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이스트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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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은 여관 1층 로비에 앉아 방금 전 륀이 그랬던 것처럼 손안에서 담배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륀이야 당장 흡연하지 않더라도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지만, 그는 본래 그렇지 않다.
그의 평소 지론에 따르면 담배는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입에 무는 것이다. 이런 짓을 할 시간이 있으면 그럴 시간에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게 창공이라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에 처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법.
담배만 피웠다 하면 피를 토하게 된 창공이다. 자연스레 흡연 횟수는 줄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결국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흡연 욕구는 계속 머리를 맴돌며 그를 괴롭힌다. 당장 피진 않더라도 어떻게든 시야가 닿는 곳에 담배를 두고 싶다.
결국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이끌어 낸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손으로 애꿎은 담배를 괴롭히며 당장의 흡연 욕구를 참아내는 것. 마치 계속 그렇게 하면 니코틴이 피부로 흡수되기라도 할 것처럼.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도 안다. 사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게 창공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쓸데없는 행동임을 알면서 그것을 행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창공이 인간을 초월하지 못한 이상 결국 그 범주 안에 들 수밖에 없다.
이러고 있노라면 창공은 요새 부쩍 늘게 된 자기혐오와 망설임에 사로잡혀 홀로 괴로움의 늪을 헤매곤 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으면 응어리진 고통이 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나, 창공이 택하고 싶은 선택은 아니다.
애완동물에겐 야생의 감각이 남아 있어 자신이 아픈 것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어느 날 훅 간다고 하던가. 창공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자조했다. 혐오하는 동시에 철칙으로 삼아 온 부모의 가르침. 그리고 고슴도치처럼 타인에 대한 방어막을 쌓아올리게 만든 자존심.
그것으로 똘똘 뭉친 창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기실 얼마 전 륀에게 자신의 병세를 털어놓은 것조차 본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따스한 위로라던가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필요에 의한 행위. 누군가 하나는 알고 있어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대처가 가능하다는 안배.
자신의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담배를 보는 창공의 마음이 더욱 저 깊은 밑바닥으로 침전해 갔다.
'너나 내 신세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담배는 본래 자신의 몸을 불태워 흡연자에게 짧은 만족감을 주고 사라지는 존재. 하지만 그랬어야 할 담배는 지금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하게 사용되고 있다.
창공은 어떤가. 분명 어느 지경까지만 하더라도 확고했던 귀환에 대한 의지는 그의 목적을 형성했다. 그런데 죽음이 가시권에 들어온 지금, 도대체 이 일련의 행위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행위 자체로만 따져 보면 생존과 지구로의 귀환이라는 목적을 향한 길을 착실히 밟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럴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아무려면 어떻냐는, 나아가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그런 생각.
"병신같이 나약해졌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암울하게 전개되던 심상을 이러 저리 흩어냈다. 그를 어두컴컴한 무저갱으로 끌고 내려가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바람 앞의 담배연기처럼 덧없이 사라진다.
때마침 일행들도 하나둘씩 로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터라, 그다지 즐기지 않고 즐길 생각도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르게 탈피할 수 있었다.
"앉아요, 모두."
담배를 빠르게 주머니에 넣고 여유로운 표정과 자세로 겉모습을 고치는 창공. 일행들은 자리에 앉아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앉으란 말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이미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다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한 사람. 륀만은 탐탁지 않은 눈길을 창공에게 보내고 있다. 분명히 방금 전 포를렌탈 교수의 이목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었고, 창공 또한 충분히 이해한 줄로 알았는데 갑자기 이런 개방된 장소에서 회담을 여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할 거라면 방 안에 다들 불러 모아 놓고 의견을 나누는 게 좋겠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녀에겐 창공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다.
"다들 여기 부른 이유는... 사실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 보려고요."
"솔직히 우리 힘으로는 해결하기가 좀 곤란하지 않아?"
나유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가 알펜시아였으면 우리 왕님 찾아가서 억울하다고 통사정이라도 해 보겠는데 그게 아니니까. 그리고 여기 시청이고 교단이고... 아스터, 미안. 아무튼 다 한편으로 붙어먹어서 아우스트로 씨를 조지려고 하는 중이잖아. 글쎄. 우리가 그 사이에 끼어든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을까?"
"맞는 말이네."
창공이 피식거리며 나유의 말을 받았다. 지금 그녀의 말이야말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사실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뭘 하든 허튼짓이 된다.
"그럼 누구 좋은 생각 있는 사람? ...어, 택이 형."
"여기까지 와서 실망스럽긴 하지만 다른 델 가 보는 게 어때? 그 비타라는 곳에 가지 못하게 됐다면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밥만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어택이 내놓은 방안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전부 매몰비용이 되는 셈이지만 본래 매몰비용을 고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고가 아니던가.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다들 비슷한 생각?"
"오빠."
