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녹색 사막 (4)
* * *
쌍둥이 자매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건, 일행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흡사 시체들의 행진을 방불케 하던 음울한 몸짓들에 다시 힘찬 활기가 흘러넘친다. 정글에서 깨끗한 물을 마시고 땀을 씻어내는 데엔 그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앞으로도 일행은 2주 동안 이 정글에서 뺑뺑이를 돌아야 하니까. 다만 고생 중 찾아온 작은 행복 덕분에 잠시 동안 의욕을 충전했을 뿐.
따라서 이 좋은 분위기를 이어 뭔가 성과를 내는 게 필요했다. 속 편한 이야기고 말처럼 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창공은 그렇게 되기만을 바랐다. 아무리 그가 고민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는들 미지의 대상을 수색하는 작전에선 사람의 계책이 통하지 않는 법이니. 다만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결국 뭔가 있다면 호수 건너편에 있는 바위산이다. 아마존 밀림을 뒤지며 엘도라도를 찾았던 정복자들의 기분으로 저 바위산이 황금산이 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출발합시다. 각자 위치는 아까랑 똑같이 잡고. 저 바위산에 한 번 가 보죠. 어차피 정글 속으로 가 봐야 풀이랑 벌레들밖엔 없을 테니까."
"제발 저 바위산에는 바위랑 벌레들 말고 다른 게 있었으면 좋겠네."
창공은 나유의 농담에 실없는 웃음을 한 번 흘린 다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도 앞사람 등 대신 저 너머에 있는 목적지를 눈에 담으며 걷는다는 건 일행에게 상당한 심적 안정감을 주었다.
륀은 지도를 작성하느라 제대로 풍경을 둘러볼 틈이 없었지만.
그렇게 한 20분쯤 걸었을까. 창공 일행은 바위산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엔 야트막하긴 하다. 높이는 어림잡아 30미터 정도. 정글 사이에 저 혼자 높이 솟아오른 바위산이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창공아. 위로 올라갈 거야?"
"으엑."
어택의 질문과 뒤따르는 나유의 질색. 창공은 후자는 깔끔히 무시하며 전자에 대답했다.
"올라가서 주변을 한 번 내려다보는 것도 괜찮긴 하겠는데... 그러기엔 너무 험하지 않아요? 올라갈 만한 길도 안 보이는데."
"하긴 경사가 급하긴 하다. 그나저나 좀... 뜬금없네. 이거. 주변 풍광이랑 너무 안 어울리잖아. 그 덕분에 눈에 잘 띄긴 한다만."
"이질적으로 보이긴 해요. 아니면 우리가 지쳐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저... 창공 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 산, 어쩐지 제 눈에는 조금 어색해 보인다고 할까요?"
"어색해?"
"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분명 자연물인데 자연물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자연물 느낌이 나지 않는다."
일행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한번 산을 바라보았다. 과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 위화감의 정체는 뭘까. 바위 밖엔 없는 바위산에서 왜 이런 느낌이 나는 걸까.
"대칭이다."
"아...! 진짜로!"
그 원인은 산의 모양에 있었다. 얼핏 보기엔 삐뚤빼뚤 제멋대로 바위들이 선 것처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기묘한 좌우대칭을 이루었다. 군데군데 바위 틈을 뚫고 자란 나무라거나 새겨진 얼룩 때문에 첫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이게 우리가 찾던 그 무언가 아니야?"
"글쎄. 대칭이라. 웃기게 생기긴 했어도 이것만으로는."
그렇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좌우대칭인 자연물이라고 인공적인 조작이 가해졌을 거라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세상을 다 뒤지다 보면 정말 우연히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일이 있으니까.
"뭐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유심히 한 부분을 바라보던 륀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
터벅터벅. 말을 끝마치고 시선이 향하던 곳으로 걸어간 그녀. 이어서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어루만진다. 전체적으로 평평하긴 해도 자연스러운 굴곡과 흠집들이 나 있어 그리 특별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한 번 볼까..."
륀은 눈을 감고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움켜쥐려는 사람처럼. 일행들은 숨죽이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특히 창공은 륀이 하는 행동이 헛짓거리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이렇게까지 하고 나서도 '별거 없었네' 하면서 돌아서기라도 하면...
"으음!"
놀란 듯한 신음 소리. 이어 그녀가 지팡이 끝으로 바위를 쿡, 찍어 소리쳤다.
"Labare quet lepaes!"
