 롬바르 공작령의 공식적인 수도는 아니었다. 공작이 기거하는 곳은 튜리 옆의 수사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오히려 영주가 이곳에 없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를 나다닐 수 있다면서 그것을 튜리의 성장 원동력으로 꼽는 사람도 많았다.

피곤에 절고 침묵에 익숙해져 있던 창공 일행의 안색도 튜리에 입성하고 나선 훨씬 아지게 되었는데, 번성한 도시와 활기 넘치는 길거리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대로와 그 대로를 지나는 사람들과 짐마차, 곳곳에 깔린 좌판, 가게 바깥까지 나온 테이블과 거기에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 자연을 노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일행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도시가 꽤 큰데?"

창공만큼은 아니지만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어택도 간만에 들뜬 기색이었다. 옆에서 아린도 그를 거든다.

"그러게요. 룬덴만큼이나 큰데요?"

"이게 국력의 차이라는 거지."

역시 바깥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하는 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알펜시아의 수도 룬덴은 다른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도 그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건국왕 알펜의 지시에 따라 인구와 물산의 중심지로서의 기능보단 외적을 막는 방어 도시로서의 기능에 치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러네요. 텔룸에 입항하고 나서 룬덴까지 걸어가는 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해군이 강하다곤 하지만 바다에서의 공격에 수도가 취약해 보이더라고요."

"정확해. 게다가 바다에서 에미트 강을 따라 올라가도 룬덴까진 금방이라 더 그렇지. 딱 방어에 유리한 지형까지 도시를 확장시킨 사례야, 룬덴은."

사실 룬덴이나 튜리조차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눈에 완벽하게 차는 것은 아니었다. 인구 1천만의 서울이나 2천만의 도쿄에서 살던 사람들이니 오죽할까. 다이셀리시아에는 잘 없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조차 그들 입장에선 고만고만하게 보일 터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어느새 작은 규모의 도시나 마을에 익숙해진 그들은 이 정도의 규모로도 감탄하며 감지덕지하는 법을 배운 뒤였다.

"아스터."

창공이 창문 너머로 아스터에게 말했다.

"근처에 적당하게 큰 여관 있으면 그리로 들어가자."

"네, 창공 님."

본래 이런 말은 륀이 해야겠으나, 최근 들어 서로 서먹해지던 두 자매의 사이는 오늘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박살 나 있었다. 제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보고서 바로 알 정도로.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륀이 아스터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면 창공이 보기에 썩 재밌었겠으나, 지금은 그런 장난을 할 때가 아니라 빠르게 여관을 잡고 쉬어야 할 때였다.

"아, 그렇지. 난 오늘은 좀 따로 행동할게. 내 방은 잡을 필요 없어."

"어디 가려고?"

륀은 의문을 표하는 창공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튜리에는 웨리의 지부가 있거든. 정확히는 서키르케 지부지만. 아무튼 오늘은 거기 들려서 잠깐 일 좀 보려고."

"서키르케 지부? 그럼 여러 개가 있다는 거네?"

"키르케에는 세 개가 있어. 워낙 땅이 커야 말이지. 다른 나라에는 수도에 하나씩."

"네가 그렇게 맨날 자랑하는 아퀴탄에도?"

"물론 자랑스러운 아퀴탄의 수도인 뤼테스에도 웨리의 지부가 있지. 중요성을 생각하면 키르케처럼 세 개는 있어야겠지만... 웨리 그 자체가 이미 로자스­알렌 지방에 접하고 있으니까."

"로자스­알렌?"

"그런 게 있어."

지도를 펼쳐보던 창공은 그것과 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로자스­알렌이라고? 야. 이 지도에는 그쪽 지방이 아퀴탄 땅이 아니라 노르마크 땅이라고 나오는데?"

"그, 그런 게 있다니까! 아무튼 웨리는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아퀴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돼."

답지 않게 눈에 띄게 당황하며 륀을 보니, 분명 무슨 사연이 있긴 있는 것 같았지만 창공은 거기서 추궁을 멈추었다.

