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23화 (123/178)

〈 123화 〉 이스트리 (7)

* * *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륀의 고개가 돌아가 있다. 뺨에는 빨간 손자국.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창공이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

한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선 륀. 벽을 바라보고 있어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공. 이제 볼일 없다는 듯 천천히 테이블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얼굴은 완벽하리만큼 표정이 없었다.

"밥들 먹어."

"차, 창공 님..."

"먹으라고."

그는 자신에게 충격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일행들에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창공과 륀을 제외한 일행들은 륀에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할 뿐이다.

"..."

그런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어택은 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고개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얻어맞은 뺨에 손을 대고 위태롭게 선 채다. 지금이라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괜찮."

탁!

륀은 어택이 위로하려 뻗은 손을 거세게 쳐내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손에 쥔 모습으로 나타나... 그대로 여관을 나가버렸다.

"나도 먼저 올라갑니다."

그쯤 되자 창공도 먹던 그릇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름 분위기 괜찮던 식사 자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길 잘만 가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스터 상... 그..."

"저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입으로는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아스터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아무리 최근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곤 해도 륀은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가족이다. 언니의 뺨을 때린 창공이 원망스럽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이유가...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창공 님이 이유도 없이 저러실 리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합리화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이건 분명한 이상 사태다.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아린이 받은 충격이 컸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창공은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거나 화가 난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간혹가다 냉혹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계산 뒤에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창공이다. 충동적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이제껏 여러 번 아린과 창공은 서로 말다툼을 했고 의견이 충돌하던 때도 많았지만, 그중 단 한 번도 그녀는 창공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댈 것 같다는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는 깨지지 않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신뢰가 깨져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무참히.

"제가 보러 다녀올게요."

"아, 아린아. 아린아!"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마 안 돌아올 테니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아린은 나유의 만류를 뿌리치고 창공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일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알아야 했다.

'게다가 요새 오빠가 너무 이상해. 교수님 말대로... 어딘가 변했어.'

어쩌면 지금 창공은 혼자만의 시간을 원할 수도 있고, 아린에게 칼같이 축객령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을 두드릴 사람이 바로 아린이기에... 그녀는 무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창공의 방으로 향한 것이다.

"후우..."

똑. 똑.

한 번의 심호흡 뒤, 두 번의 노크.

"오빠. 저예요.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들어가도 될까요?"

"..."

대답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문에 귀를 대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린은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들어갈게요."

꾸중을 듣는 것을 각오하고 문을 열었지만, 의외로 창공은 아린의 막무가내를 그냥 받아주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제 팔을 베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은 아린은 걸음 조심히 살금살금 창공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그대로 가장자리에 걸터 앉는다.

"..."

둘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방안은 오로지 창공과 아린의 숨소리뿐. 순식간에 평화가 깨어졌던 로비와는 달리, 이곳엔 평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세를 낮추어 창공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끌어안거나 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짐승 다루냐?"

"네?"

창공의 입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사로잡은 짐승 안 놀라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잖아. 눈은 안 가릴래?"

"...오빠는요. 맨날 그렇게 비꼬면 속 시원해요?"

"그래서 내가 여름에 강해."

"딴 소리 하지 말고요. 안 웃기니까."

"오늘 같이 잘래?"

"여자 함부로 때리는 남자는 싫어요."

"그럼 남자는 때려도 돼?"

"그런 남자도 싫어요. 오빠. 도대체 왜 그래요?"

그는 대답 대신 갑작스레 그녀를 잡아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아...!"

단단히 쏘아붙이려 쌓아올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기였다. 아린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장소.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이 행복의 바다에서 허우적댈 때가 아니었다.

흩어지고, 무너지는 마음을 다시 단단하게 재구축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이런다고 그만둘 것 같아요? 오빠가 원하는 건 절대로 안 해 줄 거거든요!"

아린은 자신의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는 단단한 감촉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허리를 꾹꾹 눌러댔다. 이런 대화 따위는 집어치우고 당장 아린을 범하고 싶다 외치는 듯이.

창공이 아린을 탐하는 것처럼 아린도 창공에게 안기고 싶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게 뭐야."

이쯤에서 장난을 그만두겠다는 뜻인지 아린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버린 창공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가 되어 질문했다.

"교수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결국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아닌가요? 오빠가 마음에 안 드는 일 있다고 다른 사람 때리고...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나도 사람이야."

"오빠라는 사람은 안 그래요. 그거 알아요? 만약 오빠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으면, 전 이제까지 따귀를 맞아도 열 번은 넘게 맞았을걸요."

"자랑하냐?"

"아뇨! 오빠. 요새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말해 줘요. 함께 고민해 봐요. 오빠가 걱정돼서 그래요. 나 입 무거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네?"

"문제는 너한테 있는 거 아닌가?"

"무슨..."

아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나랑 마지막으로 잔 지가 언제지? 한 달쯤 됐나. 그 뒤로 계속 거절하고 말이야."

"말했잖아요. 몸이 좋지 않다고요."

"한 달 내내?"

"네! 한 달 내내! 이젠 마음도 편하지 않아요. 오빠 때문에! 말하기 싫죠? 자꾸 말 돌리려고 하는 거 보니까 오빠는 지금 말하기 싫은 거야."

"아린아."

"이러다가 교수님이 우릴 완전히 떠나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물론 오빠도 함부로 손을 대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텐데. 지팡이까지 들고나갔잖아요."

"나 잔다."

"오빠?"

"..."

그는 아린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린은 길고 긴,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의 한숨을 내뱉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보 멍청이."

* * *

륀은 다음날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가운데, 오직 창공만이 원래 일행은 여섯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모두가 모였지만, 이런 형편이니 쉽사리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사실 대다수는 오늘의 일정보다는 륀의 행방에 대해 더 신경 쓰였고, 어떻게 보면 그게 정상이었다.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처럼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은 뭐... 어제처럼 힘 뺄 건 없고. 포구에 한 번 더 가는 걸로 하죠."

"...포구?"

항상 기운이 넘치던 나유의 목소리가 오늘은 병자의 그것처럼 들린다.

"뭐 그렇지. 우리가 어제 이스트리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잖아. 그게 효과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있을까...?"

"모르지. 혹시 알아? 무슨 드라마틱한 일이라도 생길지? 집 나간 사람이랑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들 문제없죠? 말 없으면 동의하는 걸로 알게요?"

이렇게 일행은 다시금 조합으로 향했다. 활기찬 시장, 활기찬 부두를 지나는 동안 축 처진 일행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의 자신들이 마치 파티에서 홀로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 같아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3번 부두.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을씨년스러운 그곳에 들어선 순간에야 조금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단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오늘에서야 그 심오한 이치를 깨닫는 것 같았다.

깨달음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계십니까?"

창공은 아우스트로 수산 협동조합 건물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조합장을 찾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 상. 아무래도 나오는 의미가 없으니 지금은 집에 계신 게..."

"그랬으면 아예 문을 잠가 놓았겠지. 어디 잠깐 나간 게 아닐까. 조금 기다리죠!"

뻔뻔스럽게 의자를 하나 찾아 덥석 앉는 창공. 나머지 일행들도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 적당한 자리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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