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09화 (109/178)

〈 109화 〉 꿈같은 인생

* * *

"또 나타났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창공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지?"

"이젠 그만할 때도 됐는데. 죽고 나서 이러는 거 질리지도 않나?"

노인은 추락하고 있었다. 끝없는 추락은 아니다. 텅 빈 이곳은 투명하여 하늘과 땅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만져지는 뭔가가 있긴 있었다. 창공이 바닥에 앉아있는 것이 그 증거다.

떨어지는 노인의 몸이 바닥에 닿으면 한바탕 피보라가 일어나며 사지가 기묘한 각도로 뒤틀린다. 그렇게 드디어 죽었나 싶으면, 다시 저 위에서부터 추락을 반복하는 것이다.

땅에 먼저 닿는 위치는 제각각이었다. 십중팔구는 머리부터 떨어져 죽었지만 어떨 때엔 다리가 먼저 떨어져 죽기도 하고, 또 어떨 때엔 등이 먼저 바닥에 닿는다. 그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요, 다시 살아나 떨어지는 것도 매한가지다.

사흘에 한 번씩은 꾸는 꿈이었다. 보통 깨어나면 편린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의 바다 밑으로 영원히 가라앉는 것이 꿈이고 그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나 계속해서 같은 꿈에 노출된다면 어느 순간 꿈속에서 그것을 인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꿈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해서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상상하는 것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추락하는 노인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노인은 그가 처음으로 살해한 대상이었다. 이젠 일행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린 그 사람. 노인을 죽인 것은 옳은 판단이었는가? 그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 살아있었으니.

그렇다면 창공은 도대체 무슨 미망이 있어 자꾸만 이 노인의 꿈을 꾸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무한한 노인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

창공이 히죽거렸다.

"나는 한 번밖에 안 밀었는데 추락은 여러 번이라니."

때로는 이렇게 노인을 조롱하기도 하면서. 기실 그가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런 것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성할 생각도 없는 건가?"

떨어지던 노인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외쳤지만, 곧 추락하여 피곤죽이 된다. 아니, 옳지 않다. 곧 저 위에서부터 추락을 시작하였으니.

"반성하면 댁이 살아 돌아오나?"

"그렇다면 반성할 건가?"

"아니. 난 반성할 일은 안 해."

순간, 뒤에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요즘 그가 꾸는 꿈에서 달라진 점이었다. 일행들이 등장하여 한 마디씩 건네는 게. 처음에는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아 나름의 재미도 있었지만, 이젠 이것도 질린 참이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반성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오빠는 어떤 일이든 반성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대체로 비판이라는 건 비판당하는 쪽보다 비판하는 쪽을 더 잘 반영한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창공은 그들에게 대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똑같은 광경에 상당히 지루했으므로.

"고해성사... 하신다면 받아드릴게요. 위로해드릴게요."

이번에는 아스터였다.

"미쳤냐?"

이것이 노인 살해에 대한 창공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는 무죄였고, 영원히 무죄일 테니까. 그 자신밖에 모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할 이유가 없다.

"네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어."

"너희가 날 불편하게 만들고 있어."

그렇게 나유의 대답도 흘려보내자, 노인의 목소리가 이 공간에 쩌렁쩌렁 울린다.

"너를 죽이겠다! 반드시 죽이겠다!"

창공은 미소 지었다. 이러고 나면 꿈에서 깨는 것이다. 그가 죽였던 자의 죽이겠다는 협박은 잠에서 깨는 알람 소리일 뿐이었다. 조금 성가시고 짜증 나는 그런 소리.

* * *

"..."

그는 눈을 떴다. 방 안은 검푸르다. 요새 그가 일어나곤 하는 시각이었다.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 한 번 섹스를 하면 사정을 몇 번은 하는지라 피곤할 법도 한데 눈이 떠지는 건 새벽이니 참 이상했다.

'같잖은 꿈을 꾸는데 오래 자는 것도 이상하지.'

그러고 보니 마음 놓고 내내 숙면을 취한 게 도대체 언제 적 일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흘에 한 번은 방금과 같은 꿈을 꾸지만, 나머지 이틀조차 대개는 알 수 없는 기상을 겪는 것이다. 어떨 때는 불쾌하고 어떨 때는 상쾌했지만 대부분 불쾌한 감상만 남는다.