'해봤자 시답잖은 영토 분쟁이겠지.'

어쨌거나 남의 나라 일이다. 그냥 남의 나라도 아니고 남의 세계의 일이었으니 창공이 알 바는 아니었다.

마차는 어느 여관 앞에서 멈추었다. 창공이 아스터에게 부탁했던 대로 적당하게 큰 여관이었다. 드디어 마차에서 내린 일행은 기지개를 켜는 등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어있던 몸을 풀었다.

"저, 창공아. 나 할 말 있는데..."

나유는 쏜갈같이 창공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고, 륀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거리의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Ignem."

미리 안쪽에 연초를 다져두었던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기분 좋은 향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창공이나 아스터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비록 지부에 놀러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요새 겪은 일들에 비하면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최초의 밤이었다. 그녀와 창공이 연인 사이가 된 뒤로, 창공에게 안기지 않는 최초의 밤. 그렇다면 분명 홀가분한 마음이 들어야 했다. 싫어하는 남자에게서 벗어나 오랜만에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 진짜... 변했나 봐...'

하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아쉬움과 쓸쓸함이 륀의 가슴을 괴롭혔다. 괜히 엉덩이에 손이 가고,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게다가 밤을 혼자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저녁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이불을 덮고 있어도 알몸으로 겨울 길거리에 내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창공의 품이 떠오른다. 그에게 안겨서 따스함을 느끼며 편하게 잠들었던 오늘 아침의 기억이. 절로 걸음이 멈추고, 지금 당장이라도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고가 륀의 머리를 지배했다.

안기고 싶었다. 창공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교태를 부리고, 엉덩이를 맞으며 잘못한 일이 무엇이든 용서를 빌고 싶었다.

"이러면 안 돼."

륀은 간신히 자제심을 발휘해서 고개를 세차게 휘저으며 파이프를 쭉 빨아들였다. 폐 안쪽에 뜨거운 연기가 가득 차니 반대로 머리와 자궁이 차분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세차게 뛰는 심장은 정욕의 검은 불이 붙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다시 륀의 온몸을 잠식할 기세로.

[언니... 몰랐는데 참 음탕했구나? 언니의 그... 더러운 음욕을 채우려고... 나에게서 창공 님을...! 빼앗아 갔던 거네...!]

[더러운 탕녀 같은 모습으로...! 창공 님의 눈을 가리고! 동생의 사랑을 빼앗고! 자기 성욕을 채우기 위해 창공 님을 이용했어!]

문득 아스터가 했던 말이 떠올라, 륀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아스터의 말대로 륀은 음탕하고, 더러운 탕녀 같은 본성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그녀는 아스터를 지키겠다는 목적보다는 그저 창공에게 안겨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젠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녀의 몸은 완전히 창공에게 굴복했고, 마음까지도 절반은 굴복한 상태였다. 원하기만 하면 놓아주겠다는 창공의 말도 거절하고 스스로 속박을 원할 정도로. 륀은 보이지 않는 목줄이 자신의 목에 채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영문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자신은 자랑스러운 웨리의 교수인데도 어떤 남자의 소유가 되어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서 한편으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잡념은 떨쳐내자.'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 머리를 비운 륀은 다시 한번 오늘의 목적을 상기했다. 그녀는 튜리에 위치한 웨리의 서키르케 지부로 찾아가야 했다.

'Scusi, signore...'

알펜시아에서 키르케로 넘어왔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쓰는 말도 바뀌었다. 지구에서 넘어온 일행이야 그냥 생각 없이 말하면 그만이지만 륀이나 아스터는 아니다. 그녀들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다이셀리시아인이었다면 만인과 자유자재로 소통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실례합니다, 시뇨레."

