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34화 (134/178)

〈 134화 〉 하늘 (3)

* * *

"창공 님. 말씀을 거두세요. 제발. 이런 건... 잘못된 거 아닌가요?"

"아스터."

창공은 아린을 노려보던 눈으로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사실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말했다시피 자신의 주장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주장이고, 평소에 합리네 뭐네 떠들던 사람들도 이럴 때엔 아린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고.

따라서 그는 당장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과, 말은 안 해도 결코 찬성은 안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린의 힘은 여론에서 나온다. 그가 뜻한 바를 이루려면 여론을 굴복시켜야 한다.

아무리 창공이라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쉽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내게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강의할 생각이야, 아스터? 아니면 도덕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건 내 문제야. 그리고 난 내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이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제발 다시 생각해 주세요. 지금 아린 님의 뱃속에 있는 건 창공 님의..."

"바로 그래서 문제인 거야. 그게 문제라고. 젠장! 이건 내 잘못이야. 오답을 수정하려고 하는 게 그렇게 아니꼬워?"

"아..."

아스터는 창공을 상대하며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지금 그녀가 그랬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생긴 아이에게, 그리고 아이를 품은 여인에게 창공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절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에 만약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한 적이 없거늘, 넘을 수 없는 벽과 마주한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경애하는 남자가 그렇다면.

"오답?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나유의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창공아. 그럼 나는? 만약 내가 임신했더라도 똑같이 대했겠네? 응? 네 '오답'을 수정하려고 했을 거라는 말이잖아."

"말꼬리 잡으면서 감성적으로 물고 늘어지려고 하지 마. 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데 왜 자꾸 너희는 현실에서 동떨어지려고 하지?"

"아린이가 다른 일행들에게 민폐가 될 거라고? 난 아니야! 나한테는 아니라고! 아린이가 못 뛰면 내가 업고서라도 뛸 거야! 불편한 게 있으면 내가 나서서 도와줄 거고! 그걸 너보고 하라고 아무도 말 안 했어! ...창공아. 솔직히 인정하자."

"솔직히 뭘."

"넌 그냥... 네 아이라는... 네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생기는 게 싫은 거잖아. 왜 그런지 말해 볼까?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 네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무도 없어. 단지 네 욕구를 풀기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 두고 있을 뿐이지. 내 말이 틀려?"

목소리에서 떨림이, 슬픔이 느껴진다. 언젠가 나유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창공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안다고. 그럼에도 곁에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하지만 우린 널 사랑해. 적어도 나랑 아린이, 아스터는 널 진심으로 사랑해. 일이 이렇게 된 지금에 와서도 난 아직까지 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 단순한 성욕 분출구로 생각해도 돼. 그런데 이러지는 마. 널 사랑하는 여자가 소중하게 품은 아이를 오답이라고 부르지 마."

그랬던 그녀의 인내가 끝내 임계점에 달하게 만든 이번 사건. 창공이 자만에 가까웠던 자신감으로 아슬아슬하게 컨트롤했던 감정선의 폭발이었다.

나유와 아스터에게 이번 사건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최후의 후퇴선. 언젠가 자신들도 그와의 사랑의 결실을 간절히 바라는 상황에서 창공이 아이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가진다면 당연히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체념하고 관계를 정리하거나, 싸워서 창공의 뜻을 철회시키거나. 그녀들이 고른 선택지는 후자였다. 사실 전자는 죽어도 고르기 싫었다.

선택한 남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악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포기해야 한다면, 마음을 끌어안고 죽을 뿐.

"제가! 제가 도울게요! 할 수 있어요!"

아스터도 필사적으로 외친다.

"사제들은 산모를 돕는 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교육받아요! 항상 아린 님 곁에는 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창공 님이 신경 쓰지 않으시도록 도와드릴 테니까요! 창공 님께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도... 저희가, 저희만 믿고 계신다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창공은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일행들이 한 명 때문에 자기 몫을 못 하게 된다고. 몇 번이고 똑같은 말 하게 만들지 마. 우린 여유롭게 관광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너희는 너희들 입장만 생각하지. 일행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을 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 상! 그 일행들이 상관없다면요?"

바로 그 순간,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히사시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앞에 나선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빠져!"

"으윽...!"

창공이 강하게 윽박지르자 움찔거린 그였지만, 그럼에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지 불안하게 다리를 떨면서도 발을 뒤로 내딛지는 않는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나설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차피 서 상. 제가 써먹기 편한 잡부로밖에 생각하지 않으시잖습니까?"

"평소에 무시당해서 불만이었나 본데, 그건 다 너의 낮은 자존감이 만들어 낸 환상이야. 난 너한테."

"상관없잖아요. 잡부."

