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이스트리 (12)
* * *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둘로 나누도록 하죠. 저희 마법사들이 오른쪽 통로를 수색할 터이니 시뇨레 서께선 왼쪽 통로를 맡아 주심이 어떠십니까?"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하죠."
안쪽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적이 직접 오는 게 낫겠지만 무조건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포를렌탈 교수와 형제단이 침입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황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먼저 들이치는 편이 기습의 이점을 누리는 방법이다.
"로비에 마법사 다섯을 남겨 두도록 하지요. 만약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이곳으로 후퇴하도록 하십시오. 그럼 조심하시길!"
"이따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택이 형. 앞장 서요. 아스터. 맨 뒤를 맡아."
이렇게 창공 일행을 어두컴컴한 왼쪽 통로로 들어섰다.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둡진 않았다. 통로 벽에도 로비처럼 등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밝지는 않아 시야가 절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 하나 안 튀어나오나..."
"조용."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나유는 창공의 주의를 받고 황급히 입을 틀어 막었다. 확실히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경솔하긴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창공이 말없이 활을 세우며 시위를 잡아당겼다. 앞에 있던 어택이 몸을 비틀어 사로에서 비껴남과 동시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아간다.
"아악!"
"활쟁이다!"
앞에서 느껴진 미세한 반짝임.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먼저 화살을 쏜 것이다. 어차피 일행이 뭉쳐있는 데다 마법사들은 반대편으로 갔으니 아군 오사의 위험도 없어 마음껏 쏠 수 있었다. 륀은 저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테고.
기습을 가하려다 역으로 기습당한 형제단은 이젠 이판사판이라 생각했는지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일행을 향해 달려왔다.
"모두 전투 준비해! 아스터! 뒤쪽 경계 늦추지 말고!"
"이야아아아아!"
어택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좁은 복도에서 커다란 함성이 이리저리 반사되어 귀에 쩌렁쩌렁 울린다.
빠각!
검을 들어 막아보려 했던 형제단이었지만 푸른 기운이 감도는 방망이에 칼날은 무참히 박살 나고, 그 뒤의 머리통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휘둘러진 어택의 방망이는 벽에 큰 구멍을 내고서야 멈추었다.
"마나 유저!"
"씨발! 마나 유저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커흑!"
두 번째로 날아온 화살이 형제단의 가슴팍에 꽂히고, 불평을 토하던 남자는 꽂힌 화살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졌다. 통로가 좁아 어택이 맞을 수도 있어 의도적으로 마나를 담고 있진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빠지라고 할까? ...아니다. 일단은.'
마나를 담은 화살의 종류는 두 가지. 관통력이 극대화된 철갑탄과 닿으면 폭발하는 폭발탄. 어택이 창공의 뒤로 빠진 다음 마나를 이용한 철갑 화살을 날리는 수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제어가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만약 근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후퇴! 후퇴해라!"
결국 형제단은 화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창공아! 쫓아가자!"
나유가 외쳤지만 창공은 고개를 저었다.
"안쪽에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놈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대형 유지해."
* * *
"그렇다면 교수. 내 교수만 믿고 있겠소."
"맡겨두라고. 당신 저택은 우리가 지켜낼 테니까."
잠옷을 입은 채 벌벌 떠는 시장을 달래서 침실 안으로 들여보낸 포를렌탈 교수는 명백한 비웃음을 흘리고선 륀을 바라보았다.
"퐁파두르 교수. 아무래도 웨리에서 기어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하긴 마법사들은 영원히 모를 정도로 무지한 집단이 아니니까."
"음."
륀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를렌탈 교수는 그녀를 어지간히 믿었는지 마법사들의 습격과 륀을 결부시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기에 예전에 당신 일행이던 에트로지들까지... 하, 건방진 것들 같으니라고.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노예들 주제에. 자, 그럼 우린 어서 빠져나가자고."
"저택은?"
"이딴 저택 따위 마법사인 내가 지켜야 할 의무는 없지. 어서 빠져나가자. 빠져나가서 아우스트로 수협인지 뭔지를 완전히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고, 함께 주인님을 뵈러 가는 거야."
"방법은 있어? 명심해. 우리와 출입구 사이엔 열 명의 마법사가 있다는걸."
"이미 모든 공작은 끝났어. 이걸 저택 곳곳에 뿌려두었지."
포를렌탈 교수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작은 상자를 열어 륀에게 보여주었다.
"그 가루인가? 벤고스 교수가 개발했다는?"
"맞아. 불을 붙이면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폭발하는 가루. 이거면 사람 따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실험도 충분히 해 봤어."
