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00화 (100/178)

〈 100화 〉 밤하늘 (7)

* * *

나는 지금 촉촉하고 시원한 아침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튜리의 길거리를 걷고 있다. 지부에 걸려 있던 시계로 확인했을 때엔 6시 45분이었고, 그곳에서 여관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따라서 아직 7시가 되기 전이었지만 길거리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물론 저녁때처럼 아주 붐비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동안 우리 일행이 지나 온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거나 아침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알펜시아에선 룬덴을 제외하고 이처럼 아침부터 붐비는 도시가 드물었지만 키르케에선 이런 풍경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이런 광경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볼 일은 없다. 애초에 내 고향은 우리 자랑스러운 아퀴탄의 수도인 뤼테스 옆에 붙어 있는 남작령이었으니까. 푸아송 남작령 자체는 작은 영지이지만, 뤼테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으니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많이들 우라 남작령을 지나치곤 했다.

파이프를 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에 옛날의 그리운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 쌍둥이의 방은 2층에 있었고, 나와 아스터는 창문을 열고서 길거리 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소소하고 어이없는 취미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아련하고 그리웠다. 아무 생각을 할 필요 없이 주어진 나날에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던 그날의 풍경이.

물론 어렸을 적의 난 나름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적 재능이 없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지위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 현실에 순응하며 잡화점을 물려받고 남자 하나를 만나 결혼해서 잡화점의 여주인 소리를 듣는 데에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고...'

예전이라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연애하는 상상을, 로맨틱한 고백을 받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덧없는 꿈이라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세상의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마법사였으니까. 웨리의 마법 교수였으니까. 나의 평생을 마법에, 미지의 진리에 바쳤기에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올 틈은 없다고 생각했다. 선망하지만, 선망하는 데에서 그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새 난 이따금씩 남자의 옆에 행복한 얼굴로 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어쩌면 그런 미래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는... 그런 심상의 침입이다.

여자의 행복을 찾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상상 속의 그 남자가 최근 나에게 온갖 심한 짓을 저지른 남자라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결혼 따윈 생각도 안 하고 있을 텐데...'

주이... 서... 창공.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가 내게 강요한 일들은 교수로서,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뿐이었다. 당장에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난도질을 해도 모자랄 정도.

한데 왜 그를 생각하노라면 가슴속 한편 어딘가가 자꾸만 간질간질한 것일까. 왜 그에게 안겨서 스르르 잠들었던, 따뜻하게 휴식을 취했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에게 안겨서 아양을 떨며 몸을 바칠 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된다. 목줄을 차고 바닥을 길 때는 이 이상 있을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아랫배가 저려온다.

그냥... 편해지고 싶다. 그의 옆에서... 내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그 남자의 옆에서...

'아...'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난다. 그냥 편해지면 되는 게 아니냐고.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다. 그가 내 순결을 가져가지 않았다 한들 내가 처음으로 동침한 남자는 그다. 내 입술을 가져간 남자도 그다. 그는 나조차 본 적이 없는 내 몸 구석구석을 전부 눈에 담았으며, 온갖 부끄러운 모습들도 알고 있다.

그런 내가... 내 몸에서... 그를, 그의 흔적을 지워낼 수 있을까?

불가능해.

당장 어젯밤만 하더라도 나 홀로 있는 침대가 너무나 쓸쓸했고 차가웠는걸.

관장도... 했는걸... 비록 그는 없지만, 그의 손길이 생각나서...

나 홀로 수음을 하며 주인님을 속삭이고, 꿈에서조차 그에게 안겼는걸...

"아... 아아..."

이제야... 알아버렸어...

나...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어긋나고 이지러진 사랑이지만 이것도 사랑이구나...

날 추락시키고, 비참하게 만들고, 마구 짓밟은 남자에게 종속되어 버린 거구나...

"시뇨리나? 시뇨리나?"

"앗... 뭐, 뭐죠?"

갑자기 시야가 명확해지며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꽤나 나이 지긋한 노인의 얼굴.

"괜찮아요? 울고 있길래..."

"제가요...?"

황급히 얼굴에 손을 대어 보니 노인의 말대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은밀한 모습을 남에게 들킨 것 같이 부끄러움이 몰려든다.

"어디 아파요? 가까운 의사에게..."

