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이스트리 (8)
* * *
"창공아. 나 택이 오빠랑 한 대 하러 갈 건데."
"다녀오던가."
"...그래."
창공은 나유의 제안을 가볍게 물리치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정체 모를 리듬을 탔다. 일견 서운한 눈빛이 된 나유였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와 어택은 조합 건물을 말없이 나섰다.
아우스트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일행이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은 여의치 않은 듯했다. 20분이 지났을까.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는 하나 문을 잠그지도 않고 어디에 잠시 들르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다.
"오빠.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창공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아린이 나서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는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반응할 뿐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더 있나?"
"그래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잖아.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그냥 쉰다고 생각해. 야. 너희들은 내가 뭘 해도 걱정이고 안 해도 걱정이냐?"
"그건 아니고요."
"그럼 됐잖아."
아린은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평소 창공의 태도와는 다른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ㅡ요새 그런 경향이 있긴 하다ㅡ그렇다고 결심을 쉽게 뒤바꾸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별도리가 없다. 결국 자리로 돌아가 명상이나 하는 수밖에.
아스터야 시간이 남으면 기도를 올리는 신실한 사제였고, 실제로도 그녀는 지금 두 손을 맞잡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죽어나는 건 별다른 취미가 없는 히사시일 뿐이다.
"나도 담배나 피울까..."
"히사시 씨는 생각도 하지 마요."
"넵."
결국 그의 소소한 반란은 아린에게 간단하고도 무참히 진압당했다. 이윽고 담배를 다 태운 나유와 어택이 다시 조합 건물 안으로 들어왔는데,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 일어나는 법을 까먹은 것 같던 창공이 너무나 간단히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어디 가?"
"한 대 태우러."
황당한 얼굴로 창공을 바라보는 나유. 이럴 거였으면 방금 같이 피우러 갔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간단히 그녀를 지나쳐 건물을 나섰다.
짭짤한 내음이 물씬 올라오는 바닷바람. 갈매기 태우는 소리. 푸른 바닷물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항구는 연초 태우기 딱 좋은 곳이다.
그렇게 부두 끝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
목에서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칼날에서 반사되는 빛이 눈을 괴롭혔다.
"베어버리는 수가 있다."
"원하는 게 뭐야?"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지만, 창공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릴 뿐... 일상 대화를 하듯 입을 놀렸다. 사실 뒤에서 찌르지 않고 목에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그 목적이 살인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다.
그걸 아는 것과 알고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건 지극히 별개의 문제지만.
"투항."
"투항하지."
시원스러운 대답. 하긴 투항하지 않으면 죽을 텐데 별도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그가 뛰어난 궁수라도 이런 때엔 손을 쓸 수가 없다.
"네 똘마니들도 전부."
"똘마니는 아니지만, 아마 투항하겠지."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나?"
"형제단 아니야?"
"...조합 안으로. 어서."
깔끔한 정답이었다. 창공의 목에 칼을 들이댈 사람이야 떠오르는 후보군이 몇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스트리에서라면 귀찮게 굴었던 형제단이 제일 유력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는 순순히 제압당한 채 조합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나 혼자 온 것은 아닌 듯 험악하게 생긴 덩치들이 건물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누구야!"
"무기 들어!"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어택 덕분에 맞대응은 빠르게 한 모양이다. 나유와 어택의 무기에서 발산하는 마나의 빛을 본다면 쉽게 대들지는 못하리라. 동네 조직폭력배가 마나 유저에게 대들 수는 없으니.
다만... 인질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오빠!"
"창공 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창공이 나타나자, 일행들이 단번에 경악했다. 비명과 함께 나유의 노호성도 들려온다.
"당장 풀어 줘!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새끼 목숨은 없는데?"
창공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 순간적으로 아린이 악기를 찾아 손을 꿈틀댔지만, 그녀의 칼란드라는 여관에 있었다.
"역으로 제안하지. 모두 무기를 버려. 아니면... 알지?"
"씨발... 비겁한 새끼들..."
욕설을 내뱉는 나유였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손에 든 칼을 땅바닥에 내려놓는 수밖에. 그녀를 시작으로 다들 저항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만약에 사로잡힌 사람이 창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바뀌었을까.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모든 일행의 머리에 포대가 씌워지고, 묶인 채 어딘가로 끌려가게 되었으니까.
