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이스트리 (4)
* * *
"역시나 뭔가 사연이 있긴 있었던 거지."
창공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이번 일이 정말로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라기엔 석연찮은 점이 존재한다. 얌전히 수금이나 해 가던 깡패들이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한 조합만 콕 찍어서 배를 운항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단 말인가.
여기엔 반드시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란 갑자기 형제단인가 뭔가 하는 웃기지도 않는 조직 두목의 변덕이 아니고, 아우스트로가 말하지 않은 조합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것은 아우스트로의 조합을 노린 것이 아니라, 창공 일행을 노린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정황만을 확대해서 판단한 생각일 뿐. 창공은 정황만으로 상황에 결론을 내리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확실한 증거 없이 내리는 결론이 올바를 때도 있다. 아무 근거가 없고, 곳곳에 반박당할 구멍이 존재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쩐지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이 말이다.
"아마도요... 그전에 잠시."
방문을 닫은 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꽉 닫고 커튼을 치는가 하면, 방안 곳곳을 살피며 뭔가를 탐색했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지팡이를 잡고 눈을 감은 채 뭔가를 암송하는 것이 아닌가.
"astne eliquid an cubiculo."
그러면서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한 번 찍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륀이 어딘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걸로 봐선 모르긴 몰라도 잘 된 것 같았다.
"뭐 한 거야?"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엿듣는 짐승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엿듣는 짐승."
말도 못 하는 짐승이 엿듣는 게 뭐 어쨌단 말인가. 하나 륀은 진지한 상황에서 헛소리나 농담을 하지 않는다. 이곳은 지구와는 다른 세상. 지구에서 통용되던 상식들이 대체로 통하지만, 어떤 것들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마법사들은 짐승을 부리기라도 하나?"
"마법생물학에 통달한 마법사들은요. 역시 눈치채셨군요?"
"이게 별거라고. 어쨌든 얘기해 봐."
"네."
작게 한숨을 내쉰 륀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진 않는다. 다만 손노리개가 필요한 듯이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리기만 할 뿐.
"튜리에서 제가 자리를 비웠던 때 기억하세요?"
"웨리의 지부에 간다고 했던가."
"맞아요. 거기에서 옛 동료에게 어떤 소식을 들을 수 있었죠. 이스트리에서 교수 한 명이 실종되었다고. 동키르케 지부에서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요."
"마법 교수의 실종이라."
그럭저럭 흥미가 동하는 말이다. 사실 마법사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니 왜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당장 륀만 하더라도 고고한 마법 교수가 땅바닥에 추락해 비참한 모습이 된 좋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케이스. 아스터가 없었더라면 창공은 륀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는커녕 단칼에 목이 잘렸을 것이다. 마법 교수라는 것은 그런 존재다. 지식으로든, 무력으로든 어지간한 일반인들을 압도하는 그런 존재.
그런 마법 교수가 실종이 된다? 그것도 이런 평화로운ㅡ적어도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ㅡ항구 도시에서? 쉽사리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마법 교수들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는 아니지만 거대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구성원이 특정 장소에서 실종되었다면 이슈가 될법한 일이다.
"이스트리 시청에서는 어때. 웨리나... 혹은 동키르케 지부에서 실종자 수색에 대해 협조 요청을 했다면 그냥 적당히 넘어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게 말이죠, 주인님. 어떻게 된 일인지 이스트리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들은 열심히 찾고 있다고는 하는 것 같은데, 동키르케 지부에서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가 봐요."
"마법사가 실종되면 담당 관청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의무가 있나?"
"형식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그건 일반 실종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이론적으로 웨리의 요청이 있으면 관청에서 열심히 실종된 마법사를 찾아야 하는 게 맞으나, 이것은 치안을 유지하는 측면에서 실종자를 찾는다는 개념이지 마법사이기에 더 특별히 수사 인력을 배당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결국 웨리의 입장에서는 그 국가, 혹은 도시가 웨리에게 협조적으로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법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하는 정부가 있을 리가. 결국 문자 그대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런데 이스트리 시청은 이번 실종 사건에 대해 뜨듯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쨌거나 이스트리의 공식적인 입장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고, 실종자를 찾지 못한다 해서 그런 이스트리를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
"음. 그 실종된 교수라는 사람은 어떤 마법사인데?"