"아니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럼."

난 황급히 모자를 푹 눌러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난다. 자리를 벗어난 후에도 종종걸음은 그치지 않고 여관을 향한다.

오늘 아침은 그가 보고 싶다. 인사를 건네면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그의 차갑기에 뜨거운 대답이 듣고 싶다. 그리고 오늘 밤은... 그에게 마음껏 안기고 싶다. 엉덩이도 잔뜩 때려줬으면 좋겠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이 보인다. 급할 것은 하나도 없건만 어쩐지 급한 마음이 들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로비에는 일행 몇몇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교수님. 오셨어요?"

"왔네?"

"안녕. 좋은 아침."

날 발견한 김아린과 어택이 인사를 건네고, 고다가 옆자리를 가리키며 식사를 권한다.

"여기 앉으시죠. 여기 면 삶는 솜씨가 제법인데요?"

"고맙지만, 난 이미 먹고 왔어. 그보다 서창공은? 지금 방에 있어?"

"네... 뭐. 아스터 씨랑 할 이야기가 있."

"고마워! 맛있게 먹어!"

...

하.

아스터. 아스터.

아스터...

네가 왜 거기 있는 거지?

내가 무엇 때문에 그와 계약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거기 있으면 안 돼. 거긴 내 자리야. 그가 원한다면 모든 세상 여자를 품을 수는 있어도, 너만은 안 돼. 너. 너한텐 안 돼.

어렸을 때부터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건 항상 내 것이 되었지. 이번에도 똑같아, 아스터. 많이 해 봐서 어렵지 않잖아?

벌컥!

노크도 없이 그의 방문을 여니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담소를 나누는 서창공과 아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더럽고 추잡한 욕망으로 장식된 사랑을 깨달은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어울릴까.

"륀."

"아..."

"야."

"...앗. 응. 불렀어?"

그의 표정에서 작은 불쾌감이 드러난다.

"넌 말도 없이 문을 여냐? 지금 얘기 중이잖아. 아스터랑."

"그게."

생각 없이 한 짓이긴 했지만 확실히 무례한 행동이다. 사과하려 하는데, 아스터가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말한다.

"창공 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유가 있으면 해도 되나?"

"제 얼굴을 봐서 넘어가 주세요. 네?"

다시 한번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아스터... 언제부터 그렇게 남자에게 꼬리칠 줄 알게 된 거지? 이제 보니 너도 여자였구나? 그렇게 그의 씨를 받고 싶어? 그의 아이를 낳고 싶어?

안 돼. 그건 안 될 일이야.

"그만."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나도 흠칫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아스터. 넌 나가. 그랑 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어...?"

아스터가 당황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본다.

그런다고 내가 속을 것 같아? 이제야 알겠어. 너는...

"륀."

그의 목소리가 날 상념에서 일깨웠다.

"나랑 이야기하기 전에... 너희 둘이 먼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네."

"뭐라고?"

"난 잠깐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올게. 그 사이에 둘이 얘기 끝내. 무슨 갈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더 선순위 같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빠르게 걸어 나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내 옆에 선 그 순간, 한 마디를 남긴다.

"가급적이면 시간 안에 해결해. 나랑 아스터는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스터... 너 그에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야?

"언니."

아스터는 아직까지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게서 뿜어지는 적개심에 저렇게 되기라도 한 걸까? 이런 언니는 익숙하지 않다 그거지? 이제부턴 익숙해져야 할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아스터. 네 말이 맞아."

활짝 웃으며 말한다.

"나 말이야. 실은 네가 말했던 대로 음탕한 년이야. 너에게서 그를 빼앗고, 내 성욕을 채우려고 그에게 접근했어."

"뭐...?"

"모르겠어? 확실히 말해 줄까? 난 말이지. 그의 여자야. 그를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고, 엉덩이를 맞고 인간 아래의 취급을 받으며 흥분하는 탕녀야."

"이게 무슨."

"그런데 네가 그를 왜 건드리는 거지? 그는 내 남자야, 아스터. 언니 거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안 배웠어?"

아스터의 표정이 서서히 굳더니, 그날 내게 화를 내던 때의 표정과 비슷한 느낌으로 서서히 변한다. 그래... 그 표정이 보고 싶었어.

"언니. 그만해. 나 더는 참지 않아."