* * *
"에휴..."
히사시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창살이 달린 창문 너머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족히 3m는 되는 곳에 달린 창문이라 바깥을 확인할 길이 없다.
알 수 있는 최소한의 사실. 이곳은 감옥이었다. 아니면 감옥 비스름한 곳이라거나. 사실 깡패들이 그럴듯한 감금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창문이 달린 벽의 반대편. 본디 다른 벽이 있어야 할 곳은 역시 창살로 가로막혀 있었는데, 바깥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괜히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오빠는 걱정도 안 돼요?"
"걱정하면 뭐가 되냐?"
아린은 너무나 뻔뻔한 창공의 태도에 기가 차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오빠..."
"다들 조용히 해 봐."
바로 그 순간, 어택이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누군가 온다."
그의 말대로 어두컴컴한 저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구두로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을 밟는 소리.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다면 착각일까.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둠을 뚫고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륀 퐁파두르. 어제 짐을 챙겨 여관을 떠났던 그녀였으니까.
"교수님!"
안도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아린.
"구해주러 오신 거죠!"
"..."
하지만 륀은 담담한 얼굴로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교수님...!"
"야. 소용없어. 보면 모르겠냐?"
창공이 차갑게 말했다.
"왜 저년이 우리랑 다르게 창살 밖에 있는지?"
"에트로지 주제에 말이 험하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다른 목소리. 그것의 주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퐁파두르 교수. 저런 하잘것없는 남자 따위 당장에라도 죽여버리는 게 어때?"
새로이 나타나 아름다운 얼굴로 아름답지 못한 소리를 내뱉은 여자는 륀과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뿐인가. 오른손에는 나무로 만든 지팡이까지.
"당신도 마법사인가요?"
"응."
아스터의 질문에 마법사... 잉게 포를렌탈 마법 생물학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에트로지가 아닌 것 같네. 교단의 사제?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희들은 전부 퐁파두르 교수의 포로들이거든. 교수가 너희의 죽음을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될."
"그, 그런... 교수님! 설마 그건 아니겠죠!"
히사시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에도 륀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채 파이프만 뻑뻑 피워대고 있다. 지독하리니만치 무심하게. 그 모습에 잠자코 있던 나유가 분노를 쏟아내었다.
"개 같은 년... 결국 한다는 게 이거야? 이 더러운 배신자!"
"..."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간곡한 외침이 닿은 것일까. 긴 연기를 내뿜은 륀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평소 얼음 위에 구슬 굴러가듯 또박또박 청량한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얼음 그 자체인... 차갑기만 한 목소리.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뭐...?"
"애초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웨리의 정교수가 우스워? 당신들 에트로지 따위가 함부로 대할 내가 아니란 말야. 주제를 좀 알아."
상상하지도 못한 폭언. 분노에 물들어 있던 나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황망함으로 가득 찬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다른 일행들도, 동생인 아스터도 마찬가지. 오직 창공만이 륀을 차가운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배신이라니. 착각 집어치워. 난 당신들의 동료도 아니었어. 오로지 당신들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실험 결과만을 원했을 뿐. 하지만 이젠 그게 다 부질없게 되었지. 감히 내 뺨을 때리다니. 당신 말이야."
창공은 그저 차갑게 웃어 보였다.
"화가 났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도움이 될 법한 충고를 하려고 했어. 내게 그런 식으로 대할 줄은 몰랐지만."
"교, 교수님... 그건."
"닥쳐."
차갑고 날카로운 륀의 언사. 아린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에게 발언권은 없어. 조용히 들어.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하.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아스터. 이제 좋겠네? 연적 하나가 떨어져 나가서? 하지만 명심해. 그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걸. 남나유. 천박한 언사는 고치는 게 어때?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등에 칼이 박혀도 원망할 구석이 없으니까."
"언니..."
"서창공...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지만, 짐승이 잘못했다고 혼낸들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창공은 평소 자신의 특기인 비꼼 따위는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륀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그녀는 다시 한번 파이프를 길게 빨아들였다.
"죽일 가치도 없어. 이스트리를 떠나.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