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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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다툼의 원인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자신의 주장을 약간만 굽히면 다소 불만족이 있더라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어찌 인간들은 항상 다투기만 하는가.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말.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지극히 옳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내 입장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입바른 말을 곁들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오늘도 개인 간에는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며 어느 한쪽이 꺾일 때까지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려 한다. 모두가 옳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때가 되면 뒷전으로 밀려나는 원칙은 공허하기만 하다.
개인 간에도, 집단 간에도, 국가 간에도 이는 마찬가지. 다들 자신만의 '양보할 수 없는 이유', '물러날 수 없는 벼랑 끝'에 매달리며 상대방의 항복을 줄기차게 요구한다. 대부분 그러한 이유는 사실 별게 아니며, 벼랑의 끝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스운 노릇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런 우스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임을 생각한다면 웃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아감은 불합리요, 실은 물러남이 합리인 것을. 이성을 위장한 감성의 나아감은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성적인 물러남은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실로 이 세상에서 분쟁이 사라질 날은 오지 않으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은 오늘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배려. 배려는 분열과 분쟁을 막아 주는 강력한 힘이다. 고슴도치의 바늘처럼 날카로운 창칼로 무장한 마음과 마음의 충돌. 그 사이에서 배려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서로가 서로의 것을 다툴 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다툼을 막는 사람이 우습고 바보처럼 보이는가? 배려는 냉철한 이성의 산물이며, 배려하는 이는 집단의 분열을 막는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을 승리로 이끈다.
이기심이라는 인간 본성을 휘두르는 이들을 배려의 방패로 감싸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인간들은 자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항상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히 돌아갈 수는 없는 법. 모두를 배려한다는 선택지는 실로 하늘의 위대한 법칙이 지배하는 천상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배려하는 이들이여, 분쟁을 조화로 이끄는 이들이여, 주의할지어다. 모두를 배려할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오고 이상의 회색 지대에서 발을 빼야 하는 순간이 다가올 것임을 명심하라.
그런 경우 모두를 배려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과 마찬가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비겁한 일일 수도 있으리. 이쪽의 말도 옳고, 저쪽의 말도 옳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겠는가...
제임스 엘린 저, [아네르의 덕목에 관하여] 中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아스터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린의 손을 꼭 잡으며 따사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린의 표정에선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기쁨, 놀라움, 두려움, 걱정, 사랑...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어지럽기 짝이 없다.
갑작스러운 구역질에 여관으로 달려와 진찰을 본 의사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사실 아주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위험일에 질내사정을 당한 후 언젠가부터 뚝 끊겨버린 생리. 때때로 뜬금없이 쏟아지는 잠. 식욕의 미묘한 저하. 가슴에서 느껴졌던 통증.
아린이 왜 몰랐을까. 다만 모로 봐도 임신에 대한 준비가 됐다고는 보기 힘든 자신이었으니 설마, 하는 마음에 확정 짓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혹여 정말로 임신이라면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까 창공과의 잠자리를 줄곧 회피해 왔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확정되고 나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륀은 창백해진 얼굴로 바깥에 나간 창공과 어택을 부르겠다며 사라졌고, 나유와 아스터. 그리고 히사시가 그런 아린의 곁을 지켰다.
아스터는 아린이 창공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자 자기가 임신한 것처럼 기뻐하며 아린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다는 말로 계속해서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나유와 히사시의 반응이 애매하다.
열아홉.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 1학년. 임신이 축하받을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임신도 마음 편히 축하할 수 있는 일일까? 나유의 경우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는 했지만 지구로 돌아가면 그녀에겐 평생 놀고먹을 재산이 있다. 어차피 꿈도 없고, 당장 아이가 생긴다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린은 아니다. 집이 부유한 것도 아니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대학교를 마치고 로스쿨에 들어가 시험에 붙어야 한다. 거기에 육아가 끼어들게 되면 그런 아린의 꿈은 사형 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런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들이 산적한 상황. 차라리 지구로 돌아간다면 낫다. 언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아이를 무사히 낳는다 해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다른 세상에서 온 엄마는 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그리고... 최후이자 궁극의 문제.
창공도 이 소식에 웃으면서 기뻐할까?