정말 필요한 때에 내는 의외의 용기. 평소에는 죽어지내던 사람이라도, 그래서 다들 무시하는 사람이라도 용기를 내어 달려들 때가 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사람들의 용기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저는 좋습니다. 잡부면 어떻습니까. 서 상처럼 활로 저격을 하거나, 김 상처럼 마법의 연주를 하거나... 사람을 치료하지도, 앞장서서 싸우지도 못하지만 그게 어떻습니까.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행복합니다. 아하! 그리고 이 잡부에게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생긴 모양입니다! 저라면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쓸 필요 없이 김 상을 돌볼 수 있겠군요! 어떠십니까, 서 상."

"하하하하..."

분노와 허탈, 당황마저 느껴지는 웃음소리. 어지간한 창공도 히사시의 반항은 생각지 못한 것인지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는 평소 히사시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무시하던 존재에게 일격을 허용한다면 그 타격은 다른 일격보다 몇 배는 더 큰 법이다.

나유와 아린은 이쯤에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창공의 논리는 평소의 그 논리가 아니다. 마음으로는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결국에는 납득하게 만드는 창공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거칠고 불안정하다. 이럴 때에 다 함께 하나로 뭉쳐 나선다면 창공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한데 어택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항상 창공을 꺼려 하던 히사시마저 용기 있게 나섰는데 말이다.

결국 조급해진 나유가 그런 어택을 재촉해야 했다. 사실 덩치는 산만한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만 하는데 그 누군들 조급해지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는 않아도 최연장자였으며, 창공도 그의 합리적인 조언은 귀담아듣는 편이기에 더욱 그의 개입이 필요했다.

"택이 오빠! 오빠는 왜 아무 말도 없어? 뭐라고 말 좀 해 봐! 평소에는 무슨 일 있으면 나서서 조정하는 게 일이라며!"

하지만 어택은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죄책감은 있는지 쉽사리 눈은 마주치지 못하는데, 결국 나서지 않는 태도는 변함이 없다.

"하... 그렇단 말이지. 어이, 거기! 그쪽!"

다음 표적은 창공의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륀이었다.

"교수라며? 내가 아는 교수들은 주둥아리 터는 데엔 선수던데. 그쪽도 뭐라고 말이나 좀 해 보지? 찬성을 하던 반대를 하던 어디 뭐라고 지껄이나 이야기나 한 번 들어 보자."

"...몰라. 모른다고."

"아하, 자기 분야가 아니라는 거지? 위대하신 마법 이론인지 뭔지에선 이럴 때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는 않나 봐?"

륀은 끝내 입을 다무는 것으로 응수했다. 나유에겐 그것이 암묵적으로 창공의 편을 드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 속내는 더 복잡했다.

일단 어떤 면에서는 창공과 비슷한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 륀은 그의 의견이 자못 이성적으로 느껴졌다. 임산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렬 안에 끼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평민들조차 임산부 손조차 빌리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게 생긴 가정이 아니고서야 임산부들은 쉬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들 일행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할 운명이며, 당장 다음 일정으로 오지를 헤매야 할 사람들이다. 제각기 목적이 있는데 오직 아이를 위해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어디 한적한 곳에서 요양하는 건... 륀의 생각엔 합리적인 선택은 못 된다.

문제는 동시에 그녀가 창공에게 예속된 여인이라는 것. 증오하면서 사랑하는 남자. 창공의 아이를 품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생 자신과는 관련 없을 거라고 여겼던, 한 아이의 어머니라는 개념을 점점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직은 오지 않은,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어떤 미래를 바라는지는 그녀 스스로에게 질문해도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녀 안의 어떤 부분이 창공의 말에 격렬히 반대한다는 건 확실했다.

결국 륀이 택한 건 침묵과 도피. 어디선가 비겁하지도 않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마법 이론의 퐁파두르 교수는 기존 지식으로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일엔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하며 판단을 유보한다.

그리고...

서창공의 노예 륀은 감히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단지 내려지는 결정에 고개를 끄덕일 뿐.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쪽은 필요 없으니까. 방해하지나 말고. ...창공아. 이게 우리들의 결론이야. 아기는 포기 못 해. 절대로."

"남나유..."

항상 이름을 불러 주었건만, 나유는 창공의 그런 호칭이 너무나도 어색했다. 계속 이렇게 버틴다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경고인 걸까.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네가 날 다시는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대신 너와 아린이의 아이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녀의 굳은 결심이 표정에서도 느껴지는 듯했다. 나유의 이름을 으르렁거린 창공은 날카로운 시선을 일행들의 얼굴에 쏘아보냈다. 결연한 표정의 아린. 그녀를 지키듯 단단히 버티고 선 나유와 아스터, 히사시.

어택에게 시선을 옮기니, 그는 죄인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륀도 마찬가지.

결국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문을 닫는 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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