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이스트리 (3)
* * *
"이스트리 교구 문제에 대해서는... 교단의 성직자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릴게요."
진정으로 미안함이 담긴 얼굴이 되어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아스터. 아우스트로는 순간 감격한 기색이 되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평사제인 그녀의 신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아스터가 교황청 직속 사제라 해도, 결국 평사제에 불과하다. 반면에 이스트리 교구의 교구장은 주교. 주교쯤 되면 경력도 오래되었고, 곳곳에 아는 인맥들도 널리 퍼져 있다.
결국 그녀가 백날 연통을 넣고 고발을 한다 해도 주교에게 대항하는 것은 어렵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여러 가지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스트로 조합장은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효약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스터 본인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건 말건 그것은 그저 기분이 약간 풀어질 뿐인, 공허한 무언가에 불과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퐁파두르 사제님이 사과를 하신단 말입니까... 그래도 이토록 정의로운 분이 계시다니, 제 신앙생활이 아주 헛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히려."
"아스터."
이대로 가면 계속 이야기가 늘어지고 정작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진 한참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창공은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일단 이야기부터 듣자.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해결을 볼 거 아니야."
"네, 물론이죠. 반드시..."
"그럼 아우스트로 조합장님. 그래서 그 형제단이란 놈들에게 계속해서 상납금을 바쳐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걸 갑자기 올리기라도 했습니까?"
"손님 말이 맞소. 너무나도 흔해 빠져서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이야기지.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오. 상납금이 오른 곳은 이스트리 전체에서 우리... 아우스트로 협동조합뿐이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은 그대로란 말입니까?"
"음. 다른 부두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보셨을 거요. 오직 우리만 이런 상황이지. 그래도 그동안 우리가 냈던 상납금은 기분이 더럽긴 해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던 말이오. 생각해 보시오. 놈들은 이스트리 전체에서 상납금을 걷는데, 조금씩만 걷어도 그 액수는 어마어마하지 않겠소?"
"상당하겠죠."
"그러니까 그놈들은 괜히 허튼수작을 벌여서 우리에게 이럴 이유가 없단 말이오. 뭐!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오. 놈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상납금은 10만 키트요. 하루아침에 백 배가 오른 거지."
"시청에 말씀하실 때 그런 사정은 잘 알려 주셨나요? 아무리 그래도 공무원들이 그걸 납득을 할 리가..."
아린조차 상당한 불쾌감을 느낀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가씨. 내가 안 그랬겠소? 어차피 형제단의 더러운 돈이 시청으로 흘러간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소. 하지만 나도 지금까지 정직하게 세금을 냈단 말이오. 도무지 억울하고 미치겠는데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그 기분을 아시오?"
"안 되겠어요. 저와 함께 다시 시청에 가 봐요. 제가 따져 볼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가..."
"하지 마."
창공은 냉소를 흘리며 그녀를 말렸다.
"네가 뭔데. 네가 가면 들어 주겠냐? 우리가 알펜시아에서 몇 개의 훈장을 받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이 사람들에게 우린 이방인일 뿐이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아스터. 너도 안 돼. 헛짓거리야. 우리 중에서 그나마 가장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은 륀이네."
자기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드는 륀.
"륀. 네가 해결할 수 없겠냐?"
"...안 돼. 아마도. 여기가 아퀴탄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명예직이긴 해도 왕의 자문 위원이니까."
"왕의 자문 위원... 그러고 보니 그 차림새는 설마..."
가만히 듣고 있던 아우스트로가 최후의 희망을 품은 기색으로 륀에게 말했다.
"혹시 마탑의...?"
"마법 이론 정교수. 륀 퐁파두르에요. 아퀴탄 왕실 명예 자문 위원이기도 하죠. 하지만 여긴 이스트리. 나는 이곳에서 존중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어떤 권한은 없어요."
"하지만...! 듣기로 마법 교수는 백작급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자문이나 조언이라 함은 상대방이 요구했을 때에 자격을 얻는 것. 상대방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하는 자문 위원은 자문이 아니라 참견과 간섭을 하는 것이죠. 조합장께선 키르케의 백작이 이스트리의 내정에 간섭한다 하면 백작이니까 옳다고 보시는지?"
결국 륀조차 이곳에서 존중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시장의 허락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것이 떨어질 리 없다. 이미 이스트리 시청과 이스트리 교구, 그리고 형제단은 한통속이었다.
말이 바른 말이지만, 희망을 품었던 조합장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결국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미치겠군... 이거 정말 미치겠어."
