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녹색 사막
* * *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게 이렇게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던가?"
이스트리항 3부두. 아우스트로 수산 협동 조합의 조합장 안젤로 아우스트로는 어선들이 홋줄을 걷고 출항하는 모습을 보며 감격에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아침에 몰락할 뻔했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활로가 트인 것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거짓말처럼 형제단은 와해되었고, 시청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어 걱정 말고 원래대로 어업을 재개하라는 공문을 받았을 때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고민하지 않는다. 설령 고민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어선들이 원래대로 출항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전부 갈기갈기 찢어져 바닷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로 자네들이 해결한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아우스트로는 창공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라면 너무나 감사할 일이지만, 뜻밖의 일이기도 하여 왠지 모를 멋쩍은 웃음밖에 지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깡패 자식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아우스트로 씨를 건드릴 놈들은 없을 겁니다. 원래대로 작업을 재개할 수 있으니 하셨던 말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바다의 사나이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나. 안 그래도 자네들을 비타까지 데려다줄 선장을 수배해 놓은 참일세. 그렇지만 이건 참...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 풍기던 3부두는 완벽히 활기를 되찾았다. 무채색의 광경처럼 보이던 3부두의 풍경은 다시 형형색색하고 역동적인 색감으로 돌아왔고, 온갖 일꾼들과 상인들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뭐랄까. 얄미운 사람들이네, 참. 어려울 때엔 도와줄 생각 하나 않고 다른 곳에서 장사 잘만 하더니 이제 여기가 좀 필 것 같으니까 돌아온 거야?"
"하하하..."
나유의 빈정거림에 아우스트로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시뇨리나 말대로 나도 저들이 얄밉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사람들의 심리인 것을.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봐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네."
"아침 시장엔 사람들이 많다가 저녁 시장엔 사람들이 적은 이유가 어찌 사람들이 아침 시장을 좋아하고 저녁 시장을 싫어함에 있겠는가."
"음?"
무심코 내뱉은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아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맹상군 고사에요. 저런 사람들에게 대단한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사람이라면 원래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 실망할 것도 없다고요."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참 옳은 말이로군. 아... 저기. 저쪽이 바로 자네들을 비타까지 데려다줄 선장일세. 시뇨레 마리오 아니그리토."
험상궂고 덩치 큰 중년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우스트로도 그렇고 다른 어선 선장들도 다 비슷하게 생긴 것이, 마치 이렇게 생기지 않았으면 원양어선에 타지 못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마리오 아니그리토요. 조금만 더 있었어도 식구들 다 같이 굶어 죽을 뻔했는데, 손님들이 우리들을 구해 준 분들이오?"
"말하자면 그렇게 됩니다."
"고맙소... 오, 사제님."
"안녕하세요, 형제님?"
이래저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스터를 마주치면 먼저 고개 숙여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이쪽 분께선..."
"륀 퐁파두르. 웨리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어요."
"사제님에 마법 교수님까지. 으음... 너무 기분 나쁘게들 듣지 마시오. 원래 배에는 여인들을 태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소만, 손님들이 아니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이니 그 은혜를 갚아야겠군. 거기에 사제님께서 원하시는데도 태우지 않으면 내게 천벌이 내릴 거요. 그렇고말고."
배에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는 속설은 이곳 다이셀리시아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허면 가십시다! 여객선이 아니고 어선이라 안락한 항해는 장담하지 못하겠소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그 정도는 이미 다들 각오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일행은 아우스트로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아니그리토의 어선에 탑승했다. 어쨌든 목선이라 지구의 어선과 비교한다면 배수량에서 큰 차이가 나겠지만 규모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하긴 원양어선이 아니던가.
"전 계류색 걷어!"
[전 계류색 걷어!]
선원들은 아니그리토의 명령을 복창하며 홋줄을 걷었다. 일행은 어부들과 함께 현측에 서서 그들을 배웅하는 아우스트로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다녀오시오들! 이후에도 이스트리에 들릴 일이 있거든 우리 조합에 찾아오시구려!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서 대접해 드릴 터이니!"
부둣가는 빠르게 멀어졌다. 항만 내의 잔잔한 파도는 금세 출렁대는 파도가 되었고, 끼룩대던 갈매기 소리는 그 흔적만을 남기고 바닷바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일행에게 배정된 선실은 나름 신경을 썼는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미약한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도 같았지만 누구 말마따나 여객선이 아니니 불평할 거리는 아니다.
