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이스트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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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를 걷는 일행의 머리칼을 바닷바람이 흔들며 지나친다. 짭짤하고, 약간 비릿한 것도 같은. 하지만 기분이 들뜨는. 오랜만에 마주친 바닷바람의 인상은 그랬다.
이스트리항은 항구라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거센 바닷바람,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 가득 정박한 배들. 끼룩대는 갈매기. 이리저리 오가는 어부들.
"의외로 정상적인데?"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유는 어딘가 김빠지는 데가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마굴이라도 되는 것마냥 겁주더니... 그냥 멀쩡하잖아."
"그건 그러네요."
아린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랄까. 조금 을씨년스러운 그런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말이죠. 이 도시 전체에 무슨 일이 벌어졌겠거니,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요. 그렇다는 말은."
"그 조합에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겠지."
어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라던가 언급을 피해야 할 무언가에 대해선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평화롭고 분주한 항구일 뿐이다. 실제로 수많은 어선들이 출입항을 하고 있다. 어부처럼 보이는 어떤 이들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신다. 만약 어떠한 불행이 있더라도, 그 불행은 일행이 찾아가는 조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강하게 들었다.
"아니면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다거나."
"어쨌든 긴장은 풀지 않는 게 좋겠어."
륀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무슨 일이 일어나려거든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곳은 2부두였다. 3부두가 어디인지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어디로 가면 몇 부두가 나오는지 적혀 있는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2부두에는 주로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딱 보더라도 근해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들이다. 당연히 창공 일행과는 관련이 없다.
한 5분쯤 걸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떠들썩하던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기 시작하더니, 부두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가을에 화사하게 핀 단풍을 보다 갑자기 한 번에 모든 단풍잎이 떨어져 나가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것처럼.
배들은 확실히 커다랗지만, 겉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끼긱대며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배들에선 마치 유령선과도 같은 느낌이 뿜어진다. 새카만 홋줄에 매여 항구에 묶여 있는 그 모습이 처량하다.
"이건... 이상하군요."
아스터조차 이 참상에 가까운 풍경을 보고 한마디 내뱉을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독할 정도의 광경. 무채색의 풍경. 사람은 없고 공간만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 멋들어진 목조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일행의 목적지다.
[아우스트로 수산 협동조합]
문짝이 부서지거나 창문이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 부둣가에 매여 있는 배들처럼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기는 매한가지.
"이거... 들어가도 될까?"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듯, 항상 대담한 편이던 나유가 답지 않게 머뭇거린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게?"
그러나 창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건물로 향했다. 일행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이 조합의 배를 타지 못하면 비타로 갈 수 없는데 망설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목적지를 갑자기 잡을 수도 없다.
어떤 이들에겐 유령의 집처럼 느껴지는 조합 건물이었지만, 결국에는 다들 창공의 뒤를 따랐다. 사실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이런 을씨년스러운 부두에 우두커니 남겨져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계십니까?"
창공은 문을 열고 안쪽을 확인했다. 이제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라 건물 안은 밝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밝고, 텅 비어있다.
가구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의자, 테이블, 책상, 간이침대... 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하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 사람의 흔적은 있으되, 오로지 흔적뿐이다. 마치 예전에 어떤 건물의 터였다던 유적을 보는 느낌.
그리고 그 정적 가운데, 멍하니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자가 하나 있다. 나이 마흔 정도 먹은 남자일까. 얼굴은 거칠게 생겼고 몸집은 다부지지만 정작 생기가 없다. 기둥은 굵되 안쪽이 다 썩어 문드러진 나무를 보는 느낌이다.
"누구쇼?"
"문의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흐리멍덩한 눈빛에 흐리멍덩한 목소리. 창공은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용건을 풀어놓았다.
"비타에 가고 싶습니다만, 근처에 가는 어선이 있습니까? 사례는 넉넉히 하겠습니다."
"댁이 보기엔... 지금 이 부두에 조업을 나갈 어선이 한 척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오?"
"어선은커녕 사람도 없더군요. 무슨 일로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예 안 나가는 것보다는 저희를 태워 주시는 게 돈도 벌고 좋을 텐데요. 아닙니까?"
"하."
사내가 힘없이 웃었다.
"보아하니... 에트로지?"
"맞습니다. 두 명은 아니지만."
"그것참 무서운 것 없는 손님들이로군. 이스트리에는 오늘 오셨소?"