"못 참으면 어쩔 건데? 솔직해지자. 너도 결국 나처럼 한 마리 암컷에 불과하잖아. 자기 수컷에 다른 계집이 꼬이면 쫓아내려고 하는, 그런 암컷 말야. 그런데 이걸 어쩌지? 그의 옆에는 내가 있어."

"창공 님의 옆에 언니만 있는 줄 알아? 나유 님도, 아린 님도."

"어쩌라고."

역시 그랬던 거네. 하긴 그와 같은 남자에게 여자가 나 하나만 있을 리가.

그렇지만 너만은 안 돼. 넌 나랑 비교가 되거든. 쌍둥이의 숙명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다른 점을 찾길 좋아하지. 나는 너보다 언니야. 항상 나아야만 하는 존재라구. 너한테만은 절대 못 넘겨.

혹여 그가 나 대신 네가 더 낫다고 평가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니까. 너도 이해할 수 있지?

"아스터.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안 된다는 거야. 네가. 다른 사람 다 돼도 너는 안 돼."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결혼 전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기 몸도 바칠 수 없는 성직자 주제에 날 이겨먹으려고 들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넌 나한테 안 돼. 아스터. 그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날 용서했다고? 아니야, 아스터."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이게 이치에 맞다.

"내가 네게서 뭔가를 빼앗아가면 넌 날 용서한 게 아니라, 받아들인 거야. 건방지게 용서라는 말 함부로 입에 담지 마. 이번에도 그러는 게 어때? 그냥 받아들여, 아스터. 너와 더 이상은 나누지 않겠어."

"..."

아스터가 드디어 분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말하자면, 본색을 드러내는 거지.

"이 음탕한... 자기밖에 모르는..."

"오, 그래. 그래, 아스터.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구나?"

"나랑 나이 차이도 안 나는 주제에 언니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내가 아직도 언니에게 눌려 사는 울보 아스터인줄 알아?"

"난 그렇게 보여."

"천만에! 언니 같은 매춘부에겐 절대 밀리지 않아. 창공 님이 언니가 좋아서 계속 안아주시는 줄 알아? 아니! 창공 님께선 그냥 언니의 음탕한 몸만을 즐기시는 거야. 사랑 없는 관계는 쉽게 질려. 반드시 그렇게 돼."

"그래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넌 아무것도 못 해, 아스터. 자랑스러운 교단의 교리를 지켜야지, 아스터? 대단하신 혼전순결 말이야."

"마법사 주제에... 교리에 대해서 함부로 입에 담지 마! 신성모독이니까!"

"하! 사제다 그거지? 그도... 주인님께선 고리타분한 걸 싫어하셔. 우리처럼 개방적인 마법사들을 좋아하시지."

"내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도 알 건 다 알거든?"

"왜. 주인님께 네 그 더러운 구멍이라도 바치려고? 어디 한 번 해 봐! 주인님은 이미 내 뒷보지에 만족하고 계시니까!"

뒷보지라는 말은 놀랍도록 효과가 있었다. 하긴 성직자가 언제 이런 말을 들었을까.

"뒤, 뒷... 이 더러운 창녀 같으니! 그런 말이나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

"그거 알아? 주인님께선 내가 음탕한 계집이라고 많이 칭찬해 주셨어. 항상 내 몸을 즐기실 때면 흡족해하시지. 너? 너는 안 될걸? 너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아이가 뭘 할 수 있겠어?"

"시끄러워!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오, 신이시여..."

아스터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내가 이겼나? 이긴 거지?

"하... 하하하...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앉았다. 즐겁게 파이프를 빨아들이며 오늘 밤엔 주인님께 엉덩이를 맞을 때엔 뭐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까 고민해 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한 생각.

애초에... 난 왜 아스터가 주인님의 여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음...

...

아, 그거다. 방금 내가 말해놓고도 까먹었네.

동생이 언니 것을 탐하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주인님께선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주인님의 것이지. 그런데 주인님이 아스터마저 가지시는 건... 죄송하지만 안 될 말이야.

이게 아닌가? 뭔가 논리가 잘 이어지지 않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기억도 안 나.

안 나면 어때.

빨리 주인님께 벌받고 싶다... 오늘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까 분명 엄하게 혼내 주시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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