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27화 (127/178)

〈 127화 〉 이스트리 (11)

* *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깔모자에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동화 속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들. 이제서야 '마법사들' 이라는 집단이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다.

"시뇨레 서... 어떤 분이신지?"

그중 대표로 보이는 교수가 챙을 살짝 들고 창공 일행의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창공을 찾았다.

"접니다. 성함이..."

"진리는 나의 빛! 난 시몬 그라치아니. 웨리 동키르케 지부 마법 생물학 교수입니다. 여기 이쪽은 마공학 교수 니네타 만치니, 그 옆은 역시 마공학 교수인 카를 펠츠..."

그라치아니 교수가 이끌고 온 마법사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총 10명. 총원이 교수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웨리의 핵심 인력이라 불리는 정교수만 8명. 륀의 솜씨를 생각해 본다면 무시무시한 전력이다. 거기에 조교수는 한 명도 없고, 부교수가 둘.

교수급이 안 되는 일반 마법사들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법사들이 이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느껴졌다. 절대 바깥에 퍼져서는 안 되는 일. 단 한 번의 기회에 가용한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셈이다.

자신들이 평화 협상이 아니라 싸움을 하러 왔다고 광고라도 하듯, 그들은 지팡이 외에도 검을 한 자루씩 허리에 차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직급의 최저선은 조교수. 륀의 말에 의하면 웨리의 명성에 누가 되는 것을 막고,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조교수부턴 무기 다루는 법을 법을 배운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마법 수련만큼이나 무술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에 부교수나 정교수쯤 되면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까지 가능한 수준이 된다.

오늘 밤 시장의 저택에 륀과 포를렌탈 교수 이외 누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들은 엄청난 곤욕을 치르게 되리라.

"퐁파두르 교수에게서 받은 연락에 시뇨레. 당신 이름이 있었지요. 그것을 본 지부장께서 저희 '구출조'의 파견을 신속히 결정하신 터라,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명목상으로 그들은 구출조였다. 누굴 구출한다는 것일까. 륀?

아마 잉게 포를렌탈 교수를 말하는 것이리라. 일단 웨리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일을 사악한 깡패들에게 사로잡힌 포를렌탈 교수를 구출하는 작전으로 취급하고 싶은 것이다.

알고 보는 연극이 그렇듯 웃기지도 않은 법이지만 이게 사람 사는 법이니 뭘 어쩌겠는가. 어쨌든 창공으로선 그들이 구출조이건 타격조이건 자신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야... 마법사들..."

히사시가 넋이 나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하루하루 살아가는 터라 이세계의 낭만이고 뭐고 평소에는 없었지만, 이럴 때면 정말로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들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그런 감성이 남아있는 일행에겐.

"의심 없이 이렇게 달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퐁파두르 교수의 이름은 저희 지부에서도 유명하죠. 그녀가 허튼소리를, 그것도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할 리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 그쪽은 혹시 교단의...?"

그라치아니 교수와 아스터는 조금은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사실 아스터와 륀이 서로 자매라 망정이지, 원래대로라면 두 집단의 관계는 좋지도 않지만 서로 나쁘지도 않은... 하지만 마주 보기엔 껄끄러운 그런 사람들이니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잠시나마 같은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으니 아주 모른 체하고 지나가기도 애매하기에, 결국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복음화성 소속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라고 합니다. 신의 은총이 당신에게 함께하길."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하길. 실례지만 퐁파두르 교수와 어떤 관계이신지?"

"동생입니다."

"그렇군요. 퐁파두르 교수에게 이런 동생분이..."

마법사들은 그 유명한 최연소 교수 륀에게 성직자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란 듯 웅성거렸지만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 집단을 하나로 묶은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 뒤로 창공은 마법사들에게 일행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고, 이젠 정말로 본격적인 행동을 할 시간.

"본론으로 들어가죠. 퐁파두르 교수는 당신을 찾아가면 해답이 있을 거라고 전언은 보내왔는데, 어떻습니까?"

