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녹색 사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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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희망 없는 수색은 계속됐다. 비타 탐색 작전은 그저 목적 잃은 행군이 되어버렸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등만 보고 걷는 것이다. 그래서 창공은 지금 맨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뒷사람이야 앞사람의 등을 보고 걸어가면 된다지만 맨 앞사람은 뭘 보고 걸어야 하는가. 당연히 수색의 대상이 될 법한 특이한 무언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정신력이 남아있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결국 여기에 오자고 일행들을 이끌었던 그가 가장 앞에 서는 수밖에. 적어도 목적의식이 가장 뚜렷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창공 자신이었으니까. 정글은 그 정도로 인간에게 가혹한 환경이었다.
"이렇게 땀 흘리고... 찬물로 샤워 싹 한 다음에 에어컨 틀면 죽일 텐데..."
나유의 중얼거림에 지구에서 온 일행들이 일제히 탄식했다. 그래도 아직 그녀에겐 떠들 정신까지는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린아. 괜찮아? 목 많이 마르면 내 거 줄 테니까 마셔. 괜히 참았다가 큰일 날라."
"언니는 어쩌려고요?"
"아침이슬이라도 받아 마셔야지 뭐."
그녀의 말을 들은 히사시가 뭔가를 떠올린 표정으로 륀에게 말을 건다.
"음... 륀 상? 혹시 워터나 클린 마법 같은 거 없습니까? 소설 같은 데에 보면 마법사들은 물 걱정도 없고 항상 깨끗하게 살던데..."
"마법이 만능인 줄 알아? 게다가 우린 그런 하찮은 노동에 힘을 쏟는 사람들이 아니야. 더 중요한 연구를 하라고 세탁이나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하는 인원이 우리 마법사들에게 따라붙는 거고."
"아니 그럼 정말로 없단 말입니까?"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나 지하에 흐르는 물을 잡아끄는 마법은 있지. 더 묻지는 말고."
"저, 혹시 알면 한 번 써 주시는 게..."
"으으... 당신 진짜 눈치 없네.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거야?"
륀이 분한 표정으로 짜증을 냈다.
"그건 원소학 하는 인간들한테 물어보라고! 물이나 불, 바람 같은 건 그쪽에서 다루니까! 난 그런 잡다한 것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란 말야."
"에에..."
억울한 표정이 된 히사시. 그런 걸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것치곤 륀 상... 불 붙이는 마법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담배에 불 붙이려고 배웠다! 왜!"
저급한 마법이네, 뭐네 해도 모른다는 게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는지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본인이야 짜증났을진 몰라도 평소 쿨한 이미지를 생각해 본다면 꽤나 웃긴 상황이었기에 곳곳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으으윽..."
물론 자존심 높은 마법 교수에겐 분했지만 어쩌랴. 모르는 건 사실이고 웃는다고 화내면 졸렬해 보이기까지 할 텐데.
어쨌거나 일행 전체의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도 간간이 있으면 좋았다. 짜증 나는 상황에서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사람의 마음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니까.
그리고 분위기가 좋으면 일도 좋게 풀리는 때가 많다. 그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울창하던 정글이 걷히고 활짝 열린 풍광이 그들을 맞이했다.
"호... 호..."
"호수다!"
넓게 열린 푸른 하늘. 넓게 열린 푸른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인상적인 바위산. 거기에 둥근 호반을 따라 짙은 초록 우림이 쪼르르 서 있다.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나무들이지만 이렇게 풍경 속에 하나가 된 정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일행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몸 안의 물이 전부 땀으로 가는가 싶을 정도로 온몸이 땀에 푹 절고, 사방에서 조여오는 듯한 무거운 공기에 숨까지 막히는 기분이던 그들. 갑작스레 펼쳐진 시원한 시야에 말을 꺼내질 못하는데, 때마침 에어컨 대신이라는 듯 바람까지 불어준다.
"으아아, 못 참아!"
"참아!"
환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가던 나유의 손목을 창공이 급하게 잡아챈다.
"다들 가만히 있어! 뛰어들지 마! 마실 생각하지 마!"
"왜, 왜...? 왜 그래!"
물론 그라고 호수에 뛰어들어 몸을 씻고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싶지 않았겠느냐마는...
"오빠 말이 맞아요."
아린이 잔뜩 젖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창공을 거든다.
"마실 수 있는 물인지 확인도 안 됐고, 안에 기생충이 살 수도 있어요. 위험한 생물이라던가..."
"위험한 생물?"
"5m는 되는 아나콘다라거나."
"으엑."
하지만 호수를 앞에 두고 그냥 지나치기는 너무나 아까웠다. 며칠은 굶은 사람에게 음식 냄새만 맡게 해 주고 네가 먹을 게 아니라면 쉽게 납득하겠는가. 그림의 떡이라고는 해도 그림째로 씹어먹고 싶은 심정이다.
"저어.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 그들에게 아스터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해결이라니."
"마실 수 없는 물이라면 축성하면 되니까..."
"축성...?"
