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하늘 (2)
* * *
그렇게 네 갑을 피우고 나서야 창공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이 생기기 전엔 기회가 되면 줄담배도 줄곧 피우고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많이 피운 적은 처음이었다. 담배 때문에 산소가 뇌까지 제대로 안 간 탓인지 시야가 자꾸 흔들렸다.
창공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아슬아슬한 꼴이 마치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용케 넘어지지는 않고 똑바로 여관을 향했다.
"손수건 있어?"
"여기..."
륀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그가 입에 대고 크게 한 번 기침하니 하얗고 깨끗하던 손수건이 빨간 피로 잔뜩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막혔던 목이 뚫려 개운한 듯 후련한 표정으로 그것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피 토할 것 같다는 심정이 이런 거로군."
"농담이 나오세요?"
"지금 해 놓아야 나중에 안 나오지."
차라리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륀에게는 더 안심이 됐다. 당당함을 넘어선 뻔뻔한 모습. 어떤 문제든지 문제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갑자기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동시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을 위장하기 위한 과장된 연기의 느낌. 그녀를 조교하며 지배하고 농락하던 때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륀은 그런 창공을 안쓰럽게 느끼는 자신을 안쓰럽게 느꼈다. 정말로 머지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무너지고 완전히 굴복하는 날이. 우습게도 그건 창공이 무너지는 날일 테고. 비 맞고 처량해진 짐승을 짓밟지 못하고 안쓰러워하며 품는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는 거겠지.'
여관에 가까워질수록 비틀대던 창공의 움직임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행동거지에선 더 이상 만취한 사람 같다는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평상시처럼 완벽.
어쩐지 폭풍전야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걸까. 하지만 겉으로라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보다 설득적으로 들릴 테니.
이윽고 두 남녀는 여관에 도착했다.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창공. 이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게 과연 무엇일지는 륀으로선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 아린과 나유가 쓰는 방문을 연다. 이로써 좁지도 않지만 크지도 않은 방 안에 모든 일행이 모이게 되었다. 일곱 명이나 모였으되 공간은 적막하다. 숨소리조차 내기 부담스럽다는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
아린은 침대에 앉아 반쯤 이불을 덮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서 저마다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창공이 한가운데에 서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 마치 청문회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
절로 긴장이 될 법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창공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만 평소보다 담배 냄새가 진하게,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풍기는 건 다들 알 수 있었다.
"오빠."
화약고 위에 앉은 것만 같은, 작은 불씨 하나로 세상이 뒤집힐 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린이었다.
"저 임신했어요. 오빠 아이."
"듣고 오는 길이야."
두 남녀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어찌나 평온한지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미리 입을 맞춘 사람들끼리의 대화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네 행동이 좀 수상하긴 했지. 확신은 못 해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 건가?"
"맞아요.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해요. 오빠도 당황스럽겠지만, 저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라."
"그렇겠지. 넌 이제 대학교 1학년이잖아. 난 2학년이고. 별로 상상하고 싶은 상황은 아니지."
"네. 오빠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지구로 돌아가도 다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이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안다니 다행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과는 반대로 다른 일행들은 하나같이 긴장이 역력한 기색이었다. 입술은 잘근잘근 씹어대는 사람, 손가락을 자꾸만 지분거리는 사람, 흔들리는 눈동자로 창공과 아린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
하지만 언제까지나 빙빙 돌려서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핵심과 직접 맞부딪혀야 하고, 창공이나 아린이나 그것을 회피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이 아이를 낳는다면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어요.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결론이 뭐야."
"낳으려고요."
담담한 목소리.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말을 꺼내기 위해서 얼마만큼 마음의 준비를 했을까.
듣는 창공은 눈썹조차 꿈틀거리지 않았다.
"륀. 물어볼 게 있는데."
그는 아린에게 대답하는 대신 자기 뒤에 있는 륀에게 말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이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낙태 방법이 어떻게 돼?"
"야! 창공아!"
"창공 님!"
