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29화 (129/178)

〈 129화 〉 이스트리 (13)

* * *

창공 일행 앞에서 한 번 후퇴했던 형제단의 단원들은 숨죽인 채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애당초 포를렌탈 교수로부터 받았던 명령은 최대한 침입자들을 저지하라는 것. 거기에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자기가 곧 지원을 간다는 말을 덧붙였다.

해봤자 항구도시의 깡패로 살던 그들에게 홀연 나타나 그들을 휘어잡은 마법사의 지시는 신의 계시와도 같았고, 하여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장사꾼들 돈이나 뜯어먹고 근근이 살아가던 그들이 시와 교구를 등에 업고 용된 게 다 누구 덕이던가.

그렇지만 그런 사이에 대단한 신뢰나 끈끈한 무언가가 있을 리 없다. 별거 아닐 거라던 침입자들ㅡ심지어 말로만 듣던 마나 유저까지 포함된ㅡ에 의해 단번에 열 명 가까이가 죽어 나갔고... 자신들은 이렇게 어둠에 의지해 도망에 가까운 전략적 후퇴를 하였으니 현 상황과 포를렌탈 교수의 명령에 회의가 생길 만도 하다.

그래봤자 회의는 회의에서 그칠 뿐. 어차피 교수는 적들을 저택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모조리 불사를 작정이었으니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지게 만들 생각도 없는 약속을 한 셈이었지만 코너에 몰린 형제단에겐 거기까지 의심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어서 포를렌탈 교수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해 주기만을 오매불망 바랐다.

"...!"

그때였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숨죽여 창공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형제단의 귀에 부드러운 칼란드라의 선율이 들린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소리라 섬뜩할 법도 하건만,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한, 언뜻 듣기엔 나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간단함을 가졌으면서도 한없이 매력적인.

지구에선 흔히 '반짝반짝 작은별'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작품,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물론 다이셀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단이 그것을 알리는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투 직전의 적막 사이에서 울려 퍼진 음악은 듣는 모두의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의문조차 품을 수 없을 정도로 곡조에는 매력이 있었으니.

그리고...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절로 하품이 나고,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져 눕고 싶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지는 몸에 머리가 저항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둘씩 쓰러진다. 칼을 들고 눈을 섬뜩하게 빛내던 사내들이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수면제를 맞은 환자처럼 빠르게 잠든다. 마지막 사람이 눈을 감고도 잠시 계속되던 연주는 이내 마무리를 고했다.

"성능 확실하구만."

어택이 조심스레 형제단이 매복하고 있었던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히고 한 소리였다. 방 안에 비치된 등불들을 환하게 밝히며 확인하니 형제단은 이미 꿈나라로 간 듯하여, 그때까지 현 위에 활을 대고 있던 아린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팔을 내렸다.

"새끼들, 아주 좋다고 자는 거 봐라. 아린아. 잘했어."

"우와... 김 상. 대단한데요..."

"별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번 작전은 그녀가 입안자였다. 마력을 담은 음악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거나 즐겁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당연히 잠들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사람들은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해요. 우리의 손에 쓰러지는 게 아니라요."

"그래그래."

어차피 공무원들도 다 형제단과 붙어먹은 상황에서 법의 심판이라는 게 제대로 작동할지는 창공에게 한없는 의문으로 다가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할 바가 아니기에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건 뭐야?"

그렇게 형제단이 모두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창공은 안쪽에 또 하나의 문이 있는 걸 확인하고 의문을 표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전부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할게."

어택이 앞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마 안쪽에 적이 있더라도 아린의 연주에 의해 잠들었을 테지만, 만약 아니라면 활을 든 창공보다는 근접 전투원인 그가 나았으니까.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들의 관심을 끌만한 무언가는 있었다.

"...얘들아. 이리 좀 와 봐."

"뭐 있어요?"

어택의 인도에 따라 방 안의 방으로 들어온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는 그것.

"이게... 여기 왜 있어...?"

"아 씨... 저거 보니까 토나올 것 같아."

그들이 강제 노역을 했던 트리스카의 탄광. 그곳에서 죽도록 곡괭이질을 해서 캐냈던 동그랗고 푸르죽죽한 돌덩어리. 도대체 용도도, 이름도 알 수 없었던 그 돌덩어리들이 이곳에 잔뜩 쌓여 있는 게 아니겠는가.

다른 점이 있긴 있었다. 선반 위에 일정한 간격,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배열된 돌들은 희미한 빛을 발했다. 자세히 보면 무수히 많은 푸른 빛줄기가 돌 안쪽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 같아 보인다.

"왜들 그러시죠? 저게 뭐죠?"

다만 아스터는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처음 보는 돌덩어리였기에 그들의 반응이 살짝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무래도 륀을 추궁할 때가 온 것 같네.'

창공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날, 비아투 탄광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륀이 반응을 보인 것을. 순간적이었고 감쪽같이 그것을 감추었기에 더 캐내려 해도 입을 열지 않으리라 생각해 가만히 놔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 돌의 정체를 알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나는 돌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뭔가가 궁금했는지 나유가 검 끝을 돌에 갖다 대고 있었다.

"하지 마!"

"어?"

툭.