"잉게 포를렌탈 . 노르마크 출신. 마법생물학에서 이름을 날리던 부교수였어요.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히 활동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연구 실적이 뚝 끊겨서 동키르케 지부로 전출을 갔다고 하나 봐요."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이긴 한데, 교수로서 실적이 없으면 웨리에 붙어있을 수 없나 보지?"
"지부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웨리에 있는 마법사들보다 떨어지는 건 아니고 자기 고향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네. 주인님 말씀이 맞아요."
"포를렌탈 교수와 면식은?"
"없어요. 그 교수가 동키르케 지부로 전출 나간 건 제가 교수가 되기도 전 이야기니까요."
소소한 궁금증을 해소한 창공은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제 동료에게 들었던 말에 따르면... 포를렌탈 교수는 동키르케 지부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학계에 제출한 논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최근에는 연구비 지급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교수가 자기 일은 안 하고 이상한 것만 잔뜩 벌려 놓았던 건가. 확실히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기는 해."
"...어쨌든 계속할게요. 제가 들었던 바에 의하면 포를렌탈 교수의 행적은 상당히 의아한 면이 많아요. 조금만 더 실적을 쌓으면 정교수로 진급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 같거든요. 마법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일 텐데... 정석적인 길을 밟았던 마법 교수가 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던 걸까요."
"그건 지금으로선 모를 일이지. 어쨌든 모를 행동만 골라서 해대던 교수가 어느 날 갑자기 이곳 이스트리에서 실종됐다는 거지."
"네, 주인님."
그쯤에서 창공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륀에게 물었다.
"그리고 넌... 지금 포를렌탈이라고 하는 교수가 우리를 일부러 가로막기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
"...네. 역시 눈치채셨군요."
"눈치채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방금 네가 보인 경계는 마법사가 부리는 짐승들을 경계하는 행동이라며. 그리고 포를렌탈 교수는 그런 재주가 있는 마법생물학 교수고."
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우리의 여정은 지금 의도적으로 방해받고 있다. 둘. 표면적으로는 형제단이라는 깡패 조직의 변덕에 의한 우연이다. 셋. 실제로는 잉게 포를렌탈이 부리는 수작이다. 실종된 교수가 형제단과 붙어먹고 있다는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고."
"네."
"다음 의문. 만약 네 생각이 사실이라면... 포를렌탈 교수는 왜... 이전에. 어떻게 우리 여정을 알아차린 거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모르겠네요. 솔직히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추측은 좋아하지 않아요. 주인님도 그러시죠?"
"그리고 그 추측이 왠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상황은 더 좋아하지 않아."
"마찬가지예요."
두 남녀는 일제히 탄식을 내뱉었다. 여정의 키를 쥐고 있는 의문.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또 다른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 문제가 있다는 건 아는데, 그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비록 그렇다 한들, 한편으로 어떻게든 해결을 보아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길이 막혔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실 돌아갈 곳도 없다.
"너 정교수라며. 발언권 좀 있지 않아? 웨리 본부라던가 동키르케 지부에 연락을 넣어보는 건 어때."
"아마 제가 주인님께 말씀드린 내용은 저쪽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테지만... 어렵겠네요. 공개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마법사의 위신 때문에?"
"그런 셈이죠."
정교수는 아니지만, 일단 교수라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 가운데서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것으로 인정받는다. 게다가 포를렌탈 교수는 정교수 진급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부교수.
그런 교수가 일개 깡패 조직과 붙어먹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면 이는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과 그 집단인 웨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게다가 웨리의 대척점에 있는 거대 비국가 단체인 교단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사실 창공이 보기에는 이미 이스트리 교구도 형제단과 한패라는 심증이 있는 이상 그게 그거나 다름없었지만, 대체로 대중의 여론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섬세하지 않은 법이다.
"뭘 알아보려고 해도 공개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으니까..."
"공개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륀의 탄식.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그녀의 말을 되뇌는 창공.
"공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안 된다고 생각할 것까지는 없지."
"네?"
"륀. 다른 방에 가서 사람들 좀 로비로 내려오라고 그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