검은색에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고운 가루. 포를렌탈 교수에 의하면 함께 '주인님'을 모시고 있다는 마법사인 벤고스 교수가 개발한 가루로서, 아주 작은 불똥만 튀어도 격렬한 폭발 반응을 보이는 가루였다.
륀은 포를렌탈 교수의 천박한 생각에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 놀라운 가루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평가도 그렇고, 써먹는 곳도 고작 사람 죽이는 일이라니.
'저급한 인간 같으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인간이 부교수까지 올라갔지?'
포를렌탈 교수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본 바, 그녀는 어째서 강대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가에 대해 크나큰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웨리를 뛰쳐나와서 하는 게 고작 지역 깡패들과 붙어먹는 일이라니 우스운 꼴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일은 원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입장이었다.
물론 정통파 마법사인 륀의 입장에선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마법사들의 존재 가치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진리를 파헤치는 것. 그 목표에서 벗어난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사라 불려선 안 된다.
"그럼 퐁파두르 교수. 가자. 한 군데에만 불을 붙인다면 모두 타오를 거야. 침입자들과 천한 폭력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을 묫자리로 쓰게 되겠지."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륀은 재빠르게 지팡이 끝을 포를렌탈 교수에게 향하며 주문을 외쳤다.
"Elligeta!"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교수의 두 다리가 딱 붙여지고, 두 팔은 자신을 끌어안듯 몸통을 감쌌다. 상당히 당황한 얼굴로 륀을 바라보는 그녀였지만 륀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다.
"정도에서 벗어난 마법사를 어떻게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신은 이미 교수가 아니야. 마법사도 아니지. 웨리로 데려가 심판을 받게 하겠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아주 술술 불더군."
"하.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륀이 가한 속박을 풀어내려는 듯 몸에 힘을 주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힘으로 풀어낼 수 있었으면 어찌 그것을 마법이라 부르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적어도 륀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이이이익...!"
"...설마."
"으아아!"
푸른빛의 알갱이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마법이 강제로 해제된 것이다. 교수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륀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붕, 날아가 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
"실망이야, 퐁파두르 교수. 웨리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천재라기에 기대했는데 고작 이런 얕은 수작이나 부리다니."
"크윽..."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두르는 포를렌탈 교수. 하지만 재빠르게 자세를 정돈한 륀이 제 지팡이를 굳건하게 붙잡고 버터 냈다.
"도대체 어떻게? 당신은...!"
"그래. 부교수 따위가 역대 최연소 정교수님의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주인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퐁파두르 교수.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지팡이를 거둬. 당신이 이대로 연구에 매진한다 한들 마탑에 흔해 빠진 늙은이들 무리에 끼는 미래밖에는 없으니까. 그런 인생을 원해?"
"유감이네. ...내 인생 계획은 그거랑은 조금 다르거든. 훨씬 더 보람찬."
"그래. 유감이야. Refsis!"
순간 륀의 몸이 무너지며 마치 미끄러운 경사면 위에 있는 것처럼 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소리쳤다.
"Surbu celmuna, espacti ratlu!"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륀은 마치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켰고, 반대로 포를렌탈 교수가 휘청거렸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검을 뽑아 달려드는 륀. 온전히 마법으로는 제압하기 힘들다 생각하고 팔이나 다리 하나 둘을 자를 참이었다.
"Flivamis ecadaha."
그러나 금세 회복한 교수. 주문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마법을 걸었다.
쿠웅!
달려가던 륀이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Ladikala celmuna!"
"Umchanantin celmuna!"
푸른빛줄기가 공중에서 부딪히며 경계를 이루더니, 금세 저희들끼리 등을 맞대고 서듯 파도의 장벽이 방 한가운데에 만들어졌다.
"꽤... 하는군! 하지만 힘겨루기에서 당신이 날 이길 순 없어!"
"뭐 이딴...!"
륀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것과는 반대로 포를렌탈 교수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점점 륀의 몸이 뒤로 밀린다. 한 번 더 정신을 집중해 보지만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벌컥!
"이, 이게 뭐 하는 거요!"
잠을 자러 들어갔던 시장이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확인차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놀랍고도 아름다운 마나의 충돌. 하지만 두 마법사들이 시장에게 마법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려 이런 소동을 벌이는 게 아님은 명백했다.
"무슨."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포를렌탈 교수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우연찮게 집중이 흐트러진 호기를, 륀은 놓치지 않았다.
"이야아아아!"
고함과 함께 순간적으로 마나가 집중되고 륀의 마력이 포를렌탈 교수를 압도했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힘겨루기에 들어갔지만 이미 대세가 넘어간 뒤였다.
콰아앙!
"으아아아...!"
폭발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는 빛무리.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포를렌탈 교수.
이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시장에게 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들어가 있어!"
"예...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