하지만 이미 너무 늦고야 말았다. 순간적으로 일행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폭발이나 충격에 대비했지만 다행인지 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유야. 내가 그러라고 했어?"

"미안. 나도 모르게..."

창공은 나유를 엄한 표정으로 다그쳤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그저 별 탈이 없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오빠. 저 돌들. 빛이 안 나오는데요."

"음..."

아린의 말대로 돌들에서 은은하게 뻗어 나오던 빛은 더 이상 없었다. 이렇게 보니 더욱 확실했다. 그들이 탄광에서 캐냈던 정체불명의 돌과 같은 종류다.

"내 생각이지만 륀은 이게 뭔지 알 것 같은데."

"창공아. 그럼 하나 챙길까?"

"아뇨. 이따가 나갈 때 챙기죠. 지금 건드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도 뭐 함부로 건드리지 마요. 어린애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이게."

"미안..."

한숨을 내쉰 창공은 다시 일행의 위치를 정해주고 저택의 탐색을 계속했다.

* * *

"하아... 하아..."

두 손으로 지팡이를 붙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륀. 반면 그녀와 대치 중인 포를렌탈 교수의 얼굴에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보면 믿지 못할 광경. 아무리 마법 이론이 대결에 유리한 학문이 아니라지만 부교수급 마법사가 정교수급 마법사를 몰아세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문제는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 봐, 퐁파두르 교수. 이미 결판은 났어. 이런 상황에서도 난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고."

"시끄러워!"

"아래층에 있는 마법사들을 믿고 있는 거야? 안타깝지만 그들이 이곳에 도달한다 해도 나를 이기지 못해. 당신도 알고 있잖아. 당신의 마나는 줄고, 몸은 점점 지쳐만 가는데 나는 멀쩡하지. 지금의 나는 부교수가 아니야. 부탑주가 내게 필적할 수 있을까."

포를렌탈 교수는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지금 이 힘이라면 탑주와 대결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신의 지원군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려줄까? 오, 이런. 그라치아니 교수와 그 똘마니들. 내 친구 하나도 제대로 당해내지 못해 쩔쩔매는 꼴이라니."

"뭐라고...?"

마법 생물학 전공인 포를렌탈 교수가 친구라 부를 대상은 자신이 부리는 동물. 그녀의 경우엔 매다. 물론 마법사가 부리는 동물은 단순한 동물 이상의 힘을 내지만 그래봤자 교수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러 명의 교수들이 포를렌탈 교수의 동물도 당해내질 못한단 말인가.

"퐁파두르 교수. 받아들여. 이거야말로 마법사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라고. 봐. 힘을 얻은 나에게 누가 당할 수 있었지? 당신은 나를 이기지 못하고, 웨리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내 친구에게 가로막혀 이곳에 다다를 수 없지. 힘은 더 큰 힘 앞에서 무력하다. 그리고 더 큰 힘은 상대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야, 교수."

"더러운...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조리 독이나 다름없어. 당신이 왜 마법사의 긍지를 내던지고 불량배들과 야합했는지 알겠네. 남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고 위세를 떨려고 하다니. 하는 꼴이 똑같잖아?"

"아, 퐁파두르 교수. 마음이 아픈걸.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신이 내 동지가 되어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굳이 힘든 길을 택하겠다면 기꺼이 인도해 주지. Elligeta!"

"흐윽!"

륀이 사용했던 주문이 이번에는 그녀에게 쏘아졌다. 두 다리가 찰싹 달라붙고, 두 팔은 몸을 한껏 감싸 안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Surbu celm..."

"안 돼."

"아아악...!"

재빠르게 주문을 해제하려 했지만 포를렌탈 교수의 반응이 먼저였다. 륀의 팔이 주인의 몸통을 부숴버릴 듯 강하게 조여들었다.

"당신은 내 노리개로 삼아 줄게.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놓고 있으라고. 괜찮아.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나와 함께 몇 밤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게 될 테니까."

"누가... 내가? 난 당신처럼 하잘것없는 인간은 주인님으로 모실 생각이 없어. 난..."

"오, 그래. 앞으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겠네. 그럼 이제 아래층으로...?!"

여유롭기 짝이 없던 포를렌탈 교수가 멈칫거리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변한 것은 그녀의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륀의 몸을 단단하게 억죄던 마력. 두텁고 무겁기 짝이 없던 그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내려앉은 것이다.

"서, 설마... 그런!"

"Surbu celmuna!"

"안 돼애애!"

륀의 몸이 속박에서 풀려남과 동시에 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여유로운 표정의 주인과 힘겨운 표정의 주인이 뒤바뀐다.

"아... 친애하는 포를렌탈 교수."

탐스러운 금발은 땀에 젖어 더욱 탐스럽게 빛나고, 가을 하늘의 색을 똑 닮은 하늘색 눈동자엔 자신만만한 기운이 다시 차오른다.

"더 큰 힘은 상대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할 수 있다고 했던가. 좋은 걸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 훌륭한 연구자의 덕목. 배운 것을 잘 활용한다. 알다시피, 나 정도면 훌륭한 연구자라고 할 수 있지."

"안 돼..."

"이제부턴 퐁파두르 교수의 강의 시간이다, 잉게 포를렌탈 부교수! 난 학점을 짜게 주니까 각오하도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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