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17화 (117/178)

〈 117화 〉 이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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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리.정확한 명칭은 이스트리 자유시이다. 키르케의 서쪽, 아르토스 접경 근처에 있는 이 작고 번화한 도시는 분명 키르케의 영토 내부에 있으되, 키르케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그 이유를 따지자면 역사책을 들추어 보아야 하는데, 본래 이곳에는 이스트리 '공국'이 존재하였다 전해진다. 그러나 이스트리 왕국은 키트라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고, 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이스트리 공국이 멸망하고 5백 년이 흐른 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 또한 멸망하였다. 제국이 멸망한 뒤에 옛 제국령에는 대혼란이 찾아왔고, 긴 세월 동안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옛 공국민들은 부흥 운동을 펼쳤다 한다.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온 북대륙의 왕국이 옛 제국령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틈을 타 키르케 왕국이 발호할 줄은. 키르케는 키트라 제국과의 연관성을 부정하였으나, 제국의 영토를 얻는 것은 마다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이스트리의 땅 또한 키르케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스트리의 사람들은 기어이 키르케의 산하에 들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그들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장장 오십 년에 걸친 항쟁 끝에 승자로서 서게 된 것은 키르케 왕국이었던 것이다.이제 이스트리는 영락없이 키르케의 땅으로 남게 되리라 누군들 확신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키르케의 가라발디 2세가 그들의 독립 정신을 존중하여 키르케의 영토에 편입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혹자는 이 결정을 두고 이스트리 사람의 감투 정신이 가라발디 2세를 감동시켰다 하고, 혹자는 가라발디 2세의 낭만적인 감상 때문에 키르케 왕국이 이스트리 땅을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이유야 어찌 됐건, 자유를 얻은 이스트리의 사람들은 옛 공가의 혈통을 찾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자그마치 600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스트리 공가는 역사의 흔적으로 화해 사라졌던 것이다.결국 그들에게 남은 수단은 왕 없는 왕국, 대공 없는 공국이 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다이셀리시아 첫 자유시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자크 올리 저, [키르케와 아르토스 사이에서] 中­

아침해가 점점 떠올라 점심해로 바뀌어 가는 시간.

창공 일행은 드디어 1차 목적지인 이스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룬덴을 떠난 뒤의 여정은 나라를 하나 횡단했을뿐이건만, 그것만으로도 일행의 다수는 지쳐 있었다.

그것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때문인지... 아니면 물밑에서, 때로는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신경전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뭐가 됐든 일행은 이스트리에 도착했고, 이제 여기에서 배를 잡아 골라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 그들은 여관에 짐부터 풀기로 했다. 당장 비타로 가는 배를 탄다 해도 오늘 출항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결정적으로 마차 안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느긋하게 관광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따라서 이왕 여관에 도착한 김에 조금은 이른 점심밥을 받게 되었다.

점심으로 나온 것은 정어리 소금구이와 토마토, 올리브, 양상추로 만든 샐러드였다. 거기에 항상 밥처럼 곁들여 먹는 빵. 그런데 어딜 둘러봐도 발라 먹을 버터가 보이지 않는다.

"정어리를 끼워 드세요."

"빵에다가요?"

종업원의 안내에도 그런 건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만 휘둥그레 뜨는 히사시. 사실 이 방법이 익숙하지 않기는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네. 파스타도 안 나오고."

"여긴 이스트리니까. 키르케가 아니야."

그런 그들을 위해 륀의 설명이 이어졌다. 흔히들 키르케의 이스트리라 말하곤 하지만, 그건 편의를 위해서일 뿐이지 이스트리는 독립된 자유시라고. 역사와 문화가 깊은 연관성을 가지기는 하나, 분명 다르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생선을 빵에 끼워서 먹는 건 나도 영 익숙하지가 않네. 이렇게 한다고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설마 그럴까, 생각했었어."

"지구에서도 이렇게 먹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린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머뭇거리면서도, 동시에 천천히 빵 위에 생선을 올리는 그녀.

"사실... 이런 방식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문화라는 게 그렇지 않아요? 나에게 정상적인 것은, 어떤 사람에겐 비정상적일 수가 있다는 거죠. 그게 여행을 하는 재미 중 하나고요. 히사시 씨. 솔직히 저는 초밥을 처음 봤을 때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라고 느꼈어요."

"엑, 그렇습니까?"

