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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10화 (110/178)

〈 110화 〉 꿈같은 인생 (2)

* * *

쏴아아...

손 씻은 물을 흘려보내며, 창공은 머리를 비우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일단 기침을 하다 피를 토했다 해서 전부 죽을 병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지금 건강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이미 썩어들어갔던가.'

그는 자신의 몸 상태마저 차가운 비웃음거리로 삼아 조롱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떠올랐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고, 무표정으로 욕실을 나선 창공은 다시 창가에 앉아 머리를 식힌다.

"으으..."

담뱃갑을 손에 쥐고 다시 담배를 물까 고민하는데, 침대 쪽에서 아스터가 작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공... 창공 니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침대 이곳저곳을 짚는 아스터. 잠결에도 그가 없어진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것이 기상의 단초가 되었는지, 그녀는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희미한 새벽빛 사이에서 그녀의 나신이 하얗게 빛난다.

"어... 일어나셨군요..."

아침 인사가 끝나고 느껴지는 한기에 제 어깨에 손을 댄 아스터는 곧 자신의 가슴이 창공에게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어차피 서로 볼 건 다 본 사이였다. 오히려 그녀로서는 보아준다면 기쁜 게 솔직한 심정.

부끄러움을 반으로 줄여 주는 마력의 밤은 이미 지나갔지만 아스터는 창공의 앞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보였다. 그것이 지금 창공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라 해도.

"아스터.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별 건 아니고 확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묻는 거야. 네 그 치료 말이지. 외상의 응급처치 정도에만 국한된다 했었나?"

"맞아요. 아, 손가락이 잘린 정도라면 붙일 수도 있고요. 다만 그 이상으로는 제가 부족해서..."

"병은 안 되는 거야?"

"병이라 하시면."

"감기부터 시작해서... 폐렴이나 암 등등."

"그런 것은 아무래도... 네. 고명하신 사제분들이 기도와 축복으로 중병을 고치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것은 기적의 영역이랍니다. 저희 사제들이 치료는 기본적으로 외상에만 국한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닌데도, 창공은 해맑게 말하는 아스터의 모습에서 어딘가 우스움을 느꼈다. 혹은 자신의 처지에서.

"그럼 역시 병을 고치려면 병원인가? 마법사들은?"

"죄송해요. 마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요..."

"알았어."

그는 그렇게 별일이 아니라는 듯 대화를 일축하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금발의 여인은 그의 품에 쏙 들어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창공은 조금만 더 잘 생각이었다. 아스터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잠깐만이라도 근심 없이.

* * *

"창공아."

"..."

"야. 창공아."

"...어, 택이 형."

"너 아침부터 이상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멍하니 섰던 창공은 어택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그리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기절했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빈 상태였던 까닭이다.

"괜찮냐?"

한편 어택은 처음 보는 창공의 모습에 미세한 불안감을 느꼈다. 창공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니 이럴 때가 있겠지만, 동시에 그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가 존재했다.

한데 다 함께 모여 아침식사를 할 때부터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었다. 스푼을 손에 들고 멍하니 그릇을 쳐다본다거나, 흐느적거리는 것에 가까운 몸짓이라거나.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별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투로 이야기를 한다. 그때만큼은 모두가 알던 평소의 창공이었지만 입이 닫히면 곧바로 전의 행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다니까."

창공은 눈을 감고 담배를 한 번 깊게 빨아들였다.

'너무 멍청하게 있었어.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면 곤란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틈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그의 원칙 중 하나가 아니던가. 다시 한번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창공은 다시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어택을 바라봤다.

"근데 왜요."

"...새꺄, 밤에 적당히 좀 해라. 뼈 삭는다."

"하."

헛웃음을 짓는 창공.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제해야겠네. 그런데 그게 끝?"

"아니."

어택은 잠시 주변을 살피며 둘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창공을 마주했다.

"요새 일행들 분위기 조금 그런 거 알고 있지?"

"아, 그렇죠. 뭐."

인화 중시형 인간 어택으로서는 신경 쓰지 않으려야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형이 말하는데... 네가 여자들 몇이랑 사귀든 상관은 없어.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그런데 그거 때문에 일행들 사이에 분란이 생기면 모두한테 안 좋아. 너한테도 마찬가지야."

창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이 그를 두고 다투는 것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표면화가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연적이네 어쩌네 하다가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서로를 의지하며 헤쳐나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안 될 정도로 문제가 악화된다면 이건 분명한 창공의 실책이다.

"근데 하... 그걸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 너도 알겠지만."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하죠."

"...고맙다."

어택은 창공의 어깨를 한 번 치고선 그와 나란히 서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그는 이래서 어택이 좋았다. 헛소리는 최대한 자제하고 하고 싶은 말만 딱 하니까.

쌍둥이는 그나마 통제가 쉬운 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창공 말은 기가 막히게 듣는 둘이니까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싸우지 말라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거기에 섹스를 인질로 곁들이면 완벽하다.

