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12화 (112/178)

〈 112화 〉 꿈같은 인생 (4)

* * *

아렌체는 이 근방의 최대 도시라는 지도의 소개에 걸맞은 대도시였다. 룬덴만큼이나 시끌벅적하다 생각했던 튜리보다 더 붐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간색 지붕과 하얀색 벽돌로 된 집들은 다홍색으로 물든 저녁놀 아래에서 낭만적으로 빛난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도착하면 자고, 다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일정은 창공 일행을 다분히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풍경이었다.

"우와... 딱 그거네요. 이탈리아 느낌."

창밖을 바라보던 아린이 감탄하며 중얼거린다.

"이탈리아 가 봤어?"

"아뇨. 사진으로는 많이 봤죠. 언니는요? 돈 많았잖아요."

"그 돈으로 치킨이나 사 먹었지 해외는 안 나가봐서. 으... 지금 생각하니 아까워 죽겠네. 택이 오빠는? 해외 나가 봤어?"

"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입대했는데 해외는 무슨 해외."

"끔찍하네, 진짜. 왜 우리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감성이 메마른 걸까?"

나유의 한탄에 히사시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 되어 나선다.

"남 상. 저는 나름 감성 있는 사람인데요..."

"어어? 창공이도 가만히 있는데 혼자서만 살겠다고 빠지는 거 봐라. 이게 도쿄식 감성?"

창공은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건 말건 우수 어린 표정으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마른 감성에 젖어 아렌체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피까지 토하는데 별일이 아닐 가능성은 낮겠지.'

갑자기 찾아온 병. 그는 이 병에 대해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령 당장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별 아쉬움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좋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는 것일까?

"창공아."

"...왜."

나유는 창공의 속마음과는 달리 어딘가 신나는 데가 있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밤에 술이나 한 잔? 갑자기 땡기는데. 여기서 와인 마시면 분위기 죽일 것 같지 않아?"

"와인 마실 줄은 알고?"

"그야."

"그리고 오늘 밤은 조금 그래. 혼자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어서."

제의를 일축하는 그의 대답에 나유가 시무룩한 얼굴이 된다.

"하루 종일 뭐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또 생각? 그러다 잠 안 온다."

"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야."

말없이 창공을 바라보던 륀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오늘 창공과 동침하는 것은 틀렸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만 아스터와도 잠자리를 가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거리가 되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를 것은 없었다. 적당한 여관을 잡고, 방을 배분한다. 그 후에 어지간하면 저녁 식사는 다 같이. 하지만 창공은 그대로 여관을 나와 버렸다. 어중간하고 우울한 데가 있는 지금 이 기분에 식사 후의 나른함은 약간의 위안이 되겠지만, 그것마저 느끼고 싶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준비하듯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창공은 스스로가 이렇게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은근히 겁을 먹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해서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날카로워진 것인가?

그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병원이 어디냐고 물은 다음 그쪽으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성냥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면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한다. 그것이 두려운 것일까.

'돌겠네.'

담배를 잘근잘근 씹어대던 창공은 그것을 다시 갑 안에 집어넣었다. 왠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두려움에 지는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지만, 그럼에도 꺼려지는 것은 할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기분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행인이 알려 준 병원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병원이었다. 이쪽 세상에서 병원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한 의사가 여러 진료 과목을 보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1인 종합 병원인데, 아직까지 다이셀리시아의 의학의 지구만큼 발달하지 않아 과의 분화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납계 직원이 그를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선생님을 좀 뵈려고 합니다만..."

"네.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접수원이 가리킨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기다리던 창공은 신호에 맞추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침착하고 포근한 인상만 보면 의사로서 신뢰감을 줄 법도 했지만, 창공에겐 별 감상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큰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고 살다 약초와 물수건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이쪽 세상에 오면 당연히 의학 수준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오, 에트로지? 좋은 저녁입니다. 앞에 앉으세요."

의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창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자세 면에서는 확실히 의사라고 불릴 법했다. 자연스레 환자를 안정시키는 느낌이다.

"젊으신 분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를 찾아오셨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요새 담배를 태우면 기침이 납니다. 심하게."

"기침이라. 심하게? 흡연 경력은 얼마나?"

"2년 조금 안 됩니다."

"2년 조금 안 되게... 그럼 그동안 흡연 중에 기침은 꾸준히 나왔던 건가요?"

"요새 갑자기 나오더군요. 한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오늘 아침에 기침을 하다가 피가 나와서 말입니다."

"음..."

의사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보면 목에 상처가 나서 피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기침도 나오지 않나요?"

