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13화 (113/178)

〈 113화 〉 꿈같은 인생 (5)

* * *

창공은 어쩐지 꺼려지던 담배를 그제서야 마음껏 피울 수 있었다. 병의 악화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고 단지 늦으냐 빠르냐의 차이일 뿐이라면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창공에겐 그랬다.

그가 이토록 죽음을 가까이 느꼈던 적이 언제였던가. 탄광에서 탈출하고 늑대 무리와 마주쳤을 때라거나 알펜시아 산맥에서 기사들에게 쫓겼을 때도 죽을 수 있다 생각했지만, 어쩐지 죽음에 대한 실감을 느끼는 것은 지금이 제일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차라리 잠에 들듯이 쉽고 빠르게 죽는다면 또 모르되, 어떻게 죽게 될지 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기침도 잦아지고, 그만큼 피를 토할 것이다. 폐 기능은 점점 약화되어 한 번의 호흡으로 되었던 것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될 것이다. 결국에는 질식사. 말하자면 지금 창공의 목에는 보이지 않는 밧줄이 아주 천천히 조여들고 있는 셈이다.

'인생 참 웃기는군.'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다섯 일행 중 그 자신만 폐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참 부조리하고 불운하다는 생각이 들 법한 일이었지만, 창공은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억울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원래 세상이라는 건 그렇게 돌아간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서울의 검사 부부 밑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그 생득적인 권리를 얻는 데에 그가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다.

당장에 그가 100km만 더 북쪽에서 태어났더라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나 만약 그렇다고 한들 그의 어떠한 잘못으로 그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그리고 창공은 폐병을 얻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 이런 사실이 특별히 억울하다거나 분통이 터지지는 않았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마음 편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다.

요사이 꿈자리가 사나웠고 자신을 죽이겠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던 노인의 목소리도 생각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공은 자신의 살인에 대해서 딱히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반성하는 마음 따위는 일정 생기지 않았다.

아린이나 아스터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인과응보라 같은 소리를 했겠지만... 앞서 말했듯 창공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지구에 돌아가서 폐 이식을 받는다면 나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지구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제서야 첫 번째 발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전설에 의지해서 비타로 가는 중이지만, 문제는 대게 그렇게 쉽고 빠르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창공은 잘 알고 있다.

결국 그의 생각에 자신은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폐병으로 죽을 운명이었다. 비참한 현실에 미련 따위는 없다. 참 우스운 노릇이다. 그 고생을 하면서 탄광을 탈출하고, 남대륙을 가로질러 알펜시아로 이동하고, 산맥을 헤매다 연주회를 열었다니.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었나 싶기도 하고... 마음은 후련한 동시에 복잡했다. 아니, 꽤나 괜찮은 소득도 있었다. 네 여인을 그의 손아귀에 두었으니까. 그것만큼은 꽤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그녀들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죽은 다음까지 데려가지 못한다는 건 참 아쉬운 노릇이지만 어느 남자가 이토록 호화스러운 관계를 맺었을까.

또 죽기 전에 쌍둥이의 처녀 정도는 충분히 취할 수 있으리라. 다만 이제 창공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처녀 따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이 아니라 해도 의욕이 나질 않았다. 물론 성욕이야 쌓이기 마련이니 가끔씩 여자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욕망을 토해낼 수야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식상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몸이 상당히 달아있을 터. 그에게 가혹한 체벌을 받고 매도당하며 알몸 산책을 하고 싶어 하리라.

문제라면... 그마저도 귀찮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녀를 무릎 꿇린 채 얼굴에다가 오줌이라도 싸면 그나마 괜찮은 자극이 될지 고심하던 창공은 다시 차오르는 기침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

륀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창공의 부름에 기대를 한가득 품고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서 관장은 하지 않았다. 그의 손으로 직접 하고 싶어 할 수도 있었으니까.

'엉덩이... 세게 때려달라고 해야지...'

이제 그녀는 스스로의 피학적인 성벽을 인정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이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내려칠 때에 자궁까지 충격이 전달되는 것이 좋았다. 그때 아랫배 안쪽이 떨리는 감각은 새로운 마법 현상을 발견할 때만큼이나 황홀하기 짜릿했다.