"오늘 왔지만,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다는 걸 아는데도 여기 찾아왔단 말이지. 저 바깥의 꼬라지를 보고서도."
"어쨌든 비타에 가야 하는데 문제는 문제가 안 됩니다."
"하하하..."
그는 다시 한번 웃었다. 하나, 이번의 웃음소리는 먼젓번 것보다는 조금 더 유쾌함이 느껴졌다.
"어지간한 뱃놈들보다 더 뱃심이 좋은 손님이로군. 적당한 의자 하나씩 골라잡으시오들. 원래 손님 대접을 하려거든 차를 내오거나 해야 하겠지만... 보다시피 이곳 사정이 말이 아니라서."
"이해합니다."
일행들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도 대뜸 칼부림을 할 일은 아닌 것 같았기에.
"안젤로 아우스트로. 아우스트로 수산 협동조합의 조합장이요. ...잠깐. 거기 계신 분. 혹시..."
자신을 소개하던 아우스트로의 시선이 아스터에게 꽂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사제님...? 교단의 사제님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복음화성 소속 사제인 아스터 퐁파두르라고 한답니다. 제가 아우스트로 형제님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일행들 중 사제가 있다는 것에 잠시 기뻐하던 그는 결국 다시 풀 죽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너무나 변화가 심하고 빨라 마치 조울증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사실 우울증에 걸렸대도 이상하진 않다.
"아뇨... 아닙니다... 교구에도 저희가 연통을 넣어는 보았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라... 게다가 사제님들이 나서서 해결될 일도 아니지요. 하이고..."
조합장의 모습을 바라보던 창공은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이내 자기 혼자만 이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불을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이젠 륀을 제외하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담배도 한 대 태우기 어려워진 몸이다.
"하지만 형제님.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 수만 있다면..."
"아니요, 아닙니다. 괜히 아름다우신 사제님께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두렵군요. 그렇겠지요."
"교구에 연락을 넣으셨다고..."
"이스트리 교구뿐이겠습니까. 시청 공무원 놈들도 꿀 먹은 벙어리더군요!"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퐁파두르 사제님. 사제님 보시기에 이스트리는 평화로워 보이셨습니까? 이곳 3부두를 제외한 모습 말입니다."
"...네. 아주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였어요."
"겉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썩었습니다. 안쪽은 아주 더 이상 썩지도 못할 정도로 썩었습니다. 그냥저냥 사는 사람들에겐 나름 만족스러운 도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같이 고기 잡아서 먹고사는 놈에겐 전혀 아닙니다. 범죄 조직이 활개치고 다니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범죄 조직인가요..."
창공에겐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치안이 우수한 편인 한국에서도 깡패들이 유흥가에서 이권 다툼을 하는데, 이 세상에선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우스트로가 그런 생태를 모를 리 없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어제오늘 일이 아닐 테니까. 즉, 뭔가가 있다.
"예. 범죄 조직입니다. 이른바 '이스트리 형제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이지요. 형제는 개뿔이. 형제끼리 이러는 법이 있답니까? 아니면 우리는 형제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가요? 괴로우시겠지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흔해 빠진 이야기입니다. 상납금 문제지요."
"상납금..."
"부끄럽습니다만, 형제단은 시장의 상인들이나 저희 조합에게서 보호비를 명목으로 한 달에 일정 금액을 수금해 갑니다. 사실 보호비가 다 뭡니까. 그 깡패 놈들이 왜 저희를 보호하며, 또 저희는 왜 바라지도 않은 것 때문에 돈을 내야 한단 말입니까."
"있을 수 없어요. 상납금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륀은 물론이고, 지구에서 온 사람들이 같이 화를 내기엔 새로울 정도의 이야기도 못 된다. 하지만 아스터는 진심으로 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일행들 중에서 제일 순수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아스터가 아닐까.
"오로지 하느님의 권위와, 그분께서 내리신 권위인 국가에만 복종해야 하거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왕의 것은 왕에게! 도대체 그 형제단이라는 사람들이 누구이기에 돈을 받아 간다는 거죠? 있을 수 없어요! 왜 이스트리 교구에선...!"
"퐁파두르 사제님."
아우스트로가 긴 한숨을 내뱉는다.
"교단에 사제님처럼 의로운 분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건 아니에요. 이건 아니야. 오... 신이시여..."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아스터. 입에 문 담배를 질겅질겅 씹던 창공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이게 성장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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