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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35화 (135/178)

〈 135화 〉 하늘 (4)

* * *

창공은 그대로 여관을 나와 길거리를 걸었다. 금방이라도 불을 붙일 것처럼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들었지만 입에 물 듯 말 듯 갖다 대길 반복하다 골목 저편으로 집어던졌다.

"씨발..."

패배감. 탈력감이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다분히 실용적이고 후회하기보다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길 좋아하는 창공이었지만 어쩐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완전히 망가졌네."

스스로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완벽했던 그의 인생인지, 그와 일행들 사이의 관계인지, 그도 아니면 현재 심리 상태인지는.

어쩌면 그 세 가지 모두, 그리고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 다른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망가졌을 것이다. 그제서야 창공은 인정했다. 지금 자신은 완벽하게 흐트러진 상태라고.

륀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줄담배를 피울 게 아니라, 그녀와 상담하며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여관으로 곧장 쳐들어가 낙태 이야기를 꺼낸 건 지극히 성급하고 감상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깨달은들 어디에 쓰겠는가. 그는 망가졌다.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망가진 끝에서야 그런 자신을 관조할 수 있을 정도로. 답은 보이지 않는데 문제는 산적해 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포구 근처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수에 젖는... 그따위의 행동은 그가 진심으로 혐오하는 부류의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대책을 세우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바닷가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 그와 아린 사이에서 생겨난 아기.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창공으로서는 드물게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당황이다. 당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의 어설픈 대처는 당황이라는 단어로밖엔 설명될 수 없다.

그와 아린 둘뿐이었다면 그녀가 거부하더라도 어떻게 조치를 취했겠지만, 아린은 이미 강력한 원군들을 얻은 상태. 아무래도 강제로 낙태시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정말 그런가?'

창공은 눈을 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계속 생각했다.

* * *

"이겼... 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륀과 어택은 말없이 방을 나가고, 아린과 나유. 아스터와 히사시가 그대로 남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논리는 허술했을지라도 창공에게 맞서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다.

원래부터 그와 맞서는 것을 꺼려 하지 않았던 데다 아이까지 품어 물러날 수 없는 아린이야 그렇다 치고, 창공이 인생의 전부인 나유와 원죄와 성격 때문에 항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히사시에겐 특히 더.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이 승리가 일시적일지 혹은 영속적일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지만 강적을 물러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충분히 자축할 만한 일이다.

"후하, 이야아. 이게 진짜. 후우우... 나 엄청 떨렸어."

나유는 아직까지 흥분이 풀리지 않는 듯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먹을 흔들었다.

"그리고 히사시 씨. 제법인데? 그래, 이게 남자지. 남자가 된 기분이 어때?"

"하하하..."

히사시도 자기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요? ...그래도 두 번은 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튼 잘했어. 아린이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그 말. 빈말은 아니지?"

"그야 물론이죠."

"좋았어.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제부터 오빠라고 부를게. 어차피 나보다 나이도 한 살 많고... 오빠 자격 충분하네!"

"아,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남 상."

"그래도 존댓말이야? 뭐, 상관없지만."

이걸 의기투합이라고 할 수 있을진 의문이었지만 실제로 나유는 히사시의 용기에 꽤나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히사시가 방금 같은 상황에서 가만히 있었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나 했을까.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 창공조차 그의 소소한 반란에 당황하지 않았던가.

"창공 님..."

그리고... 잠시 떠올랐던 분위기는 아스터의 탄식에 다시금 가라앉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혹시 너무 놀라셔서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그건 아니겠죠."

아린이 제 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빠도 사람이니까. 놀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오빠는 오빠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닐걸요. 진심이에요. 그건."

"도대체 어찌..."

"오빠는... 오빠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요. 알면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지만 그래도... 상처가 없는 건 아니네요."

"아아, 아린 님... 용기를 내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해요."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걱정이네요. 엄마랑 아빠에게서 사랑받는 아기로 키우고 싶은데."

"대신 누나가 대기 중이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

힘을 북돋아 주려는 의도인지 나유가 크게 소리쳤다.

"용돈도 많이 주고 할 테니까! 성북구에 괜찮은 건물 하나 있는데."

"그런 건 좀... 그보다 누나예요? 아직 성별이 뭔지도 모르는데요."

"아니면 언니? 딸은 내가 낳을 테니까 아들이었으면 좋겠네. 창공이 어린 시절 닮은... 으음...!"

순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작은 창공을 떠올렸다. 귀여운 얼굴과 몸짓으로 냉소적인 비난과 빈정댐을 주위에 난사하는 어린아이를.

"귀여운 딸이 좋겠습니다."

히사시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에 아스터는 그것도 좋지 않으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저는 보고 싶은데요. 꼬마 창공. 아!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엄마랑 아기 둘 다 건강한 게 중요하니까요."

