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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03화 (103/178)

〈 103화 〉 별의 추락 (3)

* * *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건 마차는 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하루 종일 달린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 적당한 여관을 잡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을 기약하며 다들 잠에 드는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이 없다는 말은, 저녁 식사 후 담배를 피우러 여관 뒤편에 모이는 멤버들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창공, 어택, 그리고 나유. 륀도 흡연자이긴 했지만 그녀는 파이프를 피우니 논외였다.

"아 진짜 대단했다니까? 악다구니를 그렇게 쓰는데 막 그냥... 어우."

나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가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두 자매의 갈등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묘사는 지극히 편향적이었는데, 주로 아스터를 순수한 피해자로 보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제동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창공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성격이고, 어택은 일행 대다수처럼 아스터를 상당히 떠받드는 쪽이었기에 둘 중 하나의 편을 들라면 아무래도 아스터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상황이지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어택이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쯤 해 둬. 어쨌거나 륀도 우리 일행이니까."

"헤... 택이 오빠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근데 나는... 알잖아. 다른 여자들 좋게 안 보는 거. 여우들이랑 얼굴 맞대고 살다 보면 이렇게 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자꾸 이렇게 하는 건 아니야. 륀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런데 여우라면 아린이는?"

"아린이는 예외. 어우, 솔직히 아린이는 용서하고 싶더라고. 어쨌든 창공이가 받아들이기도 했고. 이 나쁜 놈아."

"..."

자긴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담배를 물고 먼 산을 쳐다보는 창공. 물론 창공을 향한 나유의 비난은 다분히 장난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렇다 쳐도 이렇듯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보통 사람의 반응은 아니다.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놀랍다는 의견을 표출하지 않는 것은 이미 다들 창공이라는 사람에게 적응했다는 뜻이리라. 사실 어떨 때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면이 엿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게 긍정적인 의미는 못 된다.

"아스터는?"

"아스터도 착하고... 그냥 도와주고 싶잖아. 세상에, 그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난 아스터가 창공이랑 사귄대도 받아들일 자신 있어. 아스터라면 인정이지."

"뭐야. 그러면 네가 말하는 여우는 결국 한 사람밖에... 됐다."

"뭐. 뭐."

"됐다고. 아 씨, 그만 좀 바라봐."

나유와 어택은 그 뒤로도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담배를 피웠다. 그러던 와중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이 공간이 셋이서 전세 낸 공간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올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 예상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고, 신나게 떠들던 둘은 의외의 출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선객이 있었구나."

검정 고깔모자를 쓰고, 눈 밑에 진한 다크써클이 내려앉은 마법사. 륀이었다. 궐련은 입에 대지도 않는 그녀가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럴 만한 용건은 단 하나밖에는 없다.

"미안한데, 서창공을 잠깐 데려가도 될까?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왜?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

입에 담배를 문 나유가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륀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달리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그래. 그리고 당신을 데려가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뭐."

"자, 자. 나유야. 다 피웠으면 자리 좀 비켜줄 수도 있잖아."

어택이 나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거의 끌고 가듯이 그녀의 몸을 밀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분란은 생겨난다. 하지만 어택은 적어도 그 분란이 그의 앞에서 표면화되는 것은 그냥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하아."

어느새 이 공간엔 창공과 륀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려고 왔냐?"

이젠 새롭지도 않은, 창공의 비꼬는 듯한 말투. 그러나 그것을 듣는 륀에게서 이미 반항적인 눈빛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니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방금 전 일은 죄송해요. 그, 아스터랑 싸웠던 거요..."

"아니까 다행이네."

"그래서. 저, 그러니까..."

륀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치마 끝단을 손가락으로 조몰락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창공은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차분히 기다렸다. 다만 그녀가 아직까지 완전히 창공에게 자기 몸을 내던진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버, 벌을... 주십사 하고..."

"오늘 밤에?"

"네, 주인님... 엉덩이... 때려주시는 대로 맞을게요... 주인님께 봉사하면서 용서를 빌고 싶어요..."

"마음은 참 기특한데... 륀."

"네."

다시 고개를 든 륀의 눈동자 속은 열락에 대한 기대로 차 있었다. 그것을 본 창공의 마음속엔 륀을 엉망진창으로 짓밟고 싶다는 욕망이 치올랐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때가 아니었다.

"네가 방금 말했던 대로. 선객이 있어."

"네? 선객, 이라고 하시면..."

"네 동생."

륀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멍하니 섰던 그녀는 창공에게 한 발자욱 내디디며 속사포처럼 항변을 토해냈다.

"주, 주인님...! 약속. 약속하셨잖아요... 아스터에게 희망을 주시지 않기로..."

"그러려고 했는데, 방금 아스터가 나한테 고백하더라고. 내 아이를 낳고 싶다고. 아퀴탄에 가서 약혼식을 치르자고 말이야."

"약혼식... 이요...?"

"맞아. 그래서 조금 고민했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한 결과, 결론 하나를 내렸지. 륀."

창공은 연기를 솔솔 뿜어내는 담배를 손에 쥐고 륀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주인... 님...?"

"이젠 그렇게 날 부를 필요도 없어. 애초에 이 계약이 지속되는 한 내가 아스터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 넌 그 대신 내 연인이 되어 주고. 그렇긴 한데... 넌 어차피 내 진짜 연인은 못 되잖아. 처녀도 못 주는 주제에. 안 그래?"

