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99화 (99/178)

〈 99화 〉 밤하늘 (6)

* * *

창공은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힘겹게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제 새벽 5시였다.

"쿠우... 쿠우우..."

그렇게 눈을 비비고 있노라니 옆에서 들려오는 나유의 숨소리. 이대로 다시 잠들까 했던 창공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유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든 채였다. 평화로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 얼굴.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방 안 주전자에 미리 따라 놓았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왜 이 시간에 일어났는지는 창공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여관은 6시 반부터 아침을 제공했고, 일행들은 보통 7시 즈음에는 일어난다.

일행들 중에서 아침에 제일 약한 나유는 아린이 깨워주지 않으면 시간을 맞춰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나마도 더 자고 싶다며 아침밥을 거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도대체 왜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던 창공은 이내 원인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옆에서 풍겨 오는 나유의 살결 향기 때문이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요새 부쩍 는 성욕 때문이다.

이 세계에 와서 지금껏 거느린 여자만 셋. 거기에 하나가 더 들어올 예정. 대놓고 다자간 연애를 펼치는 건 생각보다 귀찮을뿐더러 때론 짜증 나는 일도 있었지만 그만큼 성취감이 있고 재미있었다.

거기에 비록 지구인은 아니긴 해도 교수씩이나 되는 여자의 후장을 차근차근 공략해서 함락시키는 짜릿한 경험도 했다. 최근에는 섹스나 유사 성행위 없이 잠드는 밤이 드물 지경이다.

그런 탓일까. 창공은 자신이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안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물론 그에겐 뛰어난 자제심과 냉철함이 있었으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인들을 품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곤란한 것은 사실.

지금도 창공은 꿈나라에 간 나유를 이쪽 세상으로 불러 그녀를 질펀하게 따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또,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나유도 창공이 안아 준다고 하면 결코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창공은 물 한 잔을 더 들이켜고 방을 나섰다. 나유와의 비몽사몽 섹스도 재미있겠지만, 최근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김아린. 륀과는 다른 방면으로 꺾는 맛이 있는 여자. 하지만 결정적으로 꺾일 계기는 보이지 않는 여자.

이제까지 창공이 경험한 연애는 수직적 권력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가 상위 포지션에 있고, 대부분의 맺고 끊음은 그가 결정한다. 때로 여자 쪽에서 먼저 이별을 통보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여자의 의지 대로라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조차 창공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에. 몇 번 밤을 같이 하다가 질리면 관계의 관리를 멈추고, 그렇게 되면 창공이 싸늘해졌다고 생각한 여자들은 관계를 지속하려 애쓰다가 끝내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일방통행적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얻으며.

하지만 아린은 창공과의 쌍방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다음에도ㅡ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ㅡ그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서.

물론 나유도 그런 면이 있지만, 그녀의 사랑은 일종의 체념 비슷한 것이었기에 아린과는 조금 달랐다. 아린이 오기를 부리면 창공도 오기를 부리고 싶어진다. 그녀를 꺾어놓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그 자신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발걸음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굳이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린은 충분히 안을 가치가 있는 암컷이었지만.

이윽고 다다른 아린과 나유의 방. 다만 나유는 그의 방에서 자고 있으니 지금 아린은 2인실을 혼자 쓰고 있는 셈이었다. 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가 처음으로 느껴지고 그 가운데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한 가닥.

아린은 어깨까지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사이 움직이지도 않는지 침대와 이불의 모양새가 깔끔하다. 창공은 그녀의 침대에 다가가 가장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한데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원체 잠이 옅은 것인지 아린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누, 누구...?"

"나야."

"앗, 잠깐. 잠깐만요... 오빠?"

그녀는 창공을 확인하고선 황급히 등을 돌리고 눈을 비볐다.

"지금... 지금 몇 시예요?"

"5시 조금 넘었어."

"새벽부터... 급한 일 있어요?"

"그건 아니고."

"그러면 조금 시간을 줘야죠... 지금 막 깨서 얼굴 상태가 조금 그런데..."

투정을 부리는 아린. 막 잠에서 깬 얼굴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당연한 마음이다.

"너 어차피 화장 안 하잖아."

"화장품이 없어서 못 하는 거거든요? 평소에도 기본만 하긴 하지만... 어쨌든 왜요?"

창공은 대답하는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의 옆에 파고들어 누웠다.

