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30화 (130/178)

〈 130화 〉 이스트리 (14)

* * *

"여기서 대판 싸웠나 보네."

아린의 연주에 힘입어 너무나도 쉽게 저항을 분쇄한 일행은 2층으로 진입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매복을 대비해서 천천히 나아갔지만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저택의 중앙. 3층으로 올라가는 큰 계단이 있는 로비 비슷한 공간에 이르고 나선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찢어진 카펫, 떨어진 액자, 곳곳에 흩뿌려진 피. 옷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너덜너덜한 천조각까지. 분명 싸움의 흔적이었고, 미루어 보아 작은 싸움도 아닌 것 같건만... 시체가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다.

"도대체 이건?"

"뭔가 내분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마법사들과 적들이 싸운 흔적이겠지. 근데 이상하네. 그 교수들이라면 더 깔끔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일행들은 창공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들만 하더라도 첫 번째 싸움 외에는 별다른 소란 없이 저택을 돌파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 교수가 직접 왔다거나..."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다섯 명이 갔었는데? 또 싸움이 일어났다면 륀도 합류했을 거고. 그럼 정교수만 여섯 명이야. 애초에 이 작전은 일방적인 작전이 될 거라고 다들 예상했었고. 음, 하지만 여기서 이런 고민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다들 3층으로 가죠."

"3층?"

"마법사들도 올라갔을 테니까."

"서 상. 혹시 그분들이 로비로 후퇴한 거라면..."

창공은 히사시의 말을 가볍게 부정했다.

"이제 계단 하나면 오르면 마지막인데 후퇴했다고? 차라리 로비에 있는 마법사들까지 불러왔다면 모를까 그건 너무 멍청한 선택이야.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 리가."

그의 말에 어택과 아린이 곧바로 수긍했고, 하사시도 가벼운 걱정을 고이 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쉬운 싸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행들의 어깨를 꽤나 무게감있게 짓눌렀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다들 무기를 치켜들었고, 창공도 언제든지 활을 쏠 준비를 마치고서 사방을 향해 눈을 번뜩였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계단을 다 오르니 3층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었지만 중앙에 제일 크고 화려한 문이 있는 것이,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면 된다며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돌파하죠. 택이 형. 문 깨부숴요. 나유야. 보조해."

"오케이."

"알았어."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렸다. 황급히 전투를 준비했던 창공 일행이었지만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을 보고선 세웠던 무기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반가운 얼굴로.

"이런, 오셨군요!"

쾌활한 목소리. 여관을 출발할 때 소개받았던 니네타 만치니 교수였다. 그녀가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은 곧...

"끝났습니까?"

"네!"

일행 몇몇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리 쉬운 작전이었다 할지라도 무사히 끝나면 아무튼 뿌듯한 법.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만치니 교수는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먼저 보이는 광경은 제압당한 채 바닥에 꿇어앉은 포를렌탈 교수. 그리고 그녀를 에워싸듯 둥글게 선 여덟 교수들. 거기에... 방 한구석 책상에 걸터앉아 지친 표정으로 파이프를 뻑뻑 피워대는 륀까지.

"륀."

"...왔구나."

다시, 하지만 마지막 만남과는 다른 분위기로 일행과 마주한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더러운 배신자 년이라고 욕 많이 했겠네."

물론 진지한 힐난조로 하는 말은 아니었고 거진 농담에 가까웠지만, 몇몇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데엔 충분했다. 창공은 싱글벙글 웃으며 거기에 한 술 더 뜬다.

"다들 널 죽이고 싶어 하더라고."

"저런! 하지만 이제 내 결백은 입증됐겠지?"

"아니. 아직이야. 아직 네가 말하지 않은 게 있거든."

그 말을 하는 창공은 방금과는 반대로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륀은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무슨..."

"일단 여기 일부터 마무리하고 보자고."

* * *

수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수습이라고 하면 이스트리의 시장이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포를렌탈 교수는 어떤 마법적 조치가 취해진 듯 꿇어앉은 채 눈을 이리저리 희번덕거렸지만 결코 입을 열진 못했고, 시장이 그 옆에 엉거주춤 선 채다.

"이, 이건 무례요! 밤에 갑자기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시장. 저희 웨리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할 준비가 이미 끝나 있습니다. 시장이 속칭 형제단이라 불리는 조직폭력배들과 야합했다는 사실도 입증할 준비를 마쳤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여기 륀 퐁파두르 교수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겠지요."

"저 여자는 오히려 우리와 붙어먹은 사이였단 말이오!"

그렇게 외치며 륀에게 삿대질을 하던 시장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선 힘없이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라치아니 교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중이었고.

"무슨 소리를. 퐁파두르 교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리 약속된 행동을 수행한 마법사일 뿐.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사람이었습니다. 시장. 웨리의 부교수를 사사로이 납치한 죄는 무겁습니다."

"나, 나, 납치라니!"

