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산책은 즐거워 (3)
* * *
따뜻하다.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폭신폭신한 무언가에 뒤덮여, 사방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면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있다고 깨닫게 된다.
난 온기가 좋다. 웨리에 있는 내 침실에서도 항상 난로에 장작을 가득 넣어두고 잠을 청했다. 이불 안도, 바깥도 따듯한 그 느낌이 좋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째서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이런 선호는 어렸을 적의 추억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왜 있잖은가. 커서 남들에게 말하기 조금은 쑥스러운, 하지만 때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느낌.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참 따스했었지. 특히 밤에. 이름도 어두컴컴한 밤에 뜨는 별인 주제에 어둠을 무서워했던 아스터는 내가 안아주지 않으면 잠을 통 자질 못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커다란 침대 가운데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더랬다.
나의 온기는 분명 아스터에게 위안이 되었겠지. 그 사실은 분명하건만, 나 자신도 모르게 동생의 온기에 의지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밤에 몸이 차가우면 잠이 오질 않는다.
진정으로 그 시절의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달과 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아스터와의 관계가 파탄나 버렸고, 아스터를 쉽사리 용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내 몸은 아스터의, 혹은 그런 느낌의 온기를 원하나 보다. 몽롱한 가운데 온기를 느끼며 미소 짓는 내가 느껴지니까.
"아..."
자신을 자각하자 눈이 떠진다. 내가 느끼는 이 온기는 어디서 오는 온기일까. 내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그에게서 오는 온기다.
서창공. 내 몸을 더럽힌 남자. 최악의 남자. 내 자존심을, 긍지를, 정조를 짓밟은 남자. 단 한 달. 한 달 전이었다면 이런 남자 따위, 칼로 심장을 찔러 죽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밤을 홀로 지내는 게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그와 동침하지 않는 밤이면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에게서 떨어져 있노라면 자꾸만 그가 떠오르게 되니까.
하지만 혼란스럽다. 내가 생각한, 꿈꿔온 사랑은 이런 게 아니니까. 내가 그의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함께 늙어가는 모습이 여간해서는 잘 상상되지 않는다. 이것도 사랑일까? 이게 사랑일까?
아, 김아린. 그녀가 말했었지. 사랑한다는 사람의 눈이 왜 그렇게 슬프냐고. 지금과 그때의 내 마음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지금도 내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까.
난 지금 따듯하다. 하지만, 어딘가 비어있다.
추울 때는 따스함만을 바랐건만, 비어있는 지금은 채워지길 원하는구나.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 정말로, 진심으로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면 채워질 수 있을까? 정말로?
그가 더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되고, 우리의 고향으로 그를 데려가서 죽는 날까지 간호를 한다면 채워질 수 있을까?
한 번 그런 나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아침에 그의 옆에서 눈을 뜨고, 단출한 식사를 차려서 침대에 누운 그에게 갖다 준다. 물론 전형적인 아퀴탄식이다. 그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선 그렇게 먹어야 한다.
잘 구운 깡파뉴, 따스하게 데워서 나이프로 뜨면 부드럽게 떠지는 버터를 함께 준비한 다음, 계란을 한 장 살짝 부쳐 준다. 그도 반숙을 좋아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니까. 한 쪽 면만 부친 반숙을.
마지막으로 커피가 빠질 수는 없다. 그냥 커피는 안 마시려나. 설탕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퀴탄식 해결법이 있지.
우유를 잔뜩 탄 카페오레를 만들어 주는 거다. 그래도 안 된다면... 설탕을 구해야지. 논문 열심히 써서 몽펠리도에 부쳐 주어야겠다. 아침마다 마실 커피에 그렇게나 설탕을 탄다면 내 돈은 금방 말라버리고 말 테니까.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를 부축해 산책을 나간다. 개나리가 우거진 아리그녜 강가에서 맑은 공기를 매일매일 마시다 보면 조금은 차도가 있지 않을까.
산책에서 돌아오면, 그의 병에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한다. 내 전공 분야는 아니다. 사실 우리 마법사들은 인간의 병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연구는 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마법 생물학과 마법 약초학 쪽이 그나마 비슷하려나.
