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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02화 (102/178)

〈 102화 〉 별의 추락 (2)

* * *

마차 안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던 창공은 안으로 들어오는 아스터와 시선을 마주하고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해결됐어?"

"네."

"그런 것치곤 네 언니는 아직까지 저러고 있는 것 같은데."

륀이 고함치는 소리는 아직도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는 중이었다. 화가 극도로 치민 사람이 내뱉는 말답게 내용이 왔다 갔다 하며 때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했지만 요점만 요약하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정도가 되겠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 언니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릴게요."

창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스터조차 별 대수롭지 않게 심심한 사과를 건네는 것은 은근히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창공도 아스터를 바라보는 시선은 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착해 빠지고, 순수하고, 정이 많아 스스로 발목 잡힐 일을 하고, 모략이나 타인에 대한 비방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오늘 아스터가 보여 준 모습은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는 데가 있었다.

하긴 아스터가 마음씨 여릴 뿐이지 정박아는 아니다. 위협적인 상대에게 칼을 빼들어 상처를 입히거나 죽일 준비도 되어 있고... 어쩌면 평소의 모습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창공이나 가족인 륀조차 아스터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네가 대신 사과하면 뭐 하냐. 됐어. 그나저나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사실 이미 예측은 갔다. 맨 처음 륀과 계약을 맺었던 그날 전해 들었던 것도 있었고... 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강하게 예상했더랬다.

"저... 제 언니가 창공 님과... 음. 사귀고 있지 않던가요?"

"그랬지."

실질적인 내용이야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히 륀은 창광과 연인 관계였다. 일행들 앞에서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표하기까지 했었고.

"그런데 창공 님께는... 다른 여성분들도 옆에 두고 계시는 게..."

"맞아."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거야 딱 보면 아는 사실이니까. 요새 륀을 개발하느라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상당히 드물긴 했다. 하지만 나유와 아린이 그를 대하는 모습에서는 분명히 단순한 친구나 오빠 이상의 느낌이 났던 것이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은 다음에야 모를 리가.

지금 창공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사실을 아스터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그녀는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일처다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게 본인의 이야기가 된다면 또 달라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실은 나유 님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다들 창공 님을 사랑하신다고..."

"아, 나유가 그렇게 말했어?"

창공은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틀어막았다. 결국 아스터는 적어도 연애에 대해선 숙맥이 맞긴 했나 보다, 하면서. 눈치껏 알아차린 게 아니라 나유에게 언질을 받고서야 알아챘다니... 하기야 어떤 면에선 아스터답긴 했다.

"네."

"그런데 뭐 하다가 그런 얘기가 나왔는데?"

"그게 말이죠... 후...!"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아스터는 이내 각오를 굳힌 표정으로 창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드릴 말씀이 바로 그 부분이거든요."

"말해 봐."

"연주회 기억하시나요? 룬덴에서 있었던."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합창단을 지휘하시던 창공 님의 뒷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아마 모르실 테죠. 아아...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가 떠오른답니다. 햇살을, 바다를, 폭풍을 지휘하시던 그 모습이. 창세기에 적힌 천지창조 적의 모습이 그러했을까요. 맞아요. 그럴 거예요. 그날 창공 님께선 새로운 세상을 만드셨어요."

아스터가 신실한 사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이례적일 정도의 칭찬이었다. 그만큼 창공과 아린이 기획했던 연주회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단 뜻이리라. 그러나 아스터가 연주회에 대한 감동을 말하기 위해 이렇듯 마음을 다잡은 것은 아닐 터.

"그리고 그 세상에서 소녀는... 창조주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앞으로 소녀는... 저의 세상은... 그분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

'그분'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명백했지만 창공은 그저 가만히 아스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희열을 참아내면서.

"그동안 저는 제가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다고 생각했어요. 태양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행복인 해바라기와 같다고요...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더라도,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린다면 추운 밤은 견딜 수 있겠죠.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이 생긴 거예요."

아스터는 손을 뻗어 맞은편에 앉은 창공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바라만 보는 것은 행복함과... 그에 걸맞은 두려움을 선사했지요.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엔 주님께서 안배하신 귀중한 인연이라 여겼고, 헤어짐 또한 그런 것이라 여겼어요. 하지만 마침내 저희가 다시 만났을 때... 제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을 때... 저는 주어지는 대로 따랐던 주님의 뜻에 진정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마치 창공이 자신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저 눈빛이.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말이죠. 태양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던 해바라기는 언젠가 다가올...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날을 두려워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면, 저는 후회를 남기는 대신 다가가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겠어요."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창공은 고개를 푹 숙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얼굴을 아스터에게 보였을 때는, 웃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거절하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같은 여자는 언니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스터."

