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별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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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창공 일행에게 여정이란 마차를 타고 이 지점에서 저 지점까지 이동하는 것에 불과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괜히 강도를 맞닥뜨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다만 워낙에 무료하기도 하고 계속 객차 안에 앉아만 있으면 몸이 굳는 탓에 때때로 마차를 세우고 찌뿌둥한 몸을 풀기도 했다. 대체로 그것은 근접 전투를 벌이는 파티원들끼리 서로 병장기를 맞대며 대련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도 비슷했다. 히사시는 길가 옆에서 불을 피우며 점심을 준비하고, 창공은 구경하고, 아린은 연주에 마나를 담는 연습을 하고, 륀은 그것을 옆에서 봐 주는... 특별할 것 없는 그런 일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유와 어택, 그리고 아스터가 대련을 해야겠지만 어쩐지 아스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칼을 뽑아 주던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마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아스터가 한 번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었지만 이 이상 사태에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성실하고 힘찬 아스터라도 피곤한 날이 있을 수 있지,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람이 365일 휴식 없이 달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스터는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핑계는 그렇게 댔지만서도 정작 속마음은 달랐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 일.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도무지 검을 잡을 형편이 안되었던 것이다.
[나 말이야. 실은 네가 말했던 대로 음탕한 년이야. 너에게서 그를 빼앗고, 내 성욕을 채우려고 그에게 접근했어.]
"말도 안 돼..."
아스터가 얼굴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물론 너무 화가 나서 언니에게 폭언을 퍼부은 적은 있었고 그 뒤로도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본인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을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은 언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홧김에 그랬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스터가 홧김에 그런 말을 했듯이, 언니도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이 인정한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들이 더 있지 않던가.
[그거 알아? 주인님께선 내가 음탕한 계집이라고 많이 칭찬해 주셨어. 항상 내 몸을 즐기실 때면 흡족해하시지. 너? 너는 안 될걸? 너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아이가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 아이란 말이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 보면 아스터는 아무 잘못 없이 봉변을 당한 것이나 진배없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은 정말로 없었다. 사제로서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전부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생활화되어 있었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오늘 아침엔... 창공과 함께 차를 마시며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는 게 전부였다. 정말로 그랬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창공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생각도 있긴 했다. 하지만 아스터가 창공을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사랑이 죄일 수는 없는 법이다.
심지어 언니인 륀이 먼저 창공에게 고백을 했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해도 말이다. 처음에는 아스터가 포기하려고도 했다. 언니가 사랑하는 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빌어주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게 너무나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왜 언니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일까. 심지어 일부일처제인 것도 아닌데. 물론 두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통상적으로 왕가의 혼인이 아니라면 찾아보기 힘들긴 했지만 그게 법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미 일행 내의 다른 여자들도 창공의 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륀과 창공의 1 대 1 연애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아스터에게도 기회가 주어저야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냥 창공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기만 하는 거였다. 아니, 지금도 그러면 된다.
'그런데 왜... 날 가로막겠다는 거야...'
[그런데 네가 그를 왜 건드리는 거지? 그는 내 남자야, 아스터. 언니 거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안 배웠어?]
[아스터.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안 된다는 거야. 네가. 다른 사람 다 돼도 너는 안 돼.]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 아스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과 나누기가 싫었다는 걸까. 결국 륀은 자기 동생을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그녀에게 좋은 옷이 있으면 가져가고, 맛있는 게 있으면 빼앗아 먹고... 항상 언니에게 바쳐야만 하는 존재로 아스터를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참아야 하는가?
'...아니야!'
주먹을 꽉 말아 쥐는 아스터. 그녀는 드디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더는 참지 않기로. 더는 양보하지 않기로. 더는 용서하지 않기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사랑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성찰을 수백, 수천 번이나 반복했지만 결론은 똑같다. 혼전순결의 의무도 아스터를 가로막진 못한다.
당당히 일어서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창공을 찾는다. 그는 길가에 앉아 일행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나유와 어택이 대련하는 것을, 때로는 아린의 연주를, 또 때로는 히사시가 불앞에서 씨름하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아스터를 볼 차례였다.
"창공 님?"
"...어."
그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옷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던 건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창공이 대답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혹시 마차 안에 가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하다가 만 얘기? 그렇게 해."
그는 선선히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터가 미소를 지었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잠깐. 멈춰."
륀이었다. 아린에게 마나 활용법에 대해 강론하던 그녀는 아스터가 창공에게 접근하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왜? 왜 그러는데?"
아스터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몸을 빠르게 돌려 언니를 쏘아 본다.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던 시선. 그녀 자신은 몰랐지만 그것은 완전히 연적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었다.
"내가 창공 님이랑 이야기하면 안 돼? 언니 정말 대단하다. 창공 님이 언니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네? 그건 좀... 너무 건방진 생각 아닐까? 아니면 혹시 마법사들은 다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거야? 응? 그런 거냐고."
"야. 너 말 다 했어?"
"아니. 아직 안 끝났어. 내가 그동안 가만히 있으니까 옛날처럼 당하기만 할 줄 알았지? 언니. 그냥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구. 고작 3분 먼저 태어난 걸로 내가 언니 대접해 줄 때 말야."
"너... 너...!"
국자로 냄비를 젓던 히사시가 눈알에 힘을 주고 제 손만을 바라봤다. 마치 그곳 외의 다른 곳은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이.
"난 들어가 있을 테니까 뭐가 됐든 해결하고 와."
한편 창공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논쟁이라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아스터의 쏘아붙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응? 언니 동생에다가, 착해 빠지고, 성직자라서 화도 못 낼 줄 알았냐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날 대하지 마. 이렇게 나오면 언니 편만 없어지는 거 몰라? 솔직히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언니. 좀 부끄러움이라는 걸 알려고 노력해 봐."
"아스터...! 야...!"
"왜? 화나? 언니 정말 염치라는 게 없구나?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이 아닐까? 응?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내가 누굴 사랑하든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얼굴을 완전히 굳히고 륀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자기 동생에게는 잘못된 사랑이라고 해 놓고서 먼저 고백해 버린 주제에. 도대체 무슨 낯짝이야?"
"...야. 그만해라."
"또 음탕한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야? 응? 이 더러운 창녀 같으니. 솔직히 말해 봐. 처녀는 옛날에 갖다 버렸지? 정절이란 게 뭔지 알기나 할까? 오, 주여... 부디 이 작부만도 못한 여자를 어여삐 여겨 주세요..."
"아스터 퐁파두르!"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륀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택이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이거 놔!"
"그만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면 이거 놔! 간섭하지 말란 말이야!"
"야! 좀 붙잡아!"
히사시, 나유, 아린까지 달려와서 두 자매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하나 계속 달려들 기세로 날뛰는 륀과는 달리 아스터의 태도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처럼.
"아스터 씨."
"괜찮아요, 아린 님. 저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조금 전에 지었던 표정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다. 너무나 태연자약한 탓에 아스터를 말리는 아린은 상당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저는 괜찮답니다. 그보다... 제 언니를 좀 말려 주시겠어요?"
"아스터 씨는요...?"
"저는 창공 님과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제 언니가 여러분께 민폐를 끼치는군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앗, 아뇨... 그럴 필요는."
아린은 멍하니 서서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 아스터의 등만 지켜보았다.
"야! 아스터 퐁파두르! 이리 와! 너 방금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 야아아아아!"
그 모습은 악다구니를 쓰는 륀과 너무나도 대비되어, 마치 악인과 성자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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