"간간이 나오긴 하는데 심한 수준은 아닙니다."

"일단 한 번 진찰을 해 봅시다."

창공은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냈다. 그의 혀를 누르고 있는 것은 구리 막대기였다. 그것이 나름의 항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일까. 사람 몸, 특히 점막에 닿기에 좋은 금속은 아니지만 그는 그러려니 했다.

마법이나 등불이 아니고서야 어두운 곳을 비출 수단이 없는 세상인데 어떻게 목구멍 안쪽을 볼까, 싶었는데 다 방법이 있었다. 자그마한 거울 조각을 손에 들고 빛을 반사시켰던 것이다. 하기야 이 세상에는 이 세상만의 방법이 있는 법이다.

"음... 이상하군. 딱히 상처는 보이지 않는데."

진찰이 끝났지만 결과는 의사가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청진을 한 번 해 보죠. 미안하지만 상의를 완전히 벗어 줄 수 있겠나요?"

"그러죠."

청진이지만, 청진기는 없다. 그래서 상당히 모양이 우습게 되었는데... 의사가 창공의 등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살짝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창공은 성실히 심호흡을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음. 네. 다시 입어도 좋아요."

"상태가 어떻습니까?"

의사는 창공에 말에 대답하는 대신 하얀 천을 건네며 한 가지 진료를 더 해 볼 것을 요구했다.

"입에 갖다 대고 계세요. 지금부터 등을 두드릴 텐데, 기침이 나올 수도 있어요. 꽤나 세게 두드리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네, 네."

세다고는 해도 은근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창공은 예상외의 충격에 등에 힘을 주었다. 한데 힘을 주는 순간, 갑자기 저 밑에서부터 뭔가가 세차게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입안에서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한껏 느껴진다. 이윽고 입에서 떨어진 천에는 검고 탁한 핏방울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런..."

"심각한 겁니까?"

"으음."

천을 건네받고 잠시 고민하는 의사. 아무래도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하는 것이 가벼이 생각할 질환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최근에, 아니면 예전에 탄광이라거나 혹은 비슷한 환경에서 일했던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렌체 근처에는 유서 깊은 청금석 탄광이 있어요. 난 그곳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환자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죠..."

"그렇게 오래 일한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한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말입니다."

"폐병이라는 게 그래요. 강철같이 튼튼하던 장정이 일주일도 못 가서 기침을 달고 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여리여리한 아낙이 수 년을 넘게 아무 탈이 없기도 하죠."

"결국 폐병입니까?"

창공의 얼굴이 점점 굳는다.

"그렇... 다고 말할 수 있죠."

"고칠 수 있는 겁니까? 담배를 끊을까요?"

"그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안하지만... 소리라던가, 타진의 결과로 봤을 때 병은 이미 상당히 진행됐어요. 이건... 이미..."

"어딜 가면 고칠 수 있습니까?"

"미안합니다..."

힘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의사. 창공은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을 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작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돌조각이나 광물의 조각이 폐 안에 쌓이고 쌓여서 폐를 안쪽에서 찢어놓는 거예요... 현대 의학으로 이 병을 고칠 방법은..."

"사제의 치유라던가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희망을 걸고 물었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 창공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꽉 쥔 주먹을 미세하게 떨었다.

"오늘부터 담배는 끊어야 해요. 그리고 공기 좋고... 가급적이면 따뜻한 곳으로 가서 좋은 음식을 먹고 체력을 키워야... 하고요.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요. 일단 진행을 최대한 느리게..."

"선생님은 다른 환자들에게도 같은 진단을 하셨겠죠. 진단을 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던가요? 결과는 어땠죠?"

"...미안합니다."

진폐증이다. 하지만 진폐증에 걸린 광부들 중 저 말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창공도 저 말을 따를 수 있기나 할까. 아니, 따를 생각도 없다.

"상당히 진행됐다고 하셨죠. 더 진행되면 죽기라도 합니까?"

"그것이."

대답을 망설이는 의사,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창공. 겉에서 보기에는 둘의 입장이 기묘하게 뒤틀린 것 같이 보였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죠."

"어느 날 갑자기 죽지는 않을 거예요... 서서히 폐 기능이 약해지기 시작할 거고, 아무리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게 되겠죠... 피도 자주 토하게 될 거고요. 절대, 절대 담배는 안 돼요. 무리해서도..."

"진료비는 얼마입니까?"

"그냥 가셔도 좋아요...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창공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병원을 나섰다. 서쪽으로 향하는 태양은 자신의 뒷모습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드디어 불을 붙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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