"륀의 말로는 이스트리 시장의 저택에 포를렌탈 교수가 있다는군요."

"아하... 시장의 저택에 말입니까. 과연. 포를렌탈 교수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짐작이 갑니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붙어먹은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성숙한 어른이라는 증거였다. 아니면 자기 일만 해결되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아이이거나.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저희 웨리는, 그리고 마법사들은 동료에 대한 위해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위기에 빠진 마법사가 있다면 반드시 구출하죠.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시뇨레 서는 어떠신지?"

"마찬가지입니다."

"좋습니다. 저희 마법사들에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약을 만든다면 플라스크에 담을 때까지 멈추지 마라.'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실까요? 시장의 저택으로."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격언일까. 아무튼 시원시원하게 움직이자는 말을 창공 일행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시죠. 다들 준비해요!"

"좋았어, 다 박살 내러 가 볼까!"

준비라고는 해도 각자 무기 하나씩만 챙기면 끝나는 일이다. 아린은 칼란드라. 히사시는... 프라이팬 하나를 챙긴 모양이었다.

현 시각 10시 14분.

전등이 없는 이세계의 항구 마을엔 온전히 어둠이 내려앉았을 시각이다.

그리고 열여섯의 남녀가 짙은 어둠을 헤치고 시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중심가에서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이스트리에서 조금 산다는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정지! 정지! 신원을 밝히시오!"

등불을 든 경비병들이 일행을 가로막는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열일곱 명의 정체 모를 사람들. 경비 둘이서 감당하기엔 가혹한 차이다. 경비병의 얼굴엔 긴장한 일색이 역력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Silandiem."

"Lenguisus."

그리고 그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칼을 맞대고 할 것도 없었다. 교수 네 명이 나서서 그들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경비들은 제자리에 선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밤중에 멀리서 보면 성실히 경비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허락 감사합니다. 자, 들어갑시다."

"킥킥킥..."

나유가 작게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필사적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보는 경비병들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전무. 그렇게 이들은 너무나 쉽게 정문을 통과했다.

"Astne eliquid an cubiculo..."

정원에 멈춰 선 그라치아니 교수가 지팡이로 땅을 짚고 주문을 영창했다. 창공이 륀의 입을 통해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주문이다. 포를렌탈 교수가 부리는 짐승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마법.

"반응이 안 잡히는군."

"실례지만 포를렌탈 교수의 수준과 비교하면..."

"그녀가 실력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면 제가 우위에 있겠죠. 제 친구도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친구 말입니까?"

그라치아니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일행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어두컴컴한 탓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가 새를 부린다는 것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인원이 있다면 알려줄 겁니다. 가시죠. 한시가 급합니다."

일단 시장의 저택은 자그만 마당을 앞에 낀 3층 주택이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그렇게 으리으리하지 않았지만 안이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직접 보아야 아는 일. 만약 저번에 창공 일행이 갇혔던 감옥이 이 안에 있다면 보기보다 공간이 클지도 모른다.

"다들 싸울 준비해."

창공은 그렇게 말하며 시위에 화살을 매겼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교수 한 명이 앞으로 나서 저택의 문을 지팡이로 밀자 소리 없이 열렸다.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등불인 걸까. 일단 바깥에서 보기에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천천히 들어가죠."

마법사들이 먼저 저택 안으로 이동하고 창공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붉은 카펫이 깔린 로비의 벽면에는 여러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공간을 등불이 은은하게 비추었다. 문은 없고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만 세 군데.

"음..."

그들은 잠시 로비에 멈춰 서서 고민했다.

"친구가 말하길 이 저택의 출입구는 오직 이곳 하나라고 합니다. 일단 보이는 것으로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행을 넷으로 나누어야 할까요?"

"적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나누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각개격파의 위험이 있으니. 음... 차라리 직접 와 주면 좋겠는데."

분명한 사실은 단 한 가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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