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36화 (136/178)

〈 136화 〉 하늘 (5)

* * *

"음... 그래. 뭐.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잘 됐네. 그래."

약간은 떨떠름한, 동시에 어쩐지 살짝 미안한 것도 같은. 애매한 목소리와 애매한 표정. 나유는 어택의 사과에 살짝 충격을 받은 듯 매끄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번 연달아서 충격이 온 셈이다. 그 어택이 방금 같은 때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으로 사과했다는 것. 어느 쪽이든 그녀가 평소 어택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빠르게 무너졌던 마음속 평판은 그만큼 빠르게 회복되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만큼의 진심을 담은 사과는 대부분 먹혀들어간다.

"어쨌든 이대로 잘 마무리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슬슬 정리되어가는 분위기. 이제 이번 사건도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히사시의 한숨 섞인 바람과는 달리 제일 부담스러운 상대가 남아 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아스터의 발랄한 목소리에 의문을 표했다.

"이미 이렇게 되었는걸요? 지켜냈어요. 우리가 이겼다고요. 창공 님께서도 나가신 걸 보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고 계실 게 분명해요. 아무리 그분이라도 홀로 모든 것에 맞설 수는 없는 법이죠. 결국에는 허락하실 테니 마음 놓으셔요."

"그러니까... 어차피 일은 이렇게 됐고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하니까 홀로 반대할 수는 없다?"

"네. 그렇지 않을까요?"

"하긴... 서 상이 저래 보여도 나름 다른 분들의 동의를 얻어 가면서 진행하긴 했죠..."

"맞아요! 그리고 신께서 주신 생명을 인간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법. 아무리 제가 사랑하는 분이라도... 사랑하는 분위기에 엇나가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어요!"

마지막 발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스터의 말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의외로 창공은 독선적인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은 함께 보유하고 있다. 그가 여론을 신경 쓰지 않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만 진행했다면, 방금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대신 다 방을 나가게 하고 아린과 1 대 1 대화를 나누었을 터.

"오빠의 한계라는 거죠. 그건."

"그건 무슨 말이야?"

아린은 의문을 표하는 나유에게 살짝 웃음기 어린 얼굴로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뭐랄까. 오빠는 의외로 겁쟁이거든요. 항상 일행들... 아니.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달까요. 거기에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 때가 있어요. 적어도 남들에겐 항상 합리적이고 올바른 리더처럼 보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잖아."

"약점이죠. 의외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대놓고 여론에 거스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잖아요. 한 번에 두 가지 토끼를 잡으려 하니까 둘 다 놓쳐버린 거죠. 바보. 겁쟁이 오빠. 전에도 겁 많은 모습을 보여주더니."

"언제?"

"그건...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오빠의 비밀을 살짝 엿본 때라고 해야 할까.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그녀는 창공과의 첫날밤을 떠올렸다. 쓰디쓴 첫키스, 몽환적인 첫경험. 세상의 꼭대기에서 환희를 외친 그날을.

괜찮았다. 창공이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사랑의 결실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려 해도.

슬픔과 시련의 날은 굳센 의지와 행복했던 기억으로 버텨낼 수 있으니까.

아린을 제외한 모두가 어리둥절하던 그 순간, 기척도 없이 방문이 열리며 모두에게 익숙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창공. 표정 없는 표정. 침착한 몸짓. 내심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외형만큼은 평소의 그로 돌아온 것 같다.

"아직까지들 있었어?"

목소리도 마찬가지. 뚱한 것도 같고, 일단은 뻔뻔스러움이 가득 느껴지는. 적어도 방금처럼 폭발할 듯한 전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폭언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 그였지만.

더 이상 그의 몸에서 담배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미세한 짠내와 비린내. 바닷가에서 해풍을 잔뜩 맞고 온 사람의 그것이다.

"자리 좀 비켜 줄래. 아린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너무 심하게 하면."

"너희가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나가. 도장이라도 찍어 줄까?"

나유, 아스터, 히사시. 그들은 걱정이 담긴 얼굴로 아린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들이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남을 명분은 없다.

창공과 아린을 제외한 모두가 나간 뒤, 그는 방 한구석에 있던 의자를 침대 앞으로 끌어당긴 다음 거기에 앉아 아린과 대면했다.

"정리한 모양이네요."

"맞아."

그는 다리를 꼰 뒤 바지 밑단을 손으로 꽉, 거머쥐었다.

"낳아도 될까요?"

"낳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허락을 구하는 건 뭐야."

"오빠 말이 듣고 싶으니까요. 낳아도 된다고."