웨리에 우편을 보내서 그쪽 논문을 많이 보내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 점심인데, 역시 여기부터는 자신이 없다. 난 요리를 거의 안 했으니까. 어머니께 자주 찾아가서 배우던가 해야지. 라따뚜이를 해 볼까?
점심을 먹고 나면 그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말동무를 해 주어야 한다. 사실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대화 주제가 마구 샘솟을 리는 없다. 그럼 책이라도 많이 사야겠다. 그도 책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우리는 좋은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저녁. 저녁은... 점심이랑 똑같다. 차라리 부모님 집에 가서 같이 먹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도 우리 어머니 요리를 맛보게 되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지하 창고에 좋은 와인들도 여럿 두고 있으니까.
특히 그것도 있다. 부모님께서 우리 자매가 태어났을 때 좋은 소테른 두 병을 사서 보관해 두셨다. 벌써 21년이 지난 그 와인이라면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그도 뭐라고는 못할 것이다. 사위에게 주려고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는데... 그걸 생각하면 약간 죄송스러운 마음도 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와서... 아아, 그다음은...
...
그래. 그런 삶이라면 행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가 결국 떠나고 나면, 내겐 얼음장같은 한기밖엔 남아있지 않을 거야.
난 그 뒤로 다시는 따스함은 느끼지 못할 테고.
그렇다면 이게 사랑일까? 적어도 가까울 것 같기는 하다.
"후우우..."
난 혼돈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내 겉옷과 속옷은 잘 개어져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다. 어제 찼던 목줄까지도. 그 모습에서 내가 원래 입어야 하는 것들 중에 목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길을 돌리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 안에 손을 넣어 본다. 당연하게도 김이 모락모락 나던 욕조 물은 미지근하게, 약간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식어 있다.
"Ignem."
등불을 켜고 내 몸을 바라보니 어젯밤 그에게 범해진 흔적으로 가득하다. 특히나 내 몸 곳곳에 말라붙은 그의 정액들이...
손가락으로 훑어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면, 결코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다. 빈말로도. 수시로 내 몸 곳곳에 뿌려지고 때로는 삼키기도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지.
난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에 물을 끼얹어 정액들을 닦아냈다. 끈적하고 이리저리 달라붙어 잘 씻기지도 않아 조금 고생했다. 특히나 음모에 달라붙은 정액이. 아직 그에게 순결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내 몸 곳곳으로 그의 욕망을 받아내다 보면 여기에 뿌려지는 일도 일상다반사다.
정말, 처리하기 힘든데 그냥 밀어버릴까. 하지만 그는 이런 게 색다른 맛이 있다고 좋아하던데. 정말 최악의 남자다.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비교하다니.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그런 건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다른 여자들 하니까, 어제 남나유에게 그와의 밀행을 들켰던 일이 떠올랐다. 솔직히 걱정은 된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잖아. 나머지는 그녀의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에 달려 있으리라. 아마 날 대놓고 망신 주고 싶긴 하겠다만.
남나유가 날 미워하는 까닭은, 나와 아스터가 서로를 미워하는 까닭과 똑같겠지. 더군다나 요새 그는 거의 대부분 나를 안아 주었으니까. 여자로서 질투심이 나기에 딱 알맞은 환경이다. 어쩌겠나. 버텨야지.
사실, 어젯밤엔 당황해서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뭐. 살짝 걱정되는 것 빼면 그냥 그렇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와의 밤을 즐기고 싶다. 사랑은 없어도 쾌락은 있으니까 나쁜 일은 아니지.
몸을 씻던 내 손이 엉덩이에 닿았다. 어찌나 맞았는지 아직도 따끔따끔한 감각이 남아 있는 엉덩이. 그리고... 이젠 남자를 받아들이는 구멍이 되어 버린, 말라붙은 정액이 느껴지는 내 그곳.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항문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안쪽을 청소했다. 어차피 완벽히는 안 된다. 그냥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만 처리하는 거다.
"흐으으... 으읏..."
그런 와중에도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최대한 입을 틀어막고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미 이곳은 그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사실 내 몸에서 안 그런 곳이 얼마나 될까.