순간, 창공과 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끝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대강 알겠습니다. 그럼 상납금을 내기 전에 출항을 하면 배를 다 때려 부수겠다고 말하기라도 한 겁니까?"
"배가 아니라 가족을 때려죽이겠다는군. 그게 먹힌 거요. 집에 있으면 어떻게든 막아 보겠는데, 우리가 바다 위에 있으면 어떻게 가족을 지킨단 말이오? 또 설령 그게 말뿐인 위협이라고 해도 그래가지고서야 마음 놓고 조업을 할 수야 있겠소?"
"돈독이 올랐구만, 돈독이 올랐어. 나쁜 놈들."
테이블을 주먹으로 쳐대며 탄식하는 나유.
"원양 어선이 잘 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이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돈 때문은 아니야."
"택이 오빠? 왜요?"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어택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제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방금 조합장님이 말했잖아. 어차피 형제단이라는 놈들은 이스트리 전체에서 상납금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봐. 상납금이라는 게 그래. 보호비라고는 하지만 대가 없이 돈만 뜯어가는 거 아니야. 리스크는 없으면서 적당한 리턴 보장. 주는 사람 입장에선 당연히 기분이 더럽지만, 못 낼 정도까지는 아닌. 그런 수준을 유지하게 되거든."
"오빠 꼭 걷어 본 사람처럼 말한다?"
"시끄러. 아무튼 내 말은, 굳이 머리 아프게 싸워 가면서 이런 수작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거야. 아니. 점점 올라갔으면 또 몰라. 그런데 하루아침에 백 배가 올랐어. 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출항도 막고 있지. 왜?"
"그거야 상납금을 안 내니까..."
"출항을 해서 조업을 해야 돈을 벌어서 상납금을 낼 수가 있는데? 놈들이 진짜로 돈이 목적이었으면 돈구멍까진 틀어막지 않아. 빨리 내라고 찾아와서 깽판 치고 그럴 수는 있어도.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게 됐지? 안정적인 수입원 하나가 탈락한 거야.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영원히 그렇게 될 거고."
어택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히사시가 꺼려진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님 말은... 놈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이 조합의, 원양 어선들의 출항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고요?"
"그렇게 되겠지."
"대체 그런다고 무슨 이득이..."
"꼭 이득을 보려 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 조합장님. 최근 형제단이라는 자들과 갈등이 있었습니까?"
조합장은 간단하게 부정했다.
"그런 깡패들과 갈등을 빚을 게 뭐가 있겠소. 어차피 놈들은 상납금을 걷을 때 이외에는 여기 오지도 않고, 우리도 따박따박 돈을 쥐여 돌려보냈는데."
다들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 기색이었다. 이제 바다만 건너면 목적지인 비타가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유일한 수단인 원양 어선이 움직이지를 못한다. 게다가 그 이유는 깡패들이 원인 모를 꼬장.
보통 깡패라면 또 모르겠는데 지역 공권력, 종교계와 작당모의를 하는 깡패들이다. 여기가 알펜시아라면 왕이 직접 임명한 기사로서 권위를 이용해 군대를 끌고 와 토벌이라도 하겠지만 그것도 안 된다.
"조합장님."
일동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창공이었다.
"일단 저희는 어떻게든 비타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배가 움직이질 못하니 저희 나름대로 해결책을 궁리해 보겠습니다. 큰 기대는..."
"물론, 하지 않겠소. 빈말이라도 고마울 지경이오. 그동안 누구도 우릴 도와준다고 하질 않았으니."
"상황에 진척이 있으면 찾아오도록 하죠. 모두들 갑시다."
창공 일행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여관으로 향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분한 표정이다.
"세상에, 그러면 그 종업원도 대충 알고 있었다는 거네? 같은 마을 사람이라면서 도울 생각은 안 하고... 하긴 우리도 이웃집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다."
"나유야. 화내는 건 좋은데 목소리 낮춰라. ...허튼수작 부리면 다 깨부수겠다고 동네방네 협박하고 다녔겠지."
"하아... 이세계에 와서도 야쿠자들 문제라니."
"공무원이라는 사람들도 참 그래요. 불한당들에게 뇌물이나 받고. 시민의 공복으로서 자각심은 가지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없으니까 이러는 거겠지만..."
"이스트리 교구가... 아아, 하늘에 계신 주님... 저희들이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주님의 어린 양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고 말았나이다..."
다만 일행들 모두가 한탄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단둘. 창공과 륀은 아무런 말 없이 길을 걸었다. 이윽고 여관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한 사람만 빼고.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창공이 문을 여니 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그녀를 맞아들였다.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
"륀."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무래도 이 일에는 뒷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