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11화 (111/178)

〈 111화 〉 꿈같은 인생 (3)

* * *

"무슨 일이시죠...? 아!"

문을 열고 마차 바깥으로 나갔던 아스터가 탄성을 냈다. 놀라기도 했지만, 어딘가 반가운 느낌도 있다. 일단 적은 아닌 것 같았지만 누가 앞길을 막은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던지라 바람도 쐴 겸 다른 일행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마차를 가로막은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그들은 처음에 보기에는 번쩍이는 갑옷을 전신에 두른 것처럼 보였는데, 잘 보면 갑옷 밑에 하얀 천으로 된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아스터의 사제복과 닮아 있는 느낌이랄까.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덧대어 입고 있는 갑옷의 가슴팍에는 교단의 상징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목 부분의 칼라 또한 사제복 특유의 칼라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나머지 부분들은 도무지 사제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상당한 중무장을 한 탓이다. 지구의 중세 시대와 닮아 있는 다이셀리시아의 특성상 길을 가는 여행자들치고 무기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사랑과 자비를 전파하는 사제인 아스터도 허리춤에 날카로운 검을 차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이자들의 무장은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가슴과 허벅지에는 단검이 든 가죽 홀스터가 여러 개요, 손에 든 무기들은 창, 도끼, 대검 등등 하나로 통일되어 있진 않았으나 크기가 거대하다는 점은 똑같았다.

도무지 호신용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사제보다는 차라리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기사들이라고 하면 딱 맞는 표현일까. 표정들도 하나같이 굳어있는 것이 처음에 보고 이들이 종교인이라는 인상은 받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나마 어택이 보고 아스터를 나오라고 한 까닭은 역시 저 커다란 교단의 상징 때문이리라. 여러 개의 동심원. 이들의 날카로운 기세와 흉맹한 인상을 간신히 중화시키고 있는 문양이다. 적어도, 교단과 관계가 있으며 도적 떼는 아닐 거라는 그런 느낌을 주는.

"이단심문성 형제자매 분들이시군요!"

아스터는 그런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던 몇몇 일행들은 그녀의 반응으로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사제였던 것이다. 외관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단심문성..."

륀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꺼림칙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다. 원체 교단과 마법사들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알아?"

창공이 다가가 속삭이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륀.

"이단심문성. 교단의 검. 강경파 또라이들만 모인 집단으로 유명해. 이단이라고 규정된 자들에 대해 자비 없이 칼날을 내리친다고 하지."

"우리들... 에트로지들은 어떻게 보는데?"

"저들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 단지 상대방이 교단에 항거하는 이단인가, 아닌가만 판단하니까. 나 같은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들인데... 요새 키르케에서 사교도들이 준동하고 있다 하니 항상 피해 갈 수는 없겠지."

결국 륀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이단과 관련이 없다면 딱히 접점이야 없겠지만, 어쨌든 서로 얼굴을 맞대기는 꺼림칙해지는 자들.

"난 저들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안으로 들어가 있을게."

륀은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마주치기 싫은 사람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터에겐 자신의 동료들이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리라.

"이단심문성 소속 사제 카를로 마치니라고 합니다. 자매님께선 소속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들의 대표처럼 보이는 사제 하나가 앞으로 나와 아스터에게 말을 건다.

"복음화성 소속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입니다."

"그렇군요... 실례지만 어디로 가시는 중이신지? 그리고 저들은 누구입니까?"

"다른 세상에서 찾아오신 분들이랍니다. 저분들의 신분은 저와 알펜시아의 국왕께서 보증하고 있죠."

"알펜시아의 국왕이 에트로지의 신분을 보증하다니... 혹시 기사로 서임됐다던?"

"맞아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창공 일행은 꽤나 화젯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다만 마치니 사제는 그 이상으로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한 번 얼굴을 둘러보더니 바로 아스터에게 고개를 돌린다.

"저희는 이스트리로 가는 중이랍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마치니 형제님?"

"아닙니다. 요사이 키르케의 곳곳에서 사교도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죠. 오, 그분께서 불쌍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저희 이단심문성에서 사교도들을 주님의 곁으로 보낼 것이니, 그 끝에 자비가 기다리고 있을지 진노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오직 그분께서만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둘의 대화는 복음화성과 이담심문성 간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만 같이 들렸다.

"저희들은 현재 루키니 심문관님의 지휘 아래 키르케에서 사교도들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금처럼 길을 지나다니는 여행자들에 대한 검문검색도 포함되어 있지요. 하지만 퐁파두르 자매님께서 곁에 계신다면 저희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치니 형제님."