얼굴빛 하나 안 바꾸고 낙태를 입에 담는 창공을 향해 나유와 아스터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스터는 둘째치고서라도... 적어도 나유는 창공이 환영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나올 줄도 차마 몰랐다.
아니, 실은 알았지만 미약한 기대감 때문에 애써 무시한 걸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도 언젠가 창공의 아이를 갖고 싶었으니까. 사랑하는 남자였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대감 때문에.
사실 나유가 특별히 순진한 건 아니었다. 창공의 발언은 그만큼의 파급력을 가졌고, 어떤 의미로는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린을 제외하고선.
제일 기겁해야 할 사람은 그녀겠지만 표정만 얼굴을 붉히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다만 이불을 쥔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갈 뿐이다.
"내가 묻잖아. 여기선 낙태 어떻게 하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창공은 자기 발언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처럼 재차 륀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륀은 그의 물음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창공의 노예이기 이전에 그녀 또한 모성애를 간직한 여자였으니까.
"오빠."
"왜."
혼란을 잠재우듯 창공과 아린의 대화가 다시 시작된다.
"오빠 아기예요. 싫어요?"
"싫어."
"이유는요?"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고. 넌 지금 지극히 감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건 지극히 널 위한 제안이야."
"대체 어떻게 낙태가 절 위한 제안이 되는데요?"
"뭘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린 단체관광을 온 게 아니야.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무기를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아닌 게 아니라 넌 화살에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었어. 너 그 아이 무사히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유산할 거라고요?"
"어."
창공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와 아스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떡, 벌린다.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저주라도 하는 것 같아?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제부터 넌 쉽게 움직이지 못하겠지. 만삭에 가까워지면 뛰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라고.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 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겠냐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야."
"그 말은 오빠를 위해서인가요, 일행을 위해서인가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행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
"아... 그런가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아린의 두 손은 자신의 배를 감쌌다. 무의식적으로 안에 있는 생명을 지키겠다는 것처럼.
"그럼 다른 일행들한테 물어보죠. 정말로 그렇게들 생각하."
"이성적으로 판단이 되겠냐?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다 임산부 하나쯤은 자기가 지키면 된다고, 방해는 되지 않는다고 대답할 텐데."
감정 없던 그의 목소리에서 점점 짜증과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네가 지금 노리는 게 그거 아니야? 어? 한 번 물어보라고. 네가 원하는 대답을 안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말해줄까? 다시는 없을 천하의 개새끼가 될 거야. 뱃속에 있는 아기를 죽여서 자기 편안함을 얻으려는 몹쓸 인간으로 몰리겠지. 난 지금 그 사람들을 위해 대신 나서주고 있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는 거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오, 당연하지. 내가 심하게 말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아뇨. 오빠가 날 잘 아는 것처럼, 나도 오빠를 잘 알아요. 기대 안 했어요. 실망도 안 해요.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뭔가 다른 반응을 보여줬으면 했어요."
"네가 아직 날 잘 모른다는 증거겠지. 낳아? 낳는다고? 아린아. 이건 널 위한 제안이기도 해."
참을 수 없다는 듯 나유가 소리쳤다.
"창공아!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 말이 심한지 아닌지는 듣고 판단해! 아직 안 끝났으니까! ...넌 낳겠다고만 하지 실질적인 대책은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어. 네가 걸리적거려서 다른 사람들이 죽으면? 아니면 네가 죽으면? 유산의 충격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데. 마냥 일이 좋게 풀릴 거라고 생각해? 이대로 낳겠다고 하면 행복할 거라고? 정말로?"
"오빠야말로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오빠의 그 잘난 계획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계획은 성공을 전제로 하지, 실패를 전제로 하는 계획이 무슨 소용이죠? 오빠는 내가 이 일로 스트레스 받아서 유산했으면 좋겠죠? 그런 거죠?"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걸."
"하... 글쎄요."
"되도 않는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게 할 생각 말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아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창공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무너질 것 같아도 억지로 버텨야 했다.
이 싸움은 가장 소중한 것이 걸린 싸움이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