히사시는 물론, 어지간히 창공바라기인 나유마저 거기에는 회의적이었다. 그 창공이? 사실 아직 그의 반응이 미지수이긴 하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창공 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럴... 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터는 분명 그럴 게 분명하지 않겠느냐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어찌 그리 속이 편하냐며 그녀를 비난할 수도 없다.
아스터로선 정말로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이니. 경애하는 사람의 아이가 생겨났다. 비록 자신이 품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 팔 벌려 사랑으로 맞이할 사람이 바로 아스터라는 사람이고,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 김 상?"
"...네."
침을 삼킨 히사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을 꺼낸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서 상에겐... 뭐라고 말씀하실 건지..."
"..."
"두 분 다 대학생이고... 부모님들은..."
힘겹게 나오던 그의 말은 끊기고 말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아린의 앞에서 결국 더는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린의 머릿속에 집에 있을 부모님이 떠오른 것이다. 안 그래도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이 태산일 텐데, 덜컥 임신까지 해 버렸으니 그리움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소용이 없고, 결국 소리 없는 눈물만 흐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린의 눈물을 닦아주던 나유는 잔뜩 굳은 얼굴로 질문했다.
"아린아."
"네, 언니."
울음 섞인 아린의 목소리가 나유의 가슴을 쿡쿡 찔러댄다.
"낳을... 거니?"
"..."
한참을 망설이는 아린. 아스터가 따스하게 손등을 쓸어주자 용기를 얻은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창공이는..."
"오빠가 뭐라 해도 상관없어요. 낳을 거예요."
그녀는 아직은 부풀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단호하게 속삭였다.
"오빠 아이지만, 제 아이기도 하니까요. 알려 줄래요. 이 세상은 험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네 얼굴을 보기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아아..."
긴 한숨을 토해낸 나유가 히사시를 돌아봤다.
"히사시 씨. 그쪽이 창공이랑 아직 좀 껄끄러운 사이인 건 아는데... 힘을 좀 빌려줄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쉽진 않을 거야."
"여, 역시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무슨 힘이."
"해. 하지만이 아니야. 해야 돼."
"괜찮을까요?"
"어차피 여긴 이세계라 창공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도망은 못 가."
"킥킥킥킥킥..."
이야기를 듣던 아린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아린아... 웃음이 나오니? 뭐, 웃으라고 한 얘기긴 해. 실컷 웃어 두자고."
"재밌네요. 재밌지만 아빠를 그렇게 말하면... 뱃속에서도 다 들린다는데."
"아직 안 배워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거니까, 괜찮아."
방 안을 작은 웃음소리가 채웠다가 이내 사라졌다.
긴장을 몰아내려 해도 쉽지 않다. 땅으로 꺼졌다 싶으면 다시 차오르고, 하늘로 솟았다 싶으면 다시 내려오니.
* * *
"..."
어택을 먼저 보낸 창공은 부둣가 의자에 앉아 줄담배를 피워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륀이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저기."
"입 다물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미 그의 입가엔 말라붙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목구멍 저편으로 담배 연기가 들어갈 때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창공은 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한 개비...
세 개비...
열 개비...
어찌나 급하게 빠는지 담배 한 갑이 10분도 채 안 되어 텅 비었다.
"륀."
"네, 주인님."
"근처에 가서 한 보루 사 와."
그의 모습은 평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라 눈을 비빌 정도로 위태로웠다. 망가진 모습을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꼭 감았던 륀은 다시 뜨며 처량한 목소리로 창공에게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뭐라고?"
"이러지 마세요. 제발."
"왜. 고귀하신 대마법사님을 암캐로 타락시킨 남자가 이러니까 너 자신이 더 비참해지기라도 해서? 노예면 노예답게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가서 사 오라고. 당장."
"주인님..."
"빨리."
그 뒤로도 계속 망설이던 륀은 결국 힘없이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창공의 머리는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이래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의 인생 대부분의 경우 그 신호는 무시된 적이 없건만, 창공은 지금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흐트러진 인생 계획?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있을까 우려돼서?
아니면 정리할 거리가 늘어나서?
이유야 어찌됐건 결론은 이미 내린 지 오래다.
그저 지금은 니코틴이 필요했다.
아주 많은 니코틴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