아스터가 마치니 사제에게 감사를 표하려는데, 뒤에서 듣고 있던 한 사제가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하지만 일단은 마차 안을 수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의 말도 옳지만 퐁파두르 자매님께서 저들의 신분을 보증하시는데 우리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에 루키니 심문관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내가 수색 지시를 내린다면 퐁파두르 자매님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루키니 심문관께서도 문제가 커지는 것을 바라시진 않을 터. 추후에 금번의 일로 우리가 문책을 받게 된다면 그분께는 내가 잘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퐁파두르 자매님. 이번 일은 자매님께 어떠한 의도가 있어 나선 것이 아니니,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사제는 아스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아스터는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답니다. 오히려 이단심문성 소속 형제자매님들의 이런 투철함 덕분에 신실한 신자들이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녀와 마치니 사제는 이쯤에서 서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앞으로 평안한 여행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혹여 다른 심문성 소속 형제들과 마주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지금 한창 민감한 시기이니 말입니다."

"어서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도 평안이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만나도록 해요."

이단심문성 사제들은 대오를 정돈하여 마차를 지나쳐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창공 일행에겐 당황스러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우연한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었고,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스터. 너 은근히 높은 사제인가 봐?"

"제가요? 전 그저 미천한 평사체일뿐인데..."

나유는 어딘가 신난 기색으로 아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저 마치니라는 사제가 마차 수색을 반대하면서 네 체면을 손상시켜서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 봐. 이거이거... 알고 보니 대단하신 분 아니야?"

"정치 싸움이지."

아스터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한구석에 앉아 있던 륀이 어딘가 음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치 싸움?"

"이단심문성은 강경파 사제들의 집단이야. 내가 알기로 그들은 신앙교리성에서 독립하여 나온 조직인데, 그것 때문인지 교황청의 다른 성과 알력 다툼이 심해. 아마 자신들의 불안정한 입지를 확실히 세우려는 거겠지."

"언니. 그건 외부인이 함부로..."

"외부인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아스터. 네가 보기엔 교단이 완전무결할지 몰라도,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아스터가 재빨리 그런 륀에게 반박하려 했지만 창공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계속 말해 봐."

"그리고 그런 그들이 가장 많이 충돌하는 집단이 바로 복음화성이지. 복음화성은... 뭐랄까. 가장 강경하지 못한 사제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해 두자. 그렇기 때문에 이단심문성과 가장 많이 대립한다고 하더군.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너 말로는 교단과 마탑이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은근히 알 건 다 안다?"

"서로 신경을 쓰건 안 쓰건 결국 두 집단은 거대한 세력이야. 교수 정도 되면 상대 집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어. 특히나 이단심문성에서는 우리 마법사들에게 적대적으로 나오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일리가 있네."

"따라서 마치니? 난 마차 안에 있느라 못 들었지만 그 사제가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 이번 일로 인해 또 다른 충돌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겠지. 아마도 그 마치니라는 사제는 이단심문성 중에서도 온건한 쪽일 거야. 즉,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만약에 마차를 수색했다면?"

"칼부림... 까지는 안 가겠고. 그래봤자 감히 건드리지는 못하고 서로 악담이나 몇 마디 주고받는 정도였겠지. 난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정교수니까. 날 건드린다는 건 우리 웨리를 공식적으로 적대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어. 아무리 광신도라 해도 쉽게는 못 할 일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아스터가 한숨을 내쉰다.

"너무 그러지 마. 이단심문성 형제자매님들도 우리 교단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히 그들의 존재는 어떤 사실을 증명하고 있거든. 교단 스스로가 말하는 사랑과 자비만으로는 그들 자신조차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언니!"

"뭐... 그들이 교단 전체를 대표한다고는 안 해. 하지만 아스터. 기억해 둬. 교단도 결국에는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야. 절대 완벽할 수 없고, 여느 집단처럼 정치 싸움도 일어나곤 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아린이 분위기도 식힐 겸 끼어들었다.

"마법사분들은 어떤가요? 역시 그곳도?"

"하! 진리를 탐구한다는 인간들이 누가 무슨 첨탑을 쓰는지를 가지고 싸우는 곳인데 뭐. 물론 제대로 된 마법사들도 많아. 다만 뭐... 사람들 사는 곳이면 다 똑같다는 거야, 다시 말해, 집단의 목적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는 관계가 없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단심문관에, 사교도라니... 앞으로 안 마주쳤으면 좋겠는데요. 얽히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 같아요."

"네 말이 맞아. 하아..."

마차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고, 륀은 파이프를 꺼내 연초를 꾹꾹 눌러 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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