"지금은 좋아하지만요."

그리고 그런 그들을 연구하는 륀은 수첩과 펜을 꺼내들고 초밥이 어떤 음식인지 물었다. 이윽고 대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날생선을? 그... 전에 바스에서 먹었던 밥인지 뭔지 위에?"

"우리나라의 자랑인데 말입니다. 그거."

"날생선을... 으... 그것도 그 끈적한 거 위에... 아, 미안.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게 맛있다고? 음, 그거보단 차라리 이게 더 나은 것 같긴 하네. 적어도 이 생선은 익혔잖아."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대접해 드리죠! 이렇게 된 거, 밥 먹고 시장에나 한 번 가 봐야겠네요."

"하지 마, 하지 마."

생선을 날로 먹는다는 말에 륀이 손사래를 쳤다. 아스터도 말만 없다 뿐이지 영 좋은 느낌은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공은 묵묵히 빵 사이에 정어리 한 마리를 끼워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나왔으면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거... 은근히 괜찮다. 등 푸른 생선 특유의 비린내가 살짝 나기는 했지만 빵에서 나는 시트러스 향이 비린내의 고약한 부분을 최대한 억제하고, 풍미는 살린다. 애초부터 이렇게 설계된 요리인 것 같았다.

"생선 하니까 말인데."

의외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게 되어 기분이 나아진 창공이 입을 열었다.

"마침 우리가 타고 갈 배도 결국에는 어선이 아니던가?"

"맞아. 그것도 큰 어선이지."

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무인도에, 군사 기지로도 써먹을 수 없을 정도인 비타에 굳이 가는 배는 없다. 다만 근처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들이 잠시 바람을 피하는 용도로 쓴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무 어선이나 비타 앞바다에 투묘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트리에서 그곳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즉, 대부분의 자잘한 어선들은 이스트리 근해에서 조업을 하지 그곳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륀의 말대로 비타까지 가려면 일정 이상으로 배수량이 나가는 원양 어선을 타야 한다.

"그런데 그런 어선이라고 전부 다 비타까지 가는 건 아니잖아. 하긴 그러니까 돈을 주는 거겠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그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지."

"돈을 준다고 해도 다 가는 건 아닐 텐데. 배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협상을 해야 하나?"

"음... 그건 조합에 가서 수배를 해 봐야지. 아마 어부들이 결성한 조합이 여러 개가 있을 거야. 그중에 비타에 갈 수 있을 법한 어선들이 모인 조합을 찾아가서 사정을 해 보는 수밖에."

"저기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나유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갑자기 왜요, 언니?"

"그런 데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곳 사람이 잘 알 거 아니야. 아, 네.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네. 왜 그러시죠?"

종업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유가 동전 하나를 쥐여 주자, 더욱 미소가 환해진다.

"저희가 비타로 가려고 하는데요. 큰 어선들이 모인 조합은 어디가 있을까요?"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종업원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엔 미묘한 꺼림칙함과... 두려움이 대신 차지한다.

"조, 조합...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유는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네. 조합이요. 가장 큰 어선들이 모인 조합."

"아... 그게..."

"무슨 일 있나요?"

"아니요! 단지, 으. 이스트리에는 처음 오신 거죠?"

"...네."

그 뒤로도 한동안 머뭇거리던 종업원은 나유가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재촉할 지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항구에, 3번 부두... 아우스트로 수산 협동조합..."

무슨 암호문을 전달하듯이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대놓고 무슨 일이 있다는 듯한 움직임. 일행들 모두가 뭔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창공아. 되겠냐?"

결국 이런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창공이다. 그는 어택의 물음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정어리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모르죠. 의외로 별일 아닐지도.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으니까.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라도 해야죠."

"히사시랑 아린이는 여관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뇨."

간단하고 재빠른 부정.

"정말 그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여관에 둘만 남기고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겠죠. 무슨 일인지 파악될 때까지 이스트리에선 다 함께 움직이는 걸로."

그의 말에 일행 대다수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얼굴 굳히지는 말고. 의외로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왜들 그러는 건지. 아니, 그렇다고 긴장 놓으란 말은 아니야."

표정을 풀던 나유가 다시 진중하게 되돌아간다.

"빨리 처리해 봅시다. 밥 먹고 바로 일어서죠. 3번 부두랬나? 배 한 번 타기 참 어렵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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