"마음대로 해. 네가 고생하지 내가 고생하냐?"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린은 어쩐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오빠라는 사람이. 항상 우위에 서고 싶어 하고, 졌으면서도 이긴 척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요. 어린애 같으니까요. 오빠도 제 뱃속에 좀 들어가 볼래요?"

"넌 남들이 널 싫어하는 이유를 좀 알 필요가 있어. 너 친구 없지? 그런 식으로 아는 체를 함부로 하니까 없는 거야."

"오빠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참 재밌네요. 가슴속에 새길 법한 좋은 충고에요. ...아."

아린은 스스로 내뱉은 말에 살짝 놀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건 오빠한테 옮은 건가? 부부는 닮는다더니.'

"비꼰 다음에는 놀라더니, 이제는 웃어? 우는 건 언제야? 손수건 가져다줄까?"

"조심해야겠네요. 우리 아이가 이런 거 배우면 안 되니까."

'우리 아이'라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창공.

"본론으로 돌아가자. 낳는 대신 조건이 있어."

"까다로운 아빠네요. 그렇지, 아가야?"

"...난 일정 조정 따위는 안 해.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일행들 굴릴 거야. 너까지 포함해서.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상황이면 안 쉬어. 바다로 가야 하면 바다로 갈 거고, 산으로 가야 하면 산으로 갈 거야."

"끝인가요?"

그까짓 거 별거 아니라는 듯한 아린의 목소리.

"아니. 하나 더 있어. 그렇게 하다가 만약 유산하는 날엔 내 잘못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일행들 선동하지 마. 짜증 나니까."

담담하게 담담하지 않은 내용을 내뱉는 창공. 그리고 담담하지 않은 내용을 담담하게 듣는 아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오빠랑 제 아기니까 엄청 끈질기고 고집 셀걸요. 어떻게 감당할지 둘이서 미리 고민이나 해 두는 게 어떨까요?"

"마지막 조건. 지구로 돌아가면 난 너 몰라. 뱃속의 그것까지 포함해서. 돈은 줄게. 귀찮게 하지는 말고. 그게 전부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건 확실히 폭언이었다. 과연 아린도 이런 말에는 무덤덤하게 넘어갈 수 없었는지 살짝 충격받은 얼굴이다.

"...그게 말인가요?"

"왜. 한국에 가면 내가 너랑 반지 교환하고 상견례라도 할 줄 알았어? 난 싫어. 지금 결정해. 동의 못 하겠다면."

"오빠라는 사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한 가지는 확실하지. 넌 나를 몰라. 적어도 그거 하난 맞아. 그래서 어떻게 할래?"

"오빠는 다른 사람에게 혐오 받는 게 좋은 건가요? 진심으로? 제대로 된 인간관계는 쌓을 생각도 없고, 그렇게 집. 직장. 집. 직장. 반복만 하다가 퇴직. 정치를 하든 뭘 하든 하다가 실버타운에서 홀로 늙어 죽고. 그런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전에도 이런 얘기 몇 번 했고, 난 충분히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 내 질문에 대한 네 답은 뭐야. 빨리 말해. 마지막이니까."

"그렇게 해요. 오빠가 원한다면."

그녀는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난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네요. 오빠가 갑자기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내가 널 평생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 같은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뭐...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대신 저도 조건 하나 있어요. 오빠는 세 개인데 전 하나니까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나요?"

"그 조건이 뭔지에 따라 다르겠지."

"...이름. 태명은 내가 지었으니까, 아이 이름은 오빠가 지어요."

태명이야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어떻게든 창공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아린의 생각은 그로 하여금 짧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아무리 떨쳐내고 싶어도 이 아이는 홀로 생기지 않았어요. 반은 제가, 반은 오빠가. 그러니까 그 사실만큼은 평생 간직하세요. 오빠가 부친인, 이름도 지어 준 아이가 이 세상에 분명 있다고."

"마음대로 해."

괘씸한 발상이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게 겨우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이름? 그까짓 이름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애완동물에게도 붙이는 게 이름이니까.

한편 아린은 창공의 선선한 수락에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하늘아, 들었어? 아빠가 이름 지어주실 거래."

"뭐라고?"

"하늘이요. 하늘. 아이 태명. 마음에 들어요? 오빠 마음에 안 들어도 별로 바꿀 생각은 없지만."

과연 이건 아린 나름의 블랙유머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이름일까. 창공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 갑자기 아린을 뒤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몇 개월이지?"

"계산해 봤는데 두 달 정도 됐네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름 기대되나요?"

"아니. 알아두면 나쁘지 않으니까."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나가버린 창공. 방에 홀로 남겨진 아린은 그제서야 눈을 감고 침대에 완전히 몸을 눕혔다.

사랑이 가득 담긴 미소와 함께 아직 부풀지 않은 배를 둥글게 쓰다듬으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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