문제는 여기에 나유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유가 이번처럼 자기주도적으로 행동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 덕분에 아스터가 스스로 애널을 준비해서 왔으니 좋게 풀린 셈이었지만 만약에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면?

또 다른 위험 요소로는 아린이 있다. 돌이켜 보면 최근 아린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지 않던가.

"형. 물어볼 거 있는데."

"어. 뭐?"

"아린이 있잖아요. 요새 좀 그래 보이던데."

"그렇지?"

"무슨 일인지 알아요?"

"네가 모르면 나도 모르지. 난 너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애미."

뭔가 있긴 있었다. 있긴 있는데, 본인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창공은 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써서 그렇지 머리 자체는 좋으니까...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자기가 알아서 나서겠지.'

그는 아린에 대한 생각은 담배 연기와 함께 내뿜었다.

"고다는?"

"히사시? 아 씨, 내가 옆에서 케어하고 있으니까 걔는 걱정하지 말고."

"뭐 고문관이에요?"

"고문관은 새끼야... 착해서 그렇지 고문관은 아니야. 자기 할 일은 똑바로 하잖아. 그 뭐야. 네가 자꾸 툭툭 쏘아붙이니까 쫄잖아."

"그럼 내가 빨아주기라도 할까?"

창공의 말에 킥킥대던 어택은 곧 꽁초를 땅바닥에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택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창공은 입에서 담배를 빼내고 손으로 입을 막는다.

"...!"

연거푸 나오는 기침. 억누르고 있던 기침은 한 번 터져 나오자 쉽사리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기침이 멎자,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창공은 여관 벽에 거칠게 손을 비벼 닦았다.

* * *

"대도시라."

륀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지도를 살폈다. 이 길을 따라서 가면 대도시가 나오냐는 창공의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당신이 왜 그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어."

"얼마나 걸리지?"

"좋은 소식. 사실 바로 다음에 우리가 들르게 될 곳이 바로 그곳이야. 아렌체. 토스카치오 공작령에서 가장 큰 도시. ...라고 적혀 있네."

그 말을 끝으로 륀은 지도를 고이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아, 하나 더.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마법사들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에 관심이 있나?"

"병이라."

그녀가 가슴을 받치듯이 팔짱을 끼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우린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데엔 별 관심이 없거든."

"왜. 세상의 진리와는 분야가 겹치지 않아서?"

"어쩐지 비꼬는 것 같이 들리지만... 사실이 그렇지. 실은 마법사들이 사람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없는 건 아니야. 오히려 지대하다고나 할까. 오염된 물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걸 알아낸 게 우리 마법사들이거든. 정확히는 마법생물학 쪽에서."

륀의 말에 지구에서 넘어온 일행들은 살짝 맥이 빠지는 표정이 된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히사시가 총대를 멨다.

"저... 륀 상? 그건 그냥 경험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네. 다만 오염된 물과 질병에 대한 상관관계를 조사하는 실험 같은 경우에 있어서 완전히 변인을 통제할 수 없잖아.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이 생겼다 해서 그게 진짜 원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거지."

"아하..."

"다시 말하지만 그걸 확실하게 증명한 건 우리 마법사들이고, 그 밖에 여러 분야에서 마법 이외의 학문에도 기여를 하고 있어. 그러니까 각국의 왕실에서 마법 교수들을 자문 위원으로 앉히는 거고. 내가 몽펠리도 대학의 산술학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고 이야기했던가?"

"하셨죠."

"그런 식이지. 실력 있는 마법사들은 일반 대학교수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곤 해. 직접 가서 수업을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만."

"륀 상은요? 가서 수업해 보셨나요?"

"아니. 산술학 논문이나 몇 편 써서 보내 줬지. 난 언어학이 더 좋지만... 그쪽에서 내 진정한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 아, 당신들은 어때? 학교에서 산술학도 가르친다 했던가?"

"그랬죠. 저는 포기했지만."

"산술학을? 왜?"

히사시를 포함한 몇몇 일행들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그... 어렵잖습니까."

"그게?"

륀의 목소리에는 딱히 놀린다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그걸 왜 어려워하느냐는 느낌. 그저 그뿐.

"남 상은요?"

"나 수포자임."

"앞으로 친하게 지내죠."

"이제 와서? 갑자기?"

일천한 수학 실력을 자랑스레 떠드는 두 남녀의 모습에 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아린이 살짝 웃음을 짓는다.

"어쭈. 언니가 수포자라 우습냐? 야. 너는 얼마나 잘했는데?"

"저는."

"아니다. 아니다. 말하지 마. 서울대가 뻔하지 뭐."

"오빠. 오빠는 수학 잘했어요?"

"그걸 못할 수가 있냐?"

그렇게 서로 간에 수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려던 차,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아스터?"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이 열리고, 마차를 몰던 어택이 고개를 들이민다.

"잠깐 나와봐야 할 것 같은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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