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이스트리 (15)
* * *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는다. 륀은 자신을 향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들 앞에서 홀로 견뎌내야 했다. 누군가는 대놓고 적의를, 누군가는 혼란을, 누군가는 싸늘한 냉정을.
"아, 그래. 우리가 거기에서 개고생을 했던 게 마법사님들의 연구를 위해서였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곳에서 죽을 뻔했던 모든 일들이 다 헛된 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걸!"
나유가 대놓고 륀을 비꼬아댔다.
"거기서 죽은 사람들도 이걸 알면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야! 자기 죽음이 마법의 발전을 위한 거였다는 사실을 알면! 안 그래? 어? 안 그러냐고."
"잠깐만. 당신 뭔가 오해하고 있어."
"오해? 야. 솔직히 말해 봐. 우리들 너희가 부른 거 아니야? 어? 값싸게 부려먹을 사람들이 필요했지?"
"그건...! 아니야. 우리도 어째서 당신들이 우리 세상에 넘어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트리스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에트로지들은 설명이."
"어쩌라고. 결국 너희는 알고 있었다는 거네? 다른 세상에서 온 우리들이 거기서 죽도록 개고생하면서 그 취벽인지 뭔지를 캤다는 거 말야. 안 그래?"
오묘한 분위기. 이럴 때면 나서서 정리하는 어택조차 애매하게 나유와 륀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륀의 해명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으니 말리긴 말려야겠지만, 한편으로는 나유의 언행에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이들은 하소연할 데 없는 억울함을 품고 있다. 어떻게 잘 보여서 십장으로 일했던 히사시조차도 근본은 다를 것 없다. 결국에는 노예 신세였으니.
아린도 마찬가지.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륀을 원망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저토록 억울해하는 걸로 봐선 정말로 웨리에선 탄광 노동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일절 없이 거래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나유가 륀을 거세게 추궁하고, 륀이 쩔쩔매는 이 광경을 보니 가슴 저편에서 어딘가 시원하고 어딘가 저열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이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던 경험은 모두의 마음속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나쁜 새끼들... 트리스카 그 새끼들이랑 붙어먹었지! 이 개 같은."
"나유야."
"그동안 우리 옆에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어? 아이고, 노예 주제에 주인님께 개겨서."
"남나유!"
저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차오르던 열기는 창공의 목소리에 깔려 다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열기가 가라앉으니 위로 떠올랐던 냉기가 다시 깔린다.
"일단 들어. 아직 말 안 끝났으니까."
"하지만."
"됐다고. 어? 내가 됐다고 하잖아. 아직 안 끝났어. 하려면 끝나고 하던가. ...륀. 계속해."
답답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넥타이를 매만지는 륀.
"그래. 웨리는 비아투 탄광의 주요 거래처였어. 사실 취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다이셀리시아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하지만 맹세컨대... 젠장! 우리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그딴 데에 관심 안 둔다고!"
그녀도 이 상황이 답답했는지 결국 언성을 높인다.
"당신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강제로 끌려오고, 거기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건 참 유감이야! 그렇게 생산된 취벽이 웨리에 공급됐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런데 딱 거기까지야! 우리들이 탄광 노동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고충이 있는지 신경 써야 할 의무가 어디 있어! 그저 적당한 값이 좋은 연구 소재를 공급받아서 좋아하기만 했지! 그게 잘못이라면 사과하겠어! 하지만 그 이상의 책임이라면, 나에게 묻지 마! 묻지 말라고!"
"그래. 수고했다."
토해진 열변을 마주하는 창공은 그저 뚱한 표정을 할 뿐.
"뭔가 묻고 싶은 사람?"
"...하아. 나 담배 한 대만."
결국 나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며 방을 나섰다. 결국 따지고 보면 엉뚱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셈이었다. 잘 살다가 갑자기 노예가 되어버린 지구인, 필요한 소재를 적당한 값에 공급해 준다기에 구매한 마법사.
세상 돌아가는 일이 으레 그렇지 않던가.
"나머지 사람들은요. 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다 해요. 남기지 말고."
물론 창공도 사람인지라 누구 하나 붙잡고 저주의 말을 할 대상을 찾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륀을 쳐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원망할 거였다면 세상의 균형을 맞춰달라는 옛날 왕들과 마주했을 때부터 원망했어야 옳다.
"택이 형. ...아린아. 고다."
연관자라고 할 수 있는 나머지 세 남녀. 하지만 그들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그럼 계속하지."
반응을 체크한 창공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추궁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왜 이것들이 여기 있는 거지. 물론 포를렌탈 교수가 개인적인 연구용으로 쓰고 있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아직은 추측의 단계야."
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포를렌탈 교수는 부교수에 불과해. 겨우 한 단계 차이이지만 부교수와 정교수의 차이는 절대적. 원래대로라면 내게 금방 제압당했어야 할 마법사야. 그녀가 부렸던 짐승도 마찬가지. 정교수 다섯 명이 고전했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런데..."
그렇다면 땀에 전 륀의 옷이나, 거친 싸움의 흔적이 있었던 2층 로비도 설명이 된다. 포를렌탈 교수가 압도적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뭔가 이상했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난 뛰어난 마법사야. 포를렌탈 교수는 그런 내 주문을 너무나 쉽게 격파했지. 게다가 분명 주문을 난사하는 데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어. 정면으로 하는 힘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그녀의 힘이 약해지더군."
