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이스트리 (6)
* * *
"이거 봐요. 시청에서 일하는 분들의 급료는 어디에서 오죠? 시민들의 세금 아닌가요? 시민들이 착실히 벌어서 납부하는 세금으로 먹고살면 마땅히 시민들을 위해서 일해야죠! 지금 아우스트로 씨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알고나 계신가요? 네?"
"여, 여사님. 그것이..."
"이스트리가 어디 이름 없는 도시도 아니고 빛나는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잖아요! 그런 곳의 시청에서 근무하면 자부심을 가지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셔야죠! 무법천지에나 있을 법한 일이 지금 이스트리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말씀 좀 해 보세요!"
"으으음...!"
이스트리의 중심가에는 하얀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하나 있다. 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그 아름다운 모습 덕분에 키르케 동부, 혹은 이스트리에 간다면 꼭 보아야 하는 명소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데 오늘 고풍스럽고 차분하던 시청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발단은 시청에 찾아온 두 여인. 처음부터 알펜시아의 기사라 자신들을 소개한 그녀들은 아우스트로 수협이 겪고 있는 고충을 알고나 있냐며 거센 항의를 퍼부었고, 시청 직원들에겐 때아닌 홍두깨나 다름이 없었다.
"상납금이라니요! 상납금! 공무를 담당하는 시청의 직원이신데 부끄럽지도 않으신가요? 세금을 거둘 권리는 관청에 밖에 있지 않아요! 혹은 권한을 위임받은 징세청부업자라거나요! 도시의 폭력배들이 그런 권리를 위임받은 적이 있나요? 이스트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이지, 폭력과 협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범죄자들의 도시가 아닐 텐데요!"
"여사님! 말씀이..."
"부끄러운 줄 아세요!"
속사포처럼 공무원들을 몰아치는 아린.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뿜어져 나오는지 몰라도, 그녀는 지금 앞에 있는 십수 명의 공무원들을 기세로 제압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고서야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 자신을 향한 비판 앞에서 어찌 당당할 수 있으랴.
게다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키 172cm. 다이셀리시아 남성 평균 키를 뛰어넘는 당당한 모습. 나유가 허리에 칼을 차고 팔짱을 낀 채 사방을 노려보는 모습은 무언의 압박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그녀도 창공의 말에 따라 아린의 옆에서 뭔가 거들려 했지만, 지금 아린은 나유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대신 그녀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것은 제대로 먹히는 중이다.
거기에 시청 안에서 민원을 처리하던 시민들은 직접적으로 끼어들지는 않아도 어딘가 시원하다는 얼굴로 아린과 나유를 바라보았다. 이스트리의 사람들은 대대로 같은 도시에서 살아왔으니 대체로 이웃들과 사이가 친밀한 편이다.
설령 아우스트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없을지라도, 그들의 친지들 중엔 어쩔 수 없이 형제단에게 상납금을 납부하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던 것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함부로 소리 내어 말하는 자 없었으나, 그들은 항상 불만이 있던 차에 마치 자신들을 대변이라도 하듯 저렇게 소리 내어 외쳐 주는 아린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 * *
그리고 이스트리의 한 여관. 두 남녀가 같은 방안에 있다. 한 명은 가만히 앉아, 또 한 명은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다 뒤엎고 있겠네."
창공은 의자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물고ㅡ불은 붙이지 않은ㅡ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게는 시청과 교구. 그리고 이스트리 곳곳. 처음에는 미약했을지라도, 지금쯤 창공 일행에 대한 소문이 이스트리 곳곳으로 퍼지고 있으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벌이는 일이죠?"
"담배 말리면 피워. 신경 사납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앉아."
짜증을 내는 륀. 하지만 창공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뻔뻔하게 자리를 권한다. 그녀는 잠시 창공을 쏘아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그가 시킨 대로 얌전히 앉는 수밖에.
"이스트리의 시민들이 우리 행적을 다 알았겠지."
"시민들뿐일까요! 지금쯤 형제단도 우리에 대해 알아차렸을 거라고요! 어쩌면 포를렌탈 교수까지도!"
"진정해.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 내지 말고. 뭐... 나도 그런 면이 있지만."
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창문 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활짝 열어젖혔다. 잠시 륀이 아연실색을 했으나, 곧 체념한 듯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죠? 목적이 뭐예요?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납득이 안 가는데요!"
"내가 언제부터 네가 납득 가는 행동만 했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
그녀의 두 손이 치맛자락을 가득 움켜쥐었다. 화를 참아내는 듯한 몸짓. 잠시 동안 륀을 말없이 지켜보던 창공은 곧 기침을 시작했다.
"아, 젠장."
입을 가렸던 손을 슬쩍 훑어본 창공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휘휘 내젓는다.
"이젠 남들 앞에서 담배도 못 피우겠네."
"말 돌리지 마세요."