"아니 잠깐만요. 말을 좀. 흐읍...!"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히고, 나오려던 말은 막혀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어진 갑작스러운 키스였기에 아린은 상당히 당황했지만, 곧 눈을 감고 얌전히 창공을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오빠와의 키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거기에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는 딱딱한 그것까지. 아린은 창공이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푸하아..."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공은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아린은 속옷만 입은 채였고, 브래지어 아래에 손을 넣어 들추기만 하면 맨 가슴을 드러낼 수 있었다. 보드랍고 따스한 그녀의 살에 손가락이 닿자, 짜릿한 감각이 창공의 척수를 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빠. 오빠...! 잠시만요."

아린이 그의 손을 잡고 제동을 건 것이다. 물론 힘의 차이가 현저히 나는 둘이었으니 창공이 강행하려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에 그가 멈칫했다. 창공의 계산으로는 아린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난 까닭이었다.

"왜. 하기 싫어?"

"그게. 아, 그... 미안, 해요. 제가 요새 몸이 안 좋아서요..."

"안 좋다고? 감기야?"

"그건 아니고요... 대신 입으로 해 드릴게요."

그녀에게서 주제를 돌리려 한다는 인상이 느껴졌다. 하지만 창공은 굳이 아린을 추궁하지 않았다. 고집이 센 아린이 함구하겠다고 결정한 사실은 어지간해선 끌어낼 수 없음이 자명했고, 또 자기가 나서서 성욕을 풀어주겠다는데 굳이 초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린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가랑이 사이에 웅크린 채 봉사를 시작했다. 의외로 사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린을 사정없이 범할 생각으로 흥분한 채였던 데다, 그녀의 기술이 그새 늘었기 때문이었다.

쪽...

입안에 사정된 정액을 삼킨 아린은 그의 물건에 입을 맞춘 다음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비록 목적했던 섹스는 할 수 없었지만 의외로 만족스러운 봉사를 받은 창공은 답례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아 줘요..."

안아 달라는데 못할 건 없었다.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곧 창공의 품에 안긴 아린은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한가득 들이켰다.

"힐링된다아..."

"자지 빠는 게 힐링이야?"

"아 진짜!"

귀여운 항의는 잠깐뿐이었다. 그 뒤로 두 남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창공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아린이 그대로 입을 열어 말했다. 명치 부근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과 진동은 창공에게 은근한 포근함을 선사했다.

"오빠. 지구로 돌아가면 말인데요."

"응."

"대학교 계속 다닐 거죠? 다니다가... 로스쿨?"

"그래야지."

"그럼 법조인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예요? 아니아니, 일을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거냐는 거죠."

"일이 삶이야."

"으, 그런 거 말구요. 평생 법전만 만지다가 죽을 건 아니잖아요. 가족이라던가..."

"딱히."

"결혼 안 하려구요?"

"왜 해."

거기에서 대화가 끊겼다. 아린이 망설이며 입을 연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아기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귀찮아."

"그래도 일단 생기면 귀엽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어, 정말요?"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아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거기에 은근히 느껴지는 기쁜 기색까지. 결국 창공도 살아 맥동하는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뒤이은 그의 말은 아린을 어떤 의미로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크면 끔찍하잖아."

"...오빠라는 사람은 말이죠. 진짜로."

"메말랐다고? 자아 성찰을 도와줘서 고맙다."

"오빠 같은 아들이나 끔찍하겠죠!"

"너 같은 딸이 더 끔찍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애초에 곧이곧대로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둘 다 너무 자존심이 강하다. 특히나 어떤 면에서 자신과 닮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는.

"조금 행복하게 살려고 해 봐요. 그런 삶의 어디에 행복이 있어요?"

"그래서 네가 내 삶의 행복이 되어 주겠다고? 재무 관리는 안 해주냐? 용돈은 한 달에 얼마나 줄래? 30만 원?"

"3만 원도 아깝네요! 오빤 정말 바보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결혼을 뭐라고 생각하는데?"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관계요!"

"애냐?"

"하. 그럼 어른의 의견은 뭔데요?"

"계약 관계지. 직무와 책임을 분담하는."

"다른 계약이랑 차이가 뭔데요? 결혼만의 차별화된 점이 있잖아요."

"일반적인 계약에 섹스를 곁들인 게 바로 결혼이야."

"결혼은 성매매가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결혼은 유사 성매매거든."

"그냥 자요. 말하기 싫어."

토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 뒤로 아린은 정말로 말이 없었다. 기분이 조금 불쾌해진 창공은 본능적으로 아린을 만나러 온 것이 손해인지 아닌지 저울질을 했는데, 적어도 손해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자 편하게 눈을 감았다.

'논쟁 한 번 하고 빨아주는 거면 괜찮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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