역경에 부딪혔을 때 남들처럼 돌아서 가지 못하고 굳이 정면돌파를 하려는 바보가 있다. 하필이면 창공의 일행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요. 그런 조직폭력배들의 불법 행위 때문에 일정이 방해받은 것도 방해받은 거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어딘가에 항의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디에 항의를 할 건데?"
나유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시청이라던가. 아니면 명목상으로 여긴 키르케 땅이잖아요. 그쪽 사람에게 투서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 생각해 봐요. 우리들은 알펜시아의 국왕이 직접 임명한 기사라고요. 좋든 싫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책임을 다해야죠."
"아린아.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수는 없어."
"우리와 봤고, 대화를 나누었고, 이름과 얼굴을 아는데도요? 최소한도라는 게 있잖아요."
"글쎄. 언니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 건가 싶어."
논쟁이 벌어지자 자연스럽게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남들의 시선이 몰린다. 륀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야. 고다."
"아... 네. 서 상."
"넌 왜 말이 없어. 뭐라도 의견을 좀 내 봐. 그러려고 이러는 거니까. 낼 만한 의견이 없으면 누구 말에 동의한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에,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히사시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가 다루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한 일이 아닐까... 또 남의 일에 주제넘게 끼어드는 면도 없잖아 있고 말입니다."
"그럼 너도 나유나 택이 형 말에 찬성?"
"동시에 김 상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네요. 어렵겠지만. 네. 멋지지 않습니까? 또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물러서면 조금은 분한 것도 같고. 때로는 분한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래서 어느 쪽이라는 건데. 애매하잖아."
"하하하... 저는 모두의 의견이 저의 의견이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너한테 뭔 의견을 들으려고 한 내가 잘못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그 다운 의견을 내놓는 것으로 입장을 마무리했다.
"아린 님의 의견이 일리가 있네요!"
'언제 나서나 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던 아스터가 뭔가를 결의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맞아요.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악을 더는 묵과할 수 없어요! 악에 대항하는 교단의 사제로서, 정의로운 아퀴탄 사람으로서! 게다가 성실하게 생업을 펼쳐가던 신도를 부정한 방법으로 억압하다니, 이런 걸 그냥 넘어가지 말라는 게 제가 받은 가르침. 반드시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으으...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제 이마를 탁, 치는 나유. 창공이 그 광경을 흥미롭게 쳐다보는데, 륀이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주인님. 이런 곳에서 떠들면 소문이 나 버려요..."
"야, 간지러워. 바람 불지 마."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창공은 슬며시 그녀를 밀어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결론을 내려는 듯한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물러나는 게 최고의 방법 일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엔 좀 아쉽지 않아요? 오랜만에 정의로운 일 한 번 해 봅시다."
"오빠...?"
예상치도 못했다는 목소리. 자길 지지하는 모양새였으니 기뻐해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아린은 솔직히 조금 황당했다. 그야 창공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이걸 그냥 넘어가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창공은 그딴 것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청산유수를 이어갔다.
"아린아. 넌 나유 데리고 시청에 가서 항의해. 지금 이스트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냐고. 아는데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면 그게 맞는 자세냐고 말이야. 아, 뒷돈 받아먹었다고 했지? 알펜시아의 기사 작위를 앞에 내세우면 단순한 외부인의 항의로는 대하지 못할 거야."
"아... 그..."
"나유야. 너도 옆에서 거들어. 솔직히 화 안 나? 나쁜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둘이서 시청을 뒤집어 놓고 오란 말이야. 아예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선만 안 넘으면 함부로 너흴 대하지 못할 거야."
"으응..."
"아스터. 이 길로 당장 이스트리 교구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해. 신실한 신도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말이야. 정 해결할 의지가 보이지 않거든 교황청에 직접 연락을 띄우겠다고 압박을 넣어. 내가 말 안 해도 그렇게 하겠지만.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어."
"창공 님...! 전 믿고 있었답니다!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서실 것이라고요!"
아스터야 감격을 하건 말건, 창공은 다음으로 어택과 히사시를 바라봤다.
"택이 형. 고다. 둘은 이스트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형제단이라는 놈들에 대해 좀 더 알아봐요. 당장 주먹이 무서워서 쉽게 말해주진 않겠지만 보호비를 뜯기고는 있지만 좋아서 내는 건 아닐 테니까 정보를 얻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을 테고."
"알았어."
"서, 서 상... 괜찮겠습니까?"
이미 창공이 결정한 사실에 토를 달지 않는 어택과 망설이는 히사시. 그러거나 말거나 창공은 말을 마무리했다.
"난 륀과 둘이서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 대기하는 걸로.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여관에 돌아와서 도움을 요청해요. 하나나 둘이서 안 돼도 셋넷이면 가능할 테니까. 질문 있는 사람? ...음, 네. 사실 간단한 일이니까 질문할 것도 없지. 그럼 출발."
누군가는 후련한 미소를, 누군가는 결의에 찬 눈빛을, 누군가는 애매모호한 망설임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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