순간 그의 코로 포근하고 달큼한, 몽환적인 냄새가 확 들어온다. 그의 팔을 끌어안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스터의 머리칼에서 나는 향기였다. 왼팔 전체에서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한 알몸이 느껴진다.

어젯밤 아스터는 완전히 녹아내렸다. 열을 가한 팬에 떨어진 버터만큼이나 빠르게. 하지만 몇 번이나 사정당하고 다시 그 몇 배로 절정 하는 순간까지도 신음을 자제했더랬다. 외유내강이긴 하지만 이것도 외유내강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거렸다.

불쾌한 꿈 때문에 일어났지만 아스터의 체향 덕분에 곧 불쾌함을 털어낼 수 있었다. 이대로 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매력적인 사향 냄새를 맡으며 잔다면 적어도 두세 시간의 깊은 수면은 보장되니까.

만약에 쌍둥이를 양옆에 끌어안고 잠든다면 꿈 없는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까. 창공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아스터의 품에서 팔을 빼내었다. 그녀가 잠깐 미간을 찡그리지만, 이내 숨소리를 내며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치이이...

그는 창가에 앉아 담배를 물고 성냥불을 켰다. 연기를 쭉 빨아들이자 머리가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 났다.

'좆같이 멍하네.'

쌍둥이 자매를 입맛대로 조교하고, 나유와 아린에게 봉사를 받는... 꿈같은 삶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어딘가에서부터 불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이 불만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분명 모든 일은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륀은 아슬아슬하긴 해도 함락 직전이고, 아스터는 이미 그의 부탁이라면 순결의 포기를 빼고는ㅡ그나마도 밀어붙이면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ㅡ뭐든지 다 들어줄 것이다.

나유는 처음부터 그랬고. 아린은...

'걔는 됐고.'

일정도 순탄했다. 알펜시아에 비해 공도의 치안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강도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자매와의 대련에서 밀리기만 하던 나유와 어택도 이제는 나름 상대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성장했다.

아린의 연주는 최근 뭐가 문제인지 예전과 같은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련히 잘 할 것이다. 히사시는 마력을 뽑아내지 못해 시무룩해 했지만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해 호평을 듣고 있다.

그런데 정작 창공은... 그냥 그랬다. 원인은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온 것이었다.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20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고 느껴졌다.

이것은... 영화와도 같았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끝나 있는. 다만 그가 보는 영화는 끝나지 않는 영화였다. 자신이 겪는 일도 스크린에 비친 광경을 보는 듯한 비현실감이 느껴지고, 그저 멍했다.

침대 위에서 여자들을 깔아뭉갤 때엔 정복감과 쾌락이 느껴졌지만 그저 그뿐. 성의 쾌락이 일시적인 쾌락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지금처럼 크게 다가온 적은 창공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삶의 농도 문제다. 길을 건너고 있는데 달려오던 차가 눈앞에서 멈추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때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

그때가 삶을 제일 진하게 느낄 때다. 혹자는 이것을 번지점프를 하며 느끼고, 혹자는 도박에서 승부수를 띄울 때에 느낀다. 또 누군가는 여자의 안에 질펀하게 싸지르며 느끼기도 한다.

살아있다는 실감. 삶의 농도. 창공은 그런 것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조금 곤란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남의 몸을 조종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면.

사실 지구로 돌아간다 한들 변하는 게 뭐가 있을까. 로스쿨에 들어가서, 검사로 임용된 다음 연차가 쌓이면 판사로 임관한다.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특기였으니까.

은퇴한 다음의 인생 계획?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것을 생각하다 보면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다지 변하는 것은 없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린이 했던 말에 뼈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희미한 목숨을 가지고 있다 해서 자살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죽게 된다면 그가 결정할 일이지, 누군가가 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 노역장에서도 탈출한 게 아니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때의 삶의 농도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도 같았다.

"...!"

담배를 피우던 창공은 기침을 했다. 요새 담배를 피울 때면 잔기침이 조금 나왔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피우다가 보면 기침이 나올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폐가 조여들고, 목구멍에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한동안 창공을 괴롭히던 기침은 결국엔 멎었다. 한데... 입을 가리고 있던 손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질적인 데가 있다.

창문 너머의 빛으로 살펴보려 하기엔 아직은 어두웠다. 해서 창공은 재떨이 위에 꽁초를 올려 두고 욕실로 가서 등불을 켰다.

"...젠장."

손바닥엔 우울하고 질척이는 핏방울이 가득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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