이젠 걱정마저 된다. 그가 내 처녀를 가져갈 때에 안 아프면 어쩌나, 하고. 정말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가 싫어할까? 음...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다.
아아... 이 음탕한 몸뚱아리는, 손가락으로 뒷구멍을 조금 쑤신 것만으로도 금방 달아오르고 만다. 분명 깨끗이 씻었건만, 내 소중한 그곳에서 끈적한 체액이 느껴진다. 이래서야 발정 난 암컷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겠는걸.
비치된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 뒤에 욕실 바깥으로 나가 그가 누운 침대에 다가간다. 아직까지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그는 이렇게 평화롭지만, 나는...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나.
그의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하체 부분으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자세를 잡아 보던 차에 단단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친다. 그의... 성기다.
내 몸을 굴복시킨, 마음마저 반쯤은 굴복시킨.
냄새를 맡아 보면... 결코 좋은 냄새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야 당연하다. 정액에, 내 장액에, 윤활제... 아마 내 애액도 어떻게든 묻었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이 냄새를 맡고 있는 난 지금 미약한 절정을 느꼈다.
난 짐승이다.
그리고 그의 암컷이다.
암컷은 암컷답게.
* * *
창공은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눈을 떴다. 살근살근, 간질간질. 그렇지만 착실하게 사정감을 끌어올리는. 손을 뻗은 옆자리에는 륀이 없다. 이불을 들추어 안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웅크려서 자지를 빠는 그녀가 있었다.
"아, 깨셨나요?"
"뭐해?"
"주인님께서 기분 좋게 일어나실 수 있도록 봉사하고 있어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소리 없이 웃던 창공은 다시 이불을 덮고 편하게 누웠다.
"계속해, 그럼."
"네."
아무래도 이불 속에 웅크려서 하느라 그런지 움직임은 상당히 제한되었지만, 그 대신 좁은 공간 안에서 그녀의 숨결과 부드러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받아 보니 이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혀로는 끊임없이 귀두와 기둥을 핥으며 정액을 재촉하는 한편, 손으로는 불알을 세심하게 주무르며 쾌감을 극대화하는 륀. 가까이서 뿜어지는 숨결 때문인지 온도와 습도가 높다. 마치 보지 안에 넣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
"기분 좋으신가요? 이대로 하면 될까요?"
"계속해."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창공은 륀이 아침부터 발정해 그의 정액을 원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성노예 주제에 괘씸하고 요망하긴 했지만, 이런 요망함이라면 오히려 권장하고 싶을 정도다.
"싼다. 바로 삼키지 마."
"네, 주인님."
마치 짜내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고환을 살짝 거머쥐고, 귀두를 머금은 입은 쪼옥 빨아들인다.
창공은 참지 않았다. 륀의 입안에 잔뜩 뿜어지는 정액. 어젯밤 그렇게나 사정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왔지만, 그녀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입 벌려 봐."
사정이 끝나고 이불을 걷은 그는 륀에게 입을 벌려 머금은 정액을 보일 것을 명령했다. 순순히 따르는 륀의 입안에 하얀 정액이 가득하다.
"이제 삼켜."
그러자 눈을 감고 정액을 삼키는 륀. 양도 많고 끈적거려서 한 번에는 안 되는 것인지 연거푸 여러 번을 삼킨다. 이윽고 떠진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다시 입을 벌려 남김없이 삼켰음을 확인받았던 것이다.
"좋아. 잘했어."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주인님."
분명히 륀은 발정이 난 상태다. 정액을 삼킨 것 가지고는 아직 부족할 것이 틀림없다. 이대로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채 다시 잠드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창공은 이런 가상한 모닝콜을 한 륀에게 포상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엎드려서 엉덩이 올려. 주인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그런 식으로 깨우래?"
"아... 맞아요, 주인님. 륀을 잔뜩 꾸짖어 주세요. 노예 주제에 건방졌어요.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혼내 주세요."
"하, 말하는 것 좀 봐라."
그의 손이 올라가고...
창공의 방 안은 달콤하게 울부짖는 암컷의 교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