뜻밖의 설명. 물에다가 신성력을 불어 넣어 축성하면 아무리 더러운 물이라도 깨끗하게 정화된다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성수가 바로 그것.
"아스터. 그런데 성수가 원래... 마시거나 하는 거였나?"
그녀는 어택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굳이 성수를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급하지 않나요? 이런 때에 성수를 사사로이 사용한다 해서 노하실 정도로 신께서는 옹졸하시지 않답니다."
"오... 햄버거 주는 부처님보다 훨씬 낫네."
성수 제작은 간단했다. 물통에다가 물을 담은 다음 아스터가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끝. 상처를 치료할 때처럼 그녀의 손에서 따스한 빛이 새어 나왔다. 반가운 얼굴로 물통을 건네받은 나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하! 이거지!"
"아스터. 얼마나 더 가능해?"
"성수 제작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얼마든지."
"이참에 한 번 씻고 가자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아스터가 물을 축성하고, 어택이 물통을 기울여 물을 붓고, 밑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 쓰러져 죽을 것만 같던 일행들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가득 흘러넘쳤다.
의외로 사람은 쉽게 작은 것에 만족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스터 상...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에요, 히사시 님."
"솔직히 말해 전 이제까지 마법사가 최고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사제가..."
"뭐라고?"
분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륀. 하지만 이미 여론은 아스터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륀 상. 그렇지만 아스터 상이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뭔 소리야.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어! 으으... 당신들 말이야. 날 맨날 봐서 감이 잘 안 오는 모양인데, 나 대단한 사람이거든!"
"조용히 해 봐. 솔직히 할 말 없잖아."
그때 팔짱을 끼고 가만히 관망하던 창공이 앞으로 나섰다.
"아스터. 잘했어.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정말 잘했어."
"아... 감사해요! 언제든지 도움드릴 준비되어 있답니다!"
아스터는 환한 얼굴로 웃으며 슬쩍 륀에게 곁눈질을 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륀에게는 다분히 도발로 느껴지는 눈짓이었다.
[내가 언니보다 더 창공 님께 도움 되거든?]
갑작스레 그녀의 마음속에서 위기의식이 피어올랐다. 오늘 밤 창공에게 귀여움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하다간 아스터가 그녀를 걷어차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애초에 창공이라면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고서 방치해 둬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쌍둥이 중에 누가 더 마음을 잘 사로잡는지 경쟁을 시키겠다고 천명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로 패배하게 되면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나고 만다.
오늘 밤 창공의 총애를 받는 암컷은 반드시 그녀여야만 했다.
"창공아. 나 담배 한 대만. 응? 한 대만 피자. 아이씨,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한 대 안 피우는 건 중죄라구."
"뭐 그러던가. 나는 안 가. 택이 형이랑 같이 하고 와."
"오케이!"
마침 일행도 잠시 멈추어 가는 모양. 기회를 포착한 륀은 아스터에게 다가갔다.
"아스터. 잠시 이쪽으로 와. 할 이야기 있으니까."
"이야기?"
동생을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간 그녀는 먼저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스터... 아스터. 경고 하나 할게."
"경고라고."
"오늘 밤 주인님께 안기는 건 나야. 네가 아니라. 괜한 기대 품지 말라고 불렀어. 아무래도 조금 착각하는 것 같길래."
아스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안 그래도 최근 급속도로 냉각된 둘 사이인데, 가뜩이나 줄어든 대화마저 이런 내용이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
"착각? 착각하는 건 언니겠지. 창공 님은 언니처럼 하루 종일 발정 난 탕녀는 좋아하시지 않아. 언니는 그냥 창공 님께서 가지고 노는 계집일 뿐이라고."
"말 다 했어?"
"아니. 내가 이거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저번에 그분께 안길 때 얼마나 많이 칭찬받은 줄 알아? 내가 언니보다 훨씬 낫다고 하시더라. 하긴, 천박하고 음탕한 계집이 스스로 성욕을 채우려고 허리를 흔들어 대는 것보다는 진정으로 그분을 위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내가 더 낫지 않겠어?"
"네 미친 소리 따윈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주인님께선 오늘 밤에 날 잔뜩 안아 주실 거라고 하셨거든."
"아하,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말씀드려야겠네? 아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여자보단 공을 세운 내가 더 자격이 있는 여자라고."
"멍청하고 꽉 막힌 사제 주제에... 앞에서는 정숙한 척하면서... 방금 시선도 그런 의미였지?"
"글쎄, 어떠려나. 난 그럴 의도는 없었어. 그냥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가득 찬 어느 한 매춘부가 스스로 착각한 게 아닐까? ...첩년 주제에."
"첩? 첩이라고?"
"응. 첩이라고 했어. 사실 언니 같은 계집에겐 첩도 과분하다고 생각해. 그냥 애완동물 정도? 까탈스럽고, 말도 안 듣는."
"...각오해."
등을 돌리고 떠나는 륀. 미소로 화답하는 아스터.
"각오는 창공 님께 안긴 날 이미 끝난 지 오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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