"우와! 나 배는 처음 타봐! 흔들리는 거 은근 재밌는데?"
먼바다로 나가면 나갈수록 배의 흔들림은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나유는 마치 놀이 기구에 타고 있는 것처럼 신나는 표정이다.
"맞다. 택이 오빠는 해군이었지. 해군들은 멀미 안 하겠다."
"왜 안 하냐? 다 하지."
"어? 멀미하면 배 못 타지 않아? 그리고 타다 보면 적응될 것 같은데."
"멀미해도 다 타야 돼. 돈 벌고 싶으면. 그리고 사람들은 배 많이 타다가 보면 멀미 안 하는 줄 아는데, 20년 탄 CPO도 화장실에서 토하고 그런다."
"CPO가 뭔데? 하여간에 씹덕들은 자기만 아는."
"나유야. 뒤진다."
"자, 조용!"
창공이 목청을 높이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비타까지는 바람 잘 받으면 3일이면 간다고 하네요. 다들 컨디션 관리 잘 하시고. 거기에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는 섬도 아니고요.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도 불구하고 창공은 일행의 흔들리지 않는 리더였다. 마지막에 창공과 아린 단둘이서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뒤로 둘의 표정이 훨씬 나아지고 분위기도 유순해진 터라 그저 좋게 풀렸다고만 짐작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창공이 심하기는 했지만 그의 비상한 면모는 다들 익숙했었고 또 의외의 상황에 실수를 한 게 아니겠냐는 식으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당사자들이 좋게 합의했으니 나머지 사람들도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넘어가게 된 셈이다.
"고다. 식량 제대로 챙겼지."
"네, 서 상."
"다른 사람들도 나눠서 잘 챙겼을 거고. 대충 3주치 분량이기는 해요. 다만 식량이라는 게 소모에 따라서 유동적이고 잃어버릴 위험도 있으니까... 2주로 잡죠."
"2주라."
륀이 중얼거렸다.
"비타 정도로 넓은 섬을 뒤지는 데 2 주면 그다지 시간이 넉넉하진 않아."
"그래.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짊어져야 하니까. 비타까지 여러 번 왕래할 수 있어서 중간 보급지를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면 많이 편할 텐데."
"남극에서 아문센이 했던 것처럼요?"
"맞아."
그는 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또. 자기들만 아는."
"책 좀 읽어요, 언니."
* * *
포를렌탈 교수는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피를 흠뻑 머금은 흙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시체 여러 구가 널려 있다.
"교수. 대답해 봐."
그녀는 멍하니 소리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피보다 붉은 적색 머리칼의 남자. 위협적인 머리색에도 불구하고 둥그런 눈 덕분에 인상 자체는 의외로 서글서글했지만, 그의 옷에선 신선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내가 어려운 걸 시켰던가? 음? 내가 말했잖아. 원양 어선이 뜨지 못하게만 하라고. 그 상태로 조금만 기다리면, 진짜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다 알아서 할 거라고. 내 말이 틀려? 대답해, 교수. 두 번째로 말하게 하네?"
"마, 마, 맞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발... 제발..."
"물론 난 네가 부교수에서 멈춘 등신인 걸 알아.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교수 직함도 달고 했으니 뭔가 있겠구나, 싶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더니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기를 원해, 교수? 이런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목숨이 아깝나?"
"예, 예!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찰박! 찰박!
교수가 땅에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핏물을 잔뜩 머금은 흙이 소리를 냈다. 절로 소름 끼치는 소리이건만, 교수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대단하다, 대단해. 나 때 마법사들은 자존심 하나에 살고 죽었는데 이건 또 뭐야. '죽여주십시오' 가 아니라 제발 살려달라고? 너 진짜 벌레 같은 년이구나?"
"제발! 제발!"
"아이고, 너 같은 년을 믿은 내가 잘못이다. 됐다. 그냥 내가 직접 해야지."
그는 탄식을 늘어놓으며 칼을 쥔 채 포를렌탈 교수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교수는 도망칠 생각도 나지 않는 듯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열심히 비비며 애원했지만, 결국 아무 소용도 없는 모양이었다.
"으가가가각... 오걿거걱..."
그라치아니 교수의 시신 옆에 나란히 눕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