"아니요. 시장이 납치했습니다. 오, 불쌍한 포를렌탈 교수. 시장에게 납치당해 몹쓸 짓을 당한 끝에 억지로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되다니. 하지만 이 진실이 묻히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제로 짓밟힌 여성의 명예를 누가 보전해 주겠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떠는 시장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한 것이었다. 아무리 이스트리의 전통과 역사가 유구하다 한들 정치적 영향력으로 따지면 거대 집단인 웨리를 이길 수 없음이 자명. 거기에 웨리 정도라면 임의로 여론을 형성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흥미진진하게 시장을 지켜보던 나유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팝콘 먹는 손동작을 취했고, 몇몇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웨리에서는 다른 대안적 사실도 제시하고 싶습니다. 포를렌탈 교수는 애초에 이곳 이스트리에 없었으며, 시장은 단지 형제단과 유착 관계였을 뿐이라는, 그리고 저택에 있던 형제단이 이익 분배 문제로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끝에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쨌든 시체들이 남아있다. 이 시점에서 시장은 어떻게든 형제단과의 관계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혹시 폭력배들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시장이라는 진실은..."

"첫 번째 진실을 택하겠다니 참으로 용감합니다, 시장."

"자, 잠깐!"

"마법사들은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택하십시오. 마법사 강간범입니까, 아니면 지역 폭력배와 결탁한 시장입니까?"

"두... 두 번째로..."

"좋은 선택입니다."

둘 다 시장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선택이지만, 적어도 마법사 강간범만큼은 피해야 했다. 차라리 강간보다는 단순 비리가 더 낫지 않겠는가.

솔직히 창공 입장에서는 이스트리 교구에서도 괘씸한 짓을 했으니 같이 엮어서 때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것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이 한 고발이면 몰라도 웨리가 상대라면 교단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테고, 그렇게 되면 일처리가 어려워진다.

"그라치아니 교수님."

"아, 시뇨레 서.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잠깐 륀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겐 그녀의 행동을 구속할 권리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머지 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하길."

그렇게 륀을 데리고 일행과 함께 나서려는데, 아스터가 어중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게 아니겠는가.

"아스터. 왜 그래."

"...많이들 다치신 것 같아서...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그녀의 말대로 교수들은 생각보다 힘든 싸움을 했었는지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중상자는 없었지만 다들 어딘가에 피를 묻히고 있었던 것이다.

"필요 없어."

륀이 자르듯 말했다.

"교수들이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지 않아."

"하지만."

"진정으로 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버려 둬. ...그럼 이제. 내게 묻고 싶은 게 뭐야?"

"따라와."

다시 모인 일행은 1층으로 내려갔다. 형제단은 아직까지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고, 그 너머. 돌들이 있던 작은방의 문이 열렸다.

"이건...!"

아니나 다를까 륀은 이 푸르죽죽한 돌의 정체를 안다는 눈치였다. 순식간에 일행 대다수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륀. 우리는 이 돌을 너무나도 많이 봤어.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이지. 그런데 뭐랄까, 네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고. 그러니 말해. 이게 뭐야? 많이 봤고, 만지기도 했지만 정작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는 게 웃기네."

"...취벽."

"취벽?"

"꽤나 예전에 붙은 고풍스러운 이름이지. 충격에는 강하지만 열에는 약한 수수께끼의 물체. 덕분에 연구가 아주 어려웠어. 광물인가, 암석인가? 그 결론도 내리지 못할 정도로. 어쨌든 쓸모도 없을뿐더러 보석처럼 반짝이지도 않았기에 소수의 수집가들을 제외하면 수요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

"관련 취급업자도 아닌데 꽤나 상세히 아는군."

"...그러던 중, 트리스카 일부 지역에서 이 취벽이 대량으로 묻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어. 사람들은 쓸모없는 것들만 잔뜩 묻혀있다며 관심을 두지 않았지. 그런데 트리스카의 취벽은 달랐어."

트리스카. 떠올리기도 싫은 저주 받을 이름. 그곳에서 강제로 노역을 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복잡하다.

"어떻게 달랐지?"

"마나가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다는 점. 마나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빠르게 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당신들도 알 테지. 무기나 악기에 마나를 싣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데엔 힘이 들어간다는걸. 오직 생명체의 신체만이 마나를 저장할 수 있고, 자연계에서 마나는 무질서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게 정설이었지. ...3년 전 트리스카산 취벽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러면서 륀은 취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취벽은 그녀의 손안에서 다시금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 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처럼.

"우연한 발견이었지. 트리스카산 취벽에 마나가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을 줄이야. 우리 마법사들은 취벽에 대해 연구했고, 지금까지도 연구 중이야. 아주 활발하게."

"이쯤에서 정겨운 이름을 꺼내야겠네. 비아투 탄광."

"읏..."

"말해. 네가 아는 걸."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는 륀. 일행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당황한 듯 이리저리 사람들을 살피던 아스터도 뭔가를 짐작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웨리는 비아투 탄광의 주요 거래처였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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