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이스트리 (10)
* * *
"그만...! 그만...!"
"더 발버둥 쳐 보던가. 강제로 하는 것도 재밌네."
륀을 침대에 눕힌 다음 손목을 붙잡는데 성공한 창공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점점 고개를 숙였다. 한데... 륀의 입술로 향하는 것 같던 그의 입이 슬며시 방향을 틀어 귓가에 바짝 붙는다.
"강간당하는 척해. 창문 살짝 열어놨어. 그 틈새로 다 들리도록."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만하세요! 제발!"
"만약 우리 추측대로라면 정면 승부는 어려워. 조폭들에, 마법사에, 교구... 관청까지 다 한통속이라는 거니까."
참 기묘한 광경이었다. 여자의 옷을 능숙하게 벗기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귓가에 전혀 다른 말을 속삭이는 남자. 입으로는 필사적으로 남자를 거부하면서도 옷을 벗기기 쉽도록 몸을 살짝씩 들어 협조하는 여자.
"결국 이럴 때엔 머리를 단숨에 쳐내는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지. 다른 말로 포를렌탈 교수를 잡는 거야. 그런데 그것도 우리 단독으로는 어려워. 어떻게 잡는다 쳐도 놈들이 무마시켜버릴 수가 있거든. 예를 들면 시청에서 꼬리를 자르면서도 수협에 대해서는 적당한 이유로 행정적 제재를 가하는 거랄지. 따라서 중요한 건 증인을 확보하는 거야. 그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나도 원래 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증인인데 여긴 그게 아니라 조금 슬프네."
"이런다고... 이런다고 제가 굴복할 것 같아요? 당신 같이 비겁한 남자에겐... 흐윽...! 아, 아파요!"
가슴을 꽉 움켜쥐니 륀이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쳐든다. 눈 감고 듣노라면 절로 강간당하는 여인이 떠오르는 훌륭한 연기.
"또 하나. 교수를 잡으려면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려야 해. 머리 좋은 마법사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문제는 교수의 본거지를 모른다는 거야. 확실한 실력을 갖춘 증인들과 함께 교수가 있는 곳을 들이쳐 생포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우리 문제는 해결되겠지."
"거긴... 거긴 안 돼요... 제발...! 아흐으윽..."
"입꼬리 올라간다. 표정관리해. ...그래서 난 나와 사이가 틀어진 네가 놈들에게 붙길 바라고 있어. 자존심 높고 고아한 마법 교수가 일개 이방인에게 강간당했다면 일행을 배신하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창공의 밑에 깔려서 쉴 새 없이 유린당하는 륀. 순백의 팬티 속에서 남자의 손이 꿈틀댈 때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무의미한 몸부림을 친다. 치욕을 감내하는 듯 꽉 깨물린 입술이 애처롭다.
실상은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보면 륀의 감성도 보통은 아닐지 모른다.
"물론... 난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하나 더 생각한 게 있지. 우리가 오늘 생난리를 피워놨으니 형제단에서 우리가 묵는 여관에 똘마니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놈들 앞에서 보여주는 거야. 네가 내게 대들고, 내가 널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포를렌탈 교수에게 신뢰를 좀 주자고."
"흐극, 으그그극..."
"놈들과 접선한 뒤에 어떻게 하냐면... 일단 한 번 륀을 귀여워한 다음에 이불 속에서 말해 주도록 할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 륀이 고개를 쳐들어 창문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얼굴을 가리고 창공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주인님... 주인님을 배신할 륀을 잔뜩 꾸짖어 주세요..."
* * *
일행들로선 창공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벅찰 지경이었다. 잉게 포를렌탈 부교수의 실종,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그들의 여정을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마법사와 지역 조직폭력배의 결탁까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륀은 결코 그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가장 중요했을 그 사실 때문에 안도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 다른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륀이 놈들과 접선한 다음에 이중첩자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주기로 한 겁니다. 약속 장소에서 사로잡혔고, 륀은 포를렌탈 교수에게 우리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겠죠. 거기에서 륀이 신호를 주기로 한 거고요."
륀만큼은 아니어도 포를렌탈 교수 또한 한때 정교수 임용이 유력했을 정도로 실력 있는 교수. 대놓고 말장난을 벌이다간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창공과 륀은 한 번 꼬기로 계획했다.
대화 내용만 본다면 일행에서 뛰쳐나왔지만 남아있는 정으로 죽이지 않고 살려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게 전부. 흐름도 자연스러워서 암호가 숨어있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스터가 제대로 해석한 걸 보면 맞아들어간 거겠죠. 다행이네요. 잘 풀려서."