"에휴... 난 잠깐이라도 담배 끊어야겠네. 다른 사람들도... 아, 그래."

누군가를 떠올리는 나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택이 오빠. ...방금 봤어?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아, 이거 참. 그렇게 비겁한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아린아. 사정이라고? 그게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 히사시 오빠를 보라고. 이게 진짜 남자지. 세상에, 평소에는 나보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느니, 같은 일행끼리 친하게 지내야 한다느니 별말 다 해놓고선."

똑. 똑. 똑.

청산유수로 나오던 나유의 불만은 노크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창공? 륀? 어택?

"들어오세요."

아린의 허락이 떨어지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어택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듬직한 모습이었던 어택. 지금 그에게서 바람 빠진 풍선의 느낌이 난다면 과장된 것일까.

"아린아."

"네, 오빠."

"사과하고 싶다면... 받아 줄래?"

그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문가에 서서 아린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유의 입장에선 정말로 어택에게 실망했던 차에 이렇듯 모습을 드러내 주니 좋은 사냥감이 따로 없는 셈이다.

"사과? 이제 와서? 택이 오빠. 지금 사과를 할 게 아니잖아. 그렇게 미안하게 생각할 거였으면 방금 나서서 창공이를 말리던가. 이건 아니라고 일침 넣던가! 이제 와서 사과하면 방금 있었던 일이 없던 걸로 바뀌는 거야?"

"네 말이 맞아."

그녀의 비난에도 어택은 아무런 불만 없이 선선하게 인정했다.

"맞아? 맞다고? 지금 오빠가 얼마나 비겁해 보이는지 알아? 오빠는 평소에 나보고는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해놓고서는 자기가 막상 그렇게."

"언니. 잠시만요."

기관총탄처럼 뿜어지던 나유의 성토. 아린은 조용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다시 어택을 향했다.

"오빠. 왜 그랬어요? 나 알아요. 오빠 생각이 엄청 깊은 사람이라는 거. 알게 모르게 우리들 배려해 주는 거. 처음에 탄광 탈출할 때도, 알펜시아 산맥에서도. 창공 오빠는 항상 오빠 보고 뒤에 서라고 했지만, 묵묵하게 받아들였잖아요. 그 자리 신경 많이 쓰이는데도."

아린의 말대로였다. 맨 뒤에 선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고,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없기에 체력 소모가 제일 심하다. 게다가 창공이 어택에게 후미를 맡긴 까닭은 경계를 맡긴다는 의미도 있었으니 그가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택은 매번 창공이 부여한 책무를 받아들였다. 싸움이 일어나면 앞으로 나서서 달려드는 건 기본. 어택은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설령 창공이라 해도 엇나간다면 나서서 바로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런 오빠가 아까처럼 행동했을 때엔 분명 이유가 있어요."

"...같잖은 이유야."

"그래도 괜찮으니까."

망설이던 어택은 긴 한숨을 내쉰 끝에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방금 창공이가 했던 언행은 분명 잘못됐어. 그것도 아주 크게. 아무리 준비가 안 됐어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네."

"이번 일은... 둘 다 충분히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야. 근본적으로는. 그래도 아린이 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책임을 지려했어. 대단하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 걔도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그래. 내가 형이니까 나서서 뭐라도 좀 말했어야지. 말하면 일단은 듣는 애니까."

그리고 다시 한숨.

"그런데 참...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더라. 누군가는 또 얘 편을 들어줘야 하는데. 하. 진짜 개새끼네."

"..."

"얼마나. 얼마나 부담이 많겠냐고. 우린 그동안... 그냥 걔가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만이었잖아. 독선적이고,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굴지만 그래도 창공이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그래. 걔 정상 아니야. 원래 삐딱했던 애가 방금은 최악이었고. 거기서 내가 몰아붙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니까 막막하더라."

"오빠."

"비겁한 놈이지, 그래. 나유 말이 다 맞아. 평소 정의로운 척은 다 해놓고서 진짜 필요할 때 나서지도 못하고. 나보다 히사시가 더 나아. 훨씬 낫지."

"형님..."

어택은 지금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이 방 안에 있는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살면서 자그마한 용기를 내지 못해 놓쳐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린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의기소침한 사람을 위로하듯, 다정한.

"저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모두들 그러죠. 사람들은 때로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기회는 많으니까. 드러나지 못한 작은 용기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큰 용기가 될 테니까. 다음에는 오빠가 바라는 오빠가 되기를 바랄게요.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과를 받아들이고 말고요."

"...고맙다, 아린아. 정말로."

그는 팔을 들어 소매를 눈가로 가져가다가 황급히 내렸다.

"가볼게. 네가 편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요."

그렇게 군복 입은 사내는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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