간접적으로 자궁을 얻어맞기만 해도 그런데 직접 찔린다면 어떻게 될까. 륀은 이미 버린 몸, 창공에게 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가 아직 자신의 처녀를 받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라 홀로 침대에 있노라면 자위를 했고, 그것은 이미 그녀 일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똑. 똑.

창공의 방문 앞에 서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네."

륀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소 륀과 동침할 때의 창공은 항상 침대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 그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담배를 피우는 중이다.

"이리 와. 파이프 가지고 있어?"

"네, 주인님."

"한 대 피워."

"어... 그..."

"싫어?"

상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에 륀이 망설였지만, 어차피 창공이 다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한 그녀는 얌전히 그의 반대편에 앉아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Ignem."

항상 연통 안에 연초를 다져 넣는 것이 그녀의 취미 아닌 취미라, 대개는 불만 붙이면 바로 흡연을 할 수 있었다.

"..."

그렇게 파이프를 빨며 문득 창공의 얼굴을 바라본 륀은 어쩐지 오늘 그에게서 오는 느낌이 평소와는 여실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공을 마주할 때의 느낌이라 하면... 도무지 함락될 수가 없는 철옹성과 같다. 어떨 때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강철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루는 폭군이다.

한데 오늘 창공의 모습은 어딘가 달랐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인상. 타다 남은 건물이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에는 창공도 인간이라는... 너무나 새로운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님?"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그녀가 의문을 표했지만, 창공은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관장은 했어?"

그의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창공답다면 지극히 창공 다운 그 대답에, 륀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아뇨. 주인님께서 즐기시고 싶어 할까 봐 안 했어요. 귀찮으시면 제가 직접 할게요."

"잘했어."

"감사해요. 오늘은 어떻게 꾸짖어 주실 건가요?"

"..."

다시 창공의 말이 끊겼다. 그럼에도 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참는 자에게 쾌락이 있다는 사실을 지난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까.

"륀."

"네, 주인님."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네...?"

아무래도 오늘의 창공은 명백히 이상했다.

"생각해 봐. 난 고고한 마법사이던 너를 길거리 창녀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시켰어. 설령 네가 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헌신적인 남자와 사랑을 한다 해도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결국에 네 첫 남자는 나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겠지. 지금 네 모습을 봐. 네 어디에 긍지 높은 마법 교수가 있지? 지금의 넌 그냥 어떻게든 엉덩이를 맞고 싶어서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 암컷일 뿐이야."

"주인... 님...?"

"더군다나 난 네가 끔찍이 사랑하는 동생도 가지게 되었지. 난 너희 가족을 망가뜨렸어. 아니, 딱히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넌 거기에 분명 불만이 있었을 거야. 안 그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던 창공이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시작했다. 건장한 그의 모습에 어울리는 기침이 아니라, 곧 숨넘어갈 것 같은 노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기침이다. 이윽고... 입에서 떨어진 창공의 손을 본 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주인님...!"

"봤어?"

창공은 자신의 병을 고백할 사람으로 륀을 골랐다. 그녀가 딱 적당했다. 나머지 여자들은 그에 대한 걱정으로 혼란스러워하기만 할 테고, 히사시는 아직 신뢰가 안 가고, 어택은 신뢰가 가기는 하지만 그가 아는 날엔 반드시 티가 날 것이다.

따라서 륀이 제일 적당하다. 그녀라면 창공과 딱 붙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 없다. 질투할 사람은 있어도. 또 그녀라면 위급한 상황에서 충분히 창공을 보좌할 수 있었다.

물론 위험한 행동이다. 륀은 말하자면 반란 분자이니까. 아직 그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창공은 이미 죽음을 옆에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두려울까.

"륀."

그는 웃으며 륀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점점 심해질 거야.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죽는다는 건 확실해."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탄광에서 일했던 게 악영향을 끼친 모양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이렇게 됐다는 게 웃기는 노릇이긴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가 없군. 아무튼 륀. 지금이 바로 기회야."

"무슨."