순간 륀을 제외한 일행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교수님. 원래 이 방에 들어왔을 때엔 저 취벽들은 빛나고 있었어요."
"빛났다고? 아무런 조작도 없이? 그건 불가능한데..."
"이다음이 중요해요. 나유 언니가 칼끝으로 취벽들 중 하나를 건드렸는데, 모든 빛들이 다 꺼졌거든요."
"혹시 그게 언제야?"
"음... 곧바로 3층에 올라갔으니까... 중간에 천천히 이동하긴 했지만... 3,4분 정도?"
"시간상으로는 얼추 맞네."
아린의 말이 뭔가 힌트가 된 듯, 륀은 취벽 하나를 집어들고선 그것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포를렌탈 교수는 이 취벽들에게서 마나를 전달받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텐데... 아무리 취벽에 저장된 마나가 넘쳐난다 하더라도 둘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 본다면 하퍼의 4요소에 어긋난단 말이야..."
요컨대 취벽에 저장된 마나를 포를렌탈 교수가 원격으로 전달받았다는 말. 륀이야 마법 교수니 그게 되네, 마네 하는 형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 수 있을 리 없다.
"일어난 일이잖아. 가능성은 따지지 마."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하퍼의 4요소는 아주 기초적이고 절대적인 이론인데."
"학문에서 기초적인 이론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여긴 아닌가?"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또 하나 연구 거리가 생긴 것 같네. 나중에 학계에도 보고를 할 필요가 있겠어. 뭐, 동키르케 지부에서 포를렌탈 교수를 심문하면 다 드러나겠지만."
그녀가 쉽게 대답할 가능성이야 물론 없으리라. 하지만 마법사들에겐 항상 여러 수단이 있는 법이다.
"아무튼 취벽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겠네. 그곳에서 에트로지들이 무사히 탈출했다면 앞으로는 구하기 어려워지겠지만. 나중에 유통 상황을 한 번 파악해 볼게. 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딱 타이밍 좋게 나유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다.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직까지 륀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지만, 방금처럼 폭발할 것 같지도 않다.
"남나유. 당신이 내 말을 믿건 말건 그건 당신의 자유야. 이제 마음대로 해. 일행에서 빠지라면 빠질게. 다른 사람들도 그걸 원한다면."
아예 체념한 목소리였다. 한데 의외로 나유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방금 전에는 내가 그냥... 미안했어. 그쪽 말을 끝까지 들어봤어야 했는데. 단지 거기서 있었던 일들이 너무 끔찍했을 뿐이야. 덕분인지 뭔지 소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긴 했지만."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나유라는 사람이 이랬다. 즉흥적이고 감정 전환이 빠르다. 화나 짜증도 쉽게 내지만 그만큼 가라앉는 것도 손쉬운.
그렇게 마무리하고 저택을 나서려는 차, 창공의 머릿속을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우두커니 멈춰 선 그에게 히사시가 의아한 반응을 한다.
"서 상. 갑자기 왜..."
"아니. 어차피 지금 해결 못 해. 가자."
"예? 아... 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어떻게 포를렌탈 교수는 창공 일행의 행선지를 파악하고 핀포인트로 방해할 수 있었을까?
* * *
의문은 남았어도 걸림돌은 남지 않았다.
시장은 형제단과의 결탁을 자백하고 사퇴했으며, 마법사를 잃은 형제단은 다시 동네 깡패 조직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이스트리를 떠날 시점이 된 셈이다.
하지만 원래 멈춰있던 게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준비운동이 필요한 법. 정박해 있느라 관리가 되지 않던 배들도 손을 봐야 했고, 아직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 어부들도 안심을 시켜야 했다. 거기에 밀려있는 수협의 행정 업무들까지.
그렇기에 여관에서 기다리는 건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제는 기약 없고 막막한 기다림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으... 졸려..."
"언니는 맨날 졸리죠?"
식탁에 앉은 아린은 자기 맞은편에서 금방이라도 접시에 머리를 박을 듯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는 나유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아암... 다른 사람들은?"
"오빠들은 수협에 볼일이 있다고 나갔어요. 아침도 거기서 먹고 온다나. 히사시 씨는 먼저 먹고 들어갔고, 아스터 씨는 아침 기도중. 교수님은 오늘 아침은 됐다고 하시네요."
"너랑 나밖에 안 남았네. 여자 둘이서 오붓하게 식사 한 끼?"
"조금 처량한 데이트네요."
"킥킥킥..."
식욕이 동하는 듯 도미 카르파치오를 잔뜩 개인 접시에 덜었던 아린은 순간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린아. 왜 그래?"
"...무슨 냄새 안 나요?"
"냄새?"
그녀의 말에 나유가 접시를 들어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지만 딱히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어제보다 레몬 향이 좀 강한가? 잘 모르겠네."
"그게 아니라... 으으, 기분 탓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식사를 시작하는 아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나유도 포크로 도미와 야채를 크게 한 번 찍었다.
"괜찮지? 난 괜찮은데."
입안에 넣고선 우물우물 씹던 아린은 미묘한 표정으로 음식을 삼켰다.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런가..."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치켜떠진 건.
"아린아?"
"욱... 우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