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이스트리 (9)
* * *
륀의 배신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본인은 동료가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관계였기에 계약 해지일 뿐 배신도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엄연히 별개인 법. 그래도 한동안 같이 먹고 자고 한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뚝 떨어지는 것은 어렵다.
사실 그녀가 여관을 뛰쳐나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창공이 함부로 대한 것이 크겠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게 자기가 못한 것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것을 더 크게 생각하는 법이다. 거기에 평소 탐탁잖게 보는 사람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마치 지속적으로 화를 분출하는 나유처럼 말이다.
"와... 어으, 어으! 돌아버리겠네, 진짜!"
감옥에서 풀려나ㅡ위치를 모르게 한답시고 다시 머리에 포대가 씌워진 채로ㅡ여관으로 돌아온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창공의 방에 한데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배신의 충격이 큰데 어떻게 정상적인 논의가 가능하겠는가. 결국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현 상황에 대한 개탄과 륀에 대한 성토뿐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주로 나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이런! 세상에, 지금까지 저런 년을 내가 동료라고... 으아악!"
"나, 남 상... 진정하세요. 일단은..."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 히사시 씨도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좀!"
"저는... 그..."
반면 히사시는 상당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이번 일의 책임이 창공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쪽.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라도 하면 당장에 두 동강을 내어 버리겠다는 눈빛을 쏘아 보내는데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까.
결국 입을 다무는 수밖에.
"택이 오빠도! 왜 말이 없어?"
"나유야. 그쯤 했으면 됐잖아."
"아니 뭔."
"언니!"
가만히 있던 아린이 나유를 부르며 끼어든다.
"그만해요. 이제 충분하잖아요.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넌 화나지도 않아?"
"..."
아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어리둥절해진 나유가 그쪽을 따라 바라보는데... 그곳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스터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게... 난..."
"죄송합니다..."
그랬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당황스럽고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스터. 최근 관계가 어찌 됐건 친족이라는 건 쉬이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유도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추었다. 이제까지 욕해 놓고 사과한들 무엇하며, 미안해한들 무엇할까.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뿐.
"킥킥..."
바로 그때. 방 안에서 작게, 하지만 선명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때에 웃는 미친 감성의 소유자가 누군가 다들 고개를 들어 찾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럴 만한 사람은 역시 창공밖엔 없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흘리는 창공. 그나마 폭소를 터뜨리지 않는 점은 자제했다고 보아야 할까. 어쨌거나 다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어택이 나서서 그를 말렸다.
"창공아. 너 왜 그러냐."
"큭... 아니, 아 웃기잖아요. 킥키킥..."
"....하아. 정신 차려. 네가 이러면 우린 어떡하냐."
"잠깐. 잠깐만요. 큭큭큭... 하, 씨. 참는 것도 힘드네. 아니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기지."
"오빠."
아연실색하는 아린.
"미쳤어요?"
"미칠 것 같아. 잠깐만."
"솔직히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도 이 일에 책임이 있잖아요. 아뇨! 오히려 크죠!"
"하하... 네 말이 맞다, 그래. 내 책임뿐이겠냐. 륀 책임도 크지. 우리 둘이서 저지른 일이니까."
"뭐라고요?"
순간, 창공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아스터. 그만 울고 고개 들어. 물어볼 거 있으니까."
"네... 네...?"
"전에 분명히 들었어. 사제들도 고대어에 대해 배운다고. 맞아?"
"네에... 경전이 고대어로 쓰여 있는 데다 의식 집전도 전부 고대어로 하니까요..."
갑작스레 달라진 그의 태도에 다들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창공에게 계획이 있다고. 아니면 뭔가 계획이 있었거나. 그가 진지한 얼굴이 되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딱 두 가지뿐. 진지한 말과, 남을 비꼬는 말. 적어도 후자는 아니었다.
"나유야."
"어, 응...?"
"저기 구석에 보면 양피지랑 깃펜 있어. 잉크랑. 이리로 다 가져와 봐."