"네."

"이건 륀한테도 안 말했던 건데."

그녀의 눈이 더욱 초롱초롱 빛났다. 언니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말해준다는 건, 그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하며...

"우리. 그러니까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지?"

"그럼요."

"그리고 난 기회가 된다면 무조건 그렇게 할 거야. 굳이 이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없어."

"이해하고 있어요."

"그렇다는 말은. 네가 내 연인이 되더라도 상황은 변할 게 없다는 말이야. 설령 네가 내 아이를 낳는 한이 있더라도 난 저쪽 세상으로 넘어갈 거야. 알아?"

아스터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창공의 도박수였다. 사실을 말하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그가 굳이 이런 말을 해서 아스터의 마음을 흔들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

그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굳히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창공 스스로도 말을 내뱉고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회는 항상 늦는 법이고, 최후에 남는 것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

"잡지 않을게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헤어지는 날은 언젠가 온다고 방금 말씀드렸죠. 제가 그날에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태양은 자신의 존재로 해바라기를 붙잡지만, 해바라기는 태양을 붙잡을 수 없지요. 그러니... 제가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당신을 바라봐도 될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창공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그를 꽉 껴안았다.

"고마워요..."

"그래."

아스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창공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빠르게 진정한 아스터는 포옹을 풀고 자리에 앉아 행복한 웃음을 한가득 지었다.

"아아... 제 마음을 받아주신 것에 들떠서 너무 행복한 미래의 상상을 해 버렸네요... 부끄러워요..."

"뭔데?"

"제가 창공 님의 아이를 낳고... 훌륭하게 기르는 상상을요. 임신하면 기뻐해 주실 건가요?"

"그거 말인데."

그는 똑바로 대답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실질적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분명히 전에 말했었지. 사제는 혼전순결의 의무를 가진다고."

"맞아요. 정식으로 약혼식을 마친 약혼자와의 관계도 허락되지만요. 아... 그 말씀은 저와... 그러니까... 부, 부부..."

"정식이라고 하면. 네 부모님이 있는 아퀴탄까지 가야겠네?"

"네..."

아스터는 양손을 들어 발갛게 물든 뺨을 감쌌다.

"창공 님의 부모님... 그러니까 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되실 분들께선 이곳 다이셀리사이에 계시지 않지만 그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아! 하지만 그분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굳이? 난 상관없는데."

창공은 머릿속으로 견적을 작성하고 있었다. 약혼이라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정도다. 굳이 아스터와 정식으로 섹스를 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말이다. 그러고서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미련 없이 가면 된다. 본인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가 그렇게 갖고 싶다면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임신시키고 가면 된다. 어쩌면 쌍둥이 자매 둘 다 아이를 갖게 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우리 세상에선 결혼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아. 그런 절차가 있긴 한데, 다분히 형식적인 거라. 그냥 해도 좋아."

"하지만... 음..."

"내가 된다고 하잖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상관... 없겠죠...?"

"그렇지. 아스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어. 천천히 하자고. 대신 륀이 밤마다 나랑 함께한다고 질투하지는 말고. 사제로서 지킬 건 지켜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창공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는 건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을 터. 그는 이러다가 은근슬쩍 좋은 방법이 있다면서 뒷구멍에 관심을 가지게 할 생각이었다. 물론 거부감이야 있겠지만 그토록 간절한 사랑에다가 약혼을 약속한 사람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그거 말인데요, 창공 님. 좋은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아스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창공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순결을 지키면서도 창공 님께 안길 수 있는 방법이요..."

"어?"

"음탕한 여자라고... 흉보지 말아 주세요... 실은... 그... 엉덩이로..."

"..."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 손에 들고 아스터를 바라봤다. 정말 흔하지 않게 드러나는 그의 당황한 표정.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 어젯밤에도 저 혼자... 어... 창공 님께 안길 준비를... 지금도..."

"지금도?"

"너, 너, 넣고... 있어요... 직원분께선 플러그... 라고 하셨는데..."

그제서야 창공은 확실히 깨달았다.

아스터라는 사람은 이제껏 과소평가되어 있었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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