"너 자꾸 개긴다? 또 따먹어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하나?"
"...본론을 말해요."
"그래."
거리로 꽁초를 던진 창공은 창문을 닫고 륀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침대에서."
"무슨. 앗...!"
"매일 아침마다 관장한댔지?"
"지금 이럴 때가... 놓으세요!"
"싫어."
륀은 침대에 강제로 눕혀지면서도 발버둥을 쳤지만, 옷을 벗기는 창공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차례차례 벗겨지는 옷들. 셔츠며, 스커트, 속옷은 마치 그렇게 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저 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진다.
"그만! 그만...!"
"더 발버둥 쳐 보던가. 강제로 하는 것도 재밌네."
* * *
"우와, 진짜 아린이 대단하더라고. 시청 그놈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대면서도 아무 말 못 하는 게 아주 그냥... 하긴 지들이 뭐 어쩌겠어. 받아먹었다는데. 할 말 없지."
그날 저녁. 일행은 다 같이 로비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 같은 나유의 말에 아린은 머쓱한 기색이었지만 나서서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실은 간만에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 아린이었다.
"교구 쪽은 어땠어?"
"네, 창공 님. 아주 강하게 항의했어요. 신실한 신도가 핍박당하고 있는데 성직자들이 무시해선 안 된다고요. 만약에 조치가 없으면 신앙교리성에 정식으로 신고를 넣겠다고 했죠. 다행히도 제 말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답니다."
창공은 아스터에 말에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마 무시당하겠지. 그런 말로 될 것 같았으면 진작에 나섰을 테니까."
"음... 그래도 전 형제자매들을 믿고 있어요. 분명 무슈 아우스트로의 고충을 해결해 줄 거라고요. 교단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고 교육받으니까..."
"글쎄, 세상이 항상 이상적으로 돌아가지는 않지. 어쨌든 수고했어. 둘은 어디에 갔어요? 시장?"
이번에는 어택과 히사시의 차례였다.
"확실히 예상했던 대로 언급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 상납금이 짜증 나기는 해도 생계에 타격을 주는 정도는 아니니까 괜한 위험부담은 사양한다는 거겠지. 그래도 몇 사람은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
"얻은 정보는?"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 상. 그냥 그놈들 참 나쁜 놈들이라는 비난밖에..."
"하긴 일반인이 조폭들 돌아가는 꼴을 자세히 아는 게 더 신기하겠다. 어쨌든 둘 다 수고했어요."
말을 끝마치고 빵에 버터를 바르던 어택은 륀의 안색을 살피더니 다시 창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창공아. 너랑 륀은 둘이서 뭐 했냐?"
"마음의 대화."
"아이고."
어택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넘어가기도 참 애매했다. 륀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웠던 것이다. 마치 '나 무슨 일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색.
"그거랑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서로 논의도 하고."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그건."
창공이 대답하려던 순간, 가만히 있던 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건 아니야. 틀렸다고. 이런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아... 진짜."
순간적으로 탁자의 분위기가 내려앉는다.
"그럼 네 결론은 뭐야? 그냥 떠나자고? 너는 연구만 하면 되겠지만 우리는 아니야."
"이러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이미 문제는 생겼어. 배가 못 뜬다니까? 자꾸 짜증 나게 하지 마."
"지금 당신 모습이 어떤지 알아? 세워두었던 계획이 흐트러져서 괜히 고집 피우는 사람으로밖에 안 보여. 안 그래?"
"야."
"너무 몰아치고 있어. 그까짓 계획 좀 수정하면 어떠냐고. 일행들 아무도 당신 우습게 안 봐. 한 번 가기로 정했으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고집은 당신하고 안 맞아."
"그래? 언제부터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았지? 넌 시간이 무한정 있는 줄로 알지?"
이쯤 되자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은 물론이고,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창공과 륀에게 쏠렸다. 결국 보다 못한 일행들은 둘을 뜯어말렸다.
"창공아. 다른 사람들도 다 보고 있잖아."
"교수님. 교수님. 참으세요. 진정을..."
그렇게 폭발하기 직전의 분위기는 간신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창공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륀과 단둘이 이야기하길 청했고,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일행은 테이블을 떠나는 둘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지만 그저 그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모르지."
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걱정돼요."
"뭐가."
"뭐랄까... 요새 부쩍 무뚝뚝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말에 나유와 히사시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창공이는 원래 저랬는데?"
"제 말은, 더 그렇다는 거죠. 담배도 안 피우고."
담배 이야기가 나오자 어택과 나유의 눈빛이 살짝 변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는 하네. 자기 혼자 한다고 하던데."
"근데 아린아. 너 창공이가 담배 안 피우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금연 결심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건 그러네. ...에이씨, 몰라. 밥이나 먹자."
남겨진 다섯 사람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비어버린 두 자리의 주인들에겐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하지만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짜아아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