창공은 별 대수로울 게 없다는 듯 말했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절로 경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선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상황에 걸맞은 대화를 하면서, 그것을 고대어로 치환하여 문장의 첫 글자만 땄을 때 의도한 문장이 이루어지도록 말을 꾸며내야 한다. 게다가 일행과 미리 말을 맞춘 것도 아니었으니 그 과정은 거의 즉석에서 이루어졌을 터.
륀이 고대어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썼을 정도로 언어 방면에 실력이 있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이야... 이게 교수로군요..."
히사시가 절로 감탄을 내뱉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그런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창공도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다. 짜고 친 고스톱이라지만 적의 소굴에 붙잡혀 들어온 상황에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문장들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단순히 뛰어난 암기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
"우와... 이게 서울대구나..."
나유가 절로 감탄을 내뱉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암기력 좋다고 서울대 오는 건 아닌데요."
"아린이 너... 넌 자신 없어서 질투하는 거지?"
"아니요! 오빠, 오빠. 결국 교수님이 전달하신 메시지는 어떤 의미죠? 시장의 저택이라는 게 설마..."
"그곳에 교수가 있다는 거지."
"말도 안 돼."
이런 일을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듯, 아린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도리질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트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시장이 도시의 조폭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었다는 게 아닌가.
아무리 포를렌탈 교수가 있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정치인과 깡패가 결탁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선 일. 적어도 아린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협박을 당한 걸까요?"
"그럴지도. 아니면 정말 친근한 비즈니스적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시장은 온전히 자의로 저택을 사용하도록 내어 준 거고. 그래도 형제단원들이 대놓고 출입하지는 않을 거야. 교수와... 선택받은 몇 명 정도?"
"진짜 썩었네요. 이 도시."
"어디는 안 그러겠냐?"
다음으로 '기다려라'. 이 부분은 해석이 쉬웠다. 뒤 문장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한 가지 알 수 없는 부분은 '초대한 자들'의 정체.
"그래서 륀이 누굴 초대했다는 거야?"
"마법사들이요. 정확히는 웨리 동키르케 지부의 교수들. 든든한 지원군들이죠."
"아... 죽이네."
장소를 알아도 창공이 생각했던 것처럼 급습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알펜 2세가 직접 임명한 기사라고는 하지만 결국 에트로지에다 이스트리의 시민도 아닌 그들은 결국 단독으로 시장, 교구장이라는 권력에 맞설 수가 없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게 바로 마법사들.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그 어디에나 직접적,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투사하는 집단. 그들이 지원군이 되어 준다면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
거기에 이번 일은 웨리 입장에서도 바깥에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일. 정교수 승진도 없던 일이 되고 지부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포를렌탈 교수는 틀림없는 마법사다.
그런 그녀가 이스트리의 조폭들과 붙어먹었다? 이 일로 세간에 형성된 마법사들의 이미지가 한 번에 주저앉지는 않겠지만 손상이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거기에 웨리와 은근히 대립하는 데가 있는 교단에서는 말은 없을지라도 꽤나 고소하게 생각하리라. 이 일에 대해서는 교단도 아주 당당할 수가 없지만 원래 여러 범인들 중 하나만 잡혀버리면 홀로 모든 공범의 죄를 뒤집어쓰는 법이다.
아스터는 교단도 이 일에 개입했다는 점과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 때문인지 영 개운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런 정치적인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일행들은 즐거움에 가득 차서 웃음을 지었다.
"창공아. 그래도 다음부터는 뭐라고 귀띔이라도 좀 해 줘. 깜짝 놀랐네."
나유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도 창공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대답할 뿐이다.
"상황 봐서. 적어도 이번에는 알리지 않은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다음에도 그래야 한다면 그럴 거고."
"으으... 진짜 나쁜 남자라니까."
"서 상. 그러면 그 교수님들은 언제 도착합니까?"
"곧. 내 가방에 커피 있어. 로비에 내려가서 끓는 물 한 주전자 얻어다가 한 잔씩 마시자. 오늘 밤에 들이칠 테니까."
"오늘 밤에... 말입니까?"
"정확히는 마법사들 오면."
조금은 급한 감이 있는 게 아니냐는 히사시의 표정. 하지만 어택은 창공의 생각에 동의하는 쪽이었다.
"창공이 말이 맞아. 들이치려면 지금 해야 돼. 륀이 저곳에 있잖아."
"아... 맞네요."
똑. 똑.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초대받은 손님들의 등장이었다.
"들어오시죠."
그리고 창공은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