"아, 안 돼요..."

"그래서 그냥 그만두자고. 깔끔하게 끝내는 거야.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내가 잘못했네. 그래도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우리 사이 끝낼 수 있어서 참 대행이야, 그렇지? 난 이제 아스터랑 사귈 거고, 넌 거기에 간섭할 수 없어. ...야. 륀. 왜 울고 있냐?"

"안 돼요... 안 돼요, 주인님..."

륀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미친 듯이 젓고 있었다. 스스로도 비틀리고, 추악하고, 더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동시에 아스터에게 여자로서 이기고 싶은 마음도 자각해 버렸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창공의 말대로였다. 애초부터 그녀와 창공의 연인 사이는 거짓으로 쌓아올린 탑이었고, 언젠가는 무너질 때가 도래할 것이 확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결정할 권리는 창공에게 있었으며, 그것에 동의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분명 이날만 기다렸을 것이다. 후련하게 그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륀이 창공에게 굴복한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말이다.

아직 창공이 평생의 동반자로,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주기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를 향한 비틀린 애정을 가진 만큼이나, 그에게 당했던 일들 때문에 드는 반항심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를 이렇게 보내기는 싫었다.

해서 륀은 매달렸다. 무릎을 꿇고, 창공의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면서. 다른 사람이 이곳에 와서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윈 들지도 않았다.

"제, 제발요... 주인님... 흐윽... 제발요... 이렇게 끝내지 말아 주세요... 커흑..."

"네가 바라던 거 아니야?"

"제발... 제발..."

창공은 그런 륀을 내려다보며 지금 당장 그녀를 마구 범하고 싶다는 충동과 싸워야 했다. 아마 그렇게 하더라도 흔쾌히 수락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뭐야. 날 사랑하기라도 해? 내게 네 평생을 주고 싶어? 아스터처럼?"

"모, 모, 모... 모르겠어요..."

이것이야말로 솔직한 륀의 심정이었다. 자신의 이 사랑이 쾌락을 원하는 몸의 반응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기도 있었다. 처음은 동생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계약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오기만이 남아 있었다. 동생을 위하는 마음과, 창공에게 총애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아스터의 접근을 막아야 한다는 여자의 오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녀 자신도 모를 마음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거짓된 관계라 할지라도 창공을 이렇게 보내기는 싫다. 그것뿐이다.

"륀. 그럼 계약을 수정할까?"

"흐흑... 수정... 크흥... 이요...?"

"우선. 너는 나와 계속해서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어때? 좋지?"

"네... 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륀. 하지만 창공에겐 아직 말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아스터의 관계에 대한 제약은 시원하게 풀어버리자고."

"하,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끝내는 거고."

"아아..."

그녀는 창공의 다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짜내듯이 나오는 륀의 목소리.

"주, 주인님 마음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대신 너에게 기회를 줄게."

"기회... 요?"

"아스터는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보지를 쓸 수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순결을 지키고 싶잖아."

"그게..."

륀의 가슴속에서 슬며시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 그동안 소중히 지켜온 자신의 순결을... 창공에게 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어차피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몸이었다. 순결을 지키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일까.

게다가 어쩌면... 창공이라면 줘도 괜찮지 않으냐는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녀는 마법사였다. 순결 따위 철저하게 개인적인 가치일 뿐이고, 마법사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창공은 그녀가 자신의 앞구멍을 무기로 쓰기 전에 봉쇄해 버릴 작정이었다.

"아스터랑 똑같은 조건 하에서 경쟁해 보라고."

쌍둥이의 처녀는 한날한시에 가져갈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짜릿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륀의 처녀 개통식은 잠시 집행을 유예할 수 있었다.

"네 몸에서 보지만 쓰지 말고 날 최대한 유혹해 봐. 내가 아스터보다 네가 훨씬 낫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아... 그런..."

"어렵나? 네 여자로서의 매력이 아스터보다 딸려? 역시 그럴 것 같아?"

"...아니요."

창공의 말은 참 적절한 부분을 긁은 셈이었다. 어쩌면 지금 륀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그것. 여자로서, 언니로서 아스터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 여러 사건을 거치며 자신도 모를 정도로 팽배해 버린 그 오기를... 지금 창공이 건드린 것이다.

륀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일어서서 창공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할 수 있어요. 제가 아스터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주인님께 보여드릴게요. 아스터같이 기도만 하며 자란 애가 뭘 알겠어요. 제가 주인님을 더 잘 모실 수 있어요.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좋아... 하지만 오늘 밤은 안 돼. 오늘은 아스터의 첫날밤이니까."

"네. 단념할게요."

"그리고 우리 계약은 이제 아스터에게도 알릴 거야. 내일부턴 너희가 나를 유혹해 봐. 내 마음에 더 들게 하는 쪽이 나와 같이 밤을 보낼 거니까."

"네, 주인님."

"이리 와."

창공이 두 팔을 살며시 벌리자, 륀이 잽싸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껴안은 채 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니 만족한 듯 편안한 숨소리를 내는 륀.

'오늘 최대한 진도를 빼야겠네.'

그러거나 말거나, 창공은 속으로 아스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계획을 짜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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