"...오, 아름다운 시뇨리나.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지나가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말을 거니 친절하게 웃으며 답한다. 확실히 사람들이 다소 무뚝뚝한 경향이 있는 알펜시아와는 달랐다. 당연히 키르케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남자들이 여자에게만 친절하게 대할 뿐. 키르케에서 남자들은 별 취급을 받지 못한다.

"길을 좀 묻고 싶은데요. 혹시 웨리의 지부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웨리? 마탑 말입니까? 하하... 제가 거기 찾아갈 일이 있어야 말이죠. 다만 보통 그런 건물은 중심가에 있지요."

륀의 생각도 그랬다. 자랑스럽고 당당한 마법사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저 뒷골목의 허름하고 음침한 건물에 지부를 차린단 말인가. 보통 웨리의 지부는 중심가의 품격 있는 건물에 위치했다.

"그럼 중심가는 어느 방향인가요?"

"이쪽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붉은색으로 칠해진 성당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그곳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뇨레."

"별말씀을! 오히려 미인을 돕게 되어 영광이지요!"

그의 말대로 길을 잡고 가니 과연 붉은 성당이 나왔고, 그 오른쪽으로 난 길에는 관공서를 비롯한 여러 커다란 건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건물들 가운데 하얀 벽돌과 대리석으로 한껏 치장된 건물이 하나 있었다. 5층 높이의, 자못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건물이다.

[서키르케 웨리 지부]

황금색으로 멋들어지게 쓰인 간판. 수식어를 더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이름이었지만 그 무게감은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덜컹.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니 마치 바깥세상과 격리된 듯한 고요함만이 남는다. 로비 안은 등불을 잔뜩 밝혀 밝았지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서키르케 지부입니다. 성함과 직위가...?"

문과 똑바로 마주 본 곳에 위치한 책상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꺼내려는데, 계단에서 내려오던 남자가 륀을 발견하고선 크게 소리쳤다.

"아, 이게 누구야! 퐁박!"

"하아아... 퐁박이라고 부르지 말랬는데..."

륀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며 손을 흔든다.

"여긴 어쩐 일이야, 퐁박. 설마 우리 지부로 전출이라도 온 거야?"

"아뇨.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비타로 갈 일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음, 그래? 퐁박이 정보를 원하면 줘야지. 가지고 있다면 말이지만."

안드레아 란차. 륀보다 열 살이 더 많은 마법사로, 웨리에서 그녀와 함께 일하던 마법 이론 교수였지만 키르케 출신인 그는 평소 지부로의; 전출을 희망했었고, 결국 작년 그 꿈을 이루게 되었더랜다.

"그... 퐁박이라고 그만 좀 부르시죠?"

"왜? 맞잖아. 퐁박. 퐁파두르 박사. 줄여서 퐁박."

"퐁파두르 교수라고 부르세요. 좀."

란차 교수는 남의 이름이나 직위를 줄여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같은 학과에서 일하는 륀도 당연히 그 대상이었고, 호칭은 '퐁파두르 박사'의 준말인 퐁박이었다.

그는 귀엽지 않으냐며 좋아했지만 륀에게는 실로 끔찍하게 들리는 호칭일 뿐.

"퐁교보단 퐁박이 낫잖아?"

"닥쳐요."

"하하하... 어쨌든 올라가자고. 오랜만에 봤는데 차나 한잔 대접하지. 이봐, 아리엘. 그녀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굳이 검사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접수원인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제 할 일을 시작했다.

"내 방은 4층에 있어."

륀과 란차는 계단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비타에 갈 일이 있다고? 어쩐 일로?"

"개인적인 일이라."

"흠... 그래? 개인적인 일이라는데 더 묻긴 뭐하고, 그럼 이스트리로 길을 잡았겠네?"

"그래야죠."

"이스트리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실은 그곳에서 일이 생겼거든. 동쪽 지부에서 그 사건 때문에 조금 곤란해하고 있다나 봐."

"사건이요? 무슨 사건이죠?"

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말이야 조금 곤란한 정도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지부에서도 알고 있을 정도면 조금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곳에서 교수 한 명이 실종됐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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