"떠나가고 싶으면 떠나가도 돼. 어차피 글러먹은 것 같으니까. 이제 이런 웃기는 장난질은 그만하자고. 자존심 상하지도 않아?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음이 예정된 남자의 성노예로 살고 싶어?"

"..."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파이프를 뻑뻑 빨아대던 륀은 다시 창공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이런 걸...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 야...?"

"만약에 그래도 네가 내 옆에 붙어 있겠다면 말이지. 네가 날 보살펴. 다른 사람들이 날 병자 취급하는 건 기분이 불쾌하니까. 하지만 내 노예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면 뭐... 노예가 주인님을 보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다야?"

"그래. 네가 날 독점한다면 다른 애들한테 욕 좀 먹겠지만... 그건 이미 익숙하잖아?"

"나와... 아스터에게 한 짓들에 죄책감을 느껴?"

"아니."

창공의 대답은 너무나도 깔끔했다.

"너희들로 밤에 재미 보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데."

"이런 걸 말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 당신은 곧 죽어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일이야. 누군가 하나는 알아야 응급 상황에 대처하지."

"그게... 나고?"

"헌신적인 노예라면 주인님의 사생활을 존중할 테니. 싫으면 때려치던가. 어차피 난 죽거든."

"이봐... 당신."

그녀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륀 퐁파두르야! 웨리의 최연소 교수 임용자고, 마법 이론의 교수야! 아퀴탄 왕실 명예 자문위원단이고, 당신들 같이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들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않아도 내게는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어!"

"그래서?"

"당신 때문에... 당신이 그 모든 걸 망가뜨렸어... 당신이 내 몸과 마음에 새긴 상처는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남아 있을 텐데! 그런데 뭐라고? 나는 당신의 성노예니까, 잘 보살펴 달라고? 제정신이야? 이 쓰레기!"

자신을 매도하는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웃는 창공.

"당신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난... 왜.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망가뜨려 놓고, 내 몸을 망쳐놓은 주제에 왜 지금 와서 그러는 거냐고! 당신은 내 모든 걸 끝냈어! 마법사의 긍지를 짓밟고, 사랑하는 가족을 증오하는 대상으로 바꾸게 만들었어! 그런데 왜...!"

맑고 찬란한 하늘색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당신에게 한껏 의지하도록...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서... 죽어버리는 거냐고..."

"애증이냐? 이제 와서 동정심이라도 느껴? 주인님 없이는 앞으로의 삶이 막막해?"

"나는...!"

창공의 웃음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륀의 시선이 떨구어진다.

"...알았어요, 주인님... 제가 편히 모실게요..."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주인님... 부탁이 있어요..."

"뭔데."

입에서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는 눈물 섞인 말을 이었다.

"만약에 더는 여행을 하지 못할 때가 되면, 제 고향으로 모실게요. 푸아송 남작령으로요. 공기 맑고 물 깨끗한 곳이에요. 그곳에서라면 주인님께서도 편하게 지내실 수 있겠죠."

"그렇게 할까."

"그리고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주인님을 그만큼 증오할 수 있도록..."

마지막 한 마디는 속삭이듯 작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분명하게 들렸다.

"그렇게 해 주실 건가요?"

"요양원에 집어넣겠다는 느낌이라 영 좋지 않군. 하지만 뭐... 오늘내일 한다면야 무슨 상관이겠어. 내 암컷이랑 노닥거리면서 사는 것도 좋겠네. 좋아. 허락하지."

"그래요. 계속 그렇게... 쓰레기 같은 주인님으로 남아 주세요."

"옷 다 벗고 침대로 와."

넥타이, 파란 드레스 셔츠, 회색 스커트... 하얀색 브래지어와 가터벨트, 팬티까지.

륀은 자신의 몸을 전부 드러낸 채 침대로 다가와 창공의 옆에 누웠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오늘은 이대로 잠만 주무실 건가요?"

"응. 너희 자매한테서 나는 향기를 맡으면 잠이 잘 오거든."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푹 주무세요. 편안하게...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요."

금빛 머리칼에서 나는 매혹적인 향기. 창공은 그것을 맡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꿈이 없기를 바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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