"어... 그래."
흡사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윽고 필기구가 아스터의 앞에 놓인다.
"내가 하는 말 받아 적어. 준비됐어? 음..."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네...?"
"받아 적으라고."
감옥 안에 갇히고 륀이 그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아스터는 멍한 표정으로 창공의, 언니의 말을 받아 적었다.
"네. 다 적었어요."
"이제 그걸 고대어로 바꿔 봐. 할 수 있어?"
"잠시, 잠시만요... 네."
[Ennon gratias ago quod de spatim non anteficio?]
그녀는 어렵지 않게 변환 작업을 마쳤다.
"창공아. 이게 무슨."
"다 끝나고 말해 줄게. 다음 문장. '애초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Duid me en fribis censes.]
"네."
"웨리의 정교수가 우스워?"
귀신에 홀린 듯한 분위기였다. 일행들은 숨죽인 채, 일말의 기대를 품고 창공과 아스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쩌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창공의 계획일지도 모른다고. 륀은 배신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이 행위를 방해하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헝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멍하니, 한편으로는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이걸로 끝. 다 됐어?"
"네. 하지만 이게 대체..."
[Ennon gratias ago quod de spatim non anteficio?
Duid me en fribis censes. Astne codipolos fupecer Veri? Non sem dui te ut Etroge tractet. Scire de epsim.
Et proditione? Xalli pallediam. Illega tues non arem. Tentum farimantales avuntus volui, dui be te paxime pissant. Sed nunc omne inutile est. Duomodo audes me in os plaudere? Eco tibi.
Letas sum, sed finsoloam dare conatus sum ut be edauveret. Ego nascilitem te kelam me practare...]
"이제 그 문장들의 앞 글자만 따서 늘어놓아 봐."
"네..."
아스터는 조심스럽게 한 글자씩 따서 여백에 적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다.
[EDANSEXFITSDELENSVAPENDECOMEPON]
"어때? 뭔가 보여? 단어나, 문장. 제대로 적었다면 중간에 끊는 부분이 있을 거야."
"잠시... 잠시만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글자들의 조합. 손가락을 살짝 물고 고민하던 아스터는 이내 망설임 없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Edams ex fitsde. Lens. Vapen de com epon.]
"이... 이게..."
"해석은?"
"시장의 저택. 기다려라. 초대한 자들이 온다."
"하..."
그제서야 창공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기다려왔던, 혹여나 실패할까 온 신경을 썼던 일이 기어코 일어난 것을 본 사람처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설명을 원했다.
"창공 님! 이게 대체..."
"오빠...! 그럼 교수님은 배신한 게 아닌 건가요?"
"야, 너..."
"서, 상! 뭐라고 말씀을!"
잇따른 재촉에도 말없이 일행들을 바라보던 창공은 삐뚜름한 미소를 입가에 희미하게 그렸다.
"가장 원할 법한 대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거 나랑 륀이랑 짜고 친 겁니다. 배신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아...!"
"아니 그걸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그를 향해 무수히 쏟아지는 비난과 한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가책을 느끼고 있다 하기에는 너무나 뻔뻔한 기색이었다.
"미리 말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리얼한 반응이 나오죠. 아닌가? 분명 누구 하나는 티가 났을걸요? 그리고 다들 조용히 좀 해요.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았지만,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제서야 살짝 만족한 표정을 지은 창공은 다시 한번 창문과 문가를 확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지금 형제단을 이끌고 있는 자는 마법사일 거라고 우리 둘은 추측했습니다."
"마법사라니..."
"쉿. 그것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 동물을 다루는데 능숙한 마법사. 글쎄요. 왜 그런 마법사가 갑자기 깡패들과 붙어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잡아다가 족쳐 보면 알겠죠. 그리고 아마 우리 일정을 방해하려고 계획을 꾸민 자도 그 마법사라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고요. ...뜬금없죠?"
"응."
"그래도 그냥 들어."
이게 서창공이라는 사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