하얀 불빛이 번쩍이더니 빛으로 된 실이 바위 위에 차차 아로새겨진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 어느 선은 직선으로, 어느 선은 곡선으로. 양옆에 선 두 기둥과 가운데에 솟아오른 커다란 아치.
빛나는 문이 바위 위에 떠올랐다.
"세상에... 정말로 있었어... 이 섬에..."
아린이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환상을 보는 듯한 광경. 륀은 경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들을 자랑스럽게 돌아봤다.
"성공이네. 첫날부터 운이 좋아."
"륀. 도대체 이게 뭐야."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마법으로 감추어진 문. 어쩌면 이게 뭔가의 관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탐색을 해 봤어. 만약 자연물에 마법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면 반드시 그 흔적이 남거든. 하지만 이건... 꽤나 방법이 구식이네."
"구식이라고?"
"응. 마법에는 여러 분야가 있다고 내가 이야기했었지. 어떤 분야는 세월이 지나며 실전된 부분들 때문에 퇴보하기도 했지만, 어떤 분야는 꾸준히 발전하기도 했거든. 이렇게 비밀을 감추는 쪽은 후자야. 자격을 갖춘 사람만 지식이나 그 외 무언가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저, 교수님?"
"김아린. 뭐지?"
"이 섬은 분명 무인도 아니었던가요. 영구적인 정착지는 건설된 적이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런 건..."
"그게 문제야. 도대체 누가 이런 조치를 해 놓은 걸까. 내가 비타에 대한 모든 기록을 읽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아는 한 이곳에서 뭔가를 한 마법사는 없어. 뭔가를 할 이유도 없고. 도대체 뭐지."
잠시 문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민해 봤자 나올 리 없지. 그보다 서창공. 당신에게 묻고 싶은데. 어떻게 할래? 이 문을 여는 건 둘째치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위험은 항상 있었어."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창공은 이미 결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사실 이렇게 운 좋은 발견까지 해 놓고 그냥 돌아갈 거라면 왜 이런 외딴섬까지 와서 고생을 했겠는가.
"앞으로도 있을 거고. 여기서 멈춘다면 우린 아무것도 못 해."
"하긴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지. 이 앞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의 반대급부로 그만한 보상이 있는진 미지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때."
"난 찬성. 택이 오빠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뭐라고? 난 네가 어떻게 할 줄 알았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다른 사람들도 생각은 비슷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여기서 멈추게 된다면 언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치면 아스터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네! 맡겨주세요!"
동생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쏘아보낸 륀은 곧 그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다면야. 나로서도 이걸 그냥 지나칠 수 없겠는걸. 이 안에 미지의 지식이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까. 혹여 실전된 고대 마법이라면... 으음. 어쨌든 그러려면 문부터 열어야겠지."
"교수님. 어떻게 여실 건가요?"
"좋은 질문이야, 김아린. 여기 위를 봐."
그녀가 지팡이로 아치의 윗부분을 가리켰다. 세세하게 아로새겨진 빛의 조각들. 복잡하고 유려한 문양으로 보였던 그것은 사실 문자들이었다.
"Remc uemien suamben pacu. Melonic, ahco ut besa un. 해석하자면... 보호하기 위해 이 문을 만들다. 친구여... 혹은 친구라면, 말하고 이 안에 들어가라."
"보호하기 위해 문을 만들었다..."
"둘 다 모호한 문장이군. 안에 있는 것들로부터 보호한단 소린가? 그 경우 이 문은 일종의 봉인이겠네. 아니면 바깥으로부터 이 안을 보호한다는 말도 되겠고. 뭐 그것도 봉인이라고 부르던가."
"두 번째 문장은요?"
"음.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 이게 맞는 것 같네. 명사 뒤에 붙는 ic는 4세기 이전 기록들에서만 보이는 조사 성분이거든. 그때 기록이라면 석판이나 점토판이 전부지만. 어쨌든 내 해석은 그래."
그녀는 정말 즐겁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앞 문장이 의미심장하긴 하지만 친구가 들어가는 문이라니까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 아닐지도 몰라. 게다가 이 문은 4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렇다면 안에 위험한 생물이 있더라도 다 죽지 않았으려나. 그건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저, 륀 상? 그래서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는 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친구라면 암호를 알 테니 그걸 말하고 들어가라는 거야."
"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시절 쓰이는 암호라면 뻔하지 않겠어? 역사적인 암호들을 몇 개 대보지 뭐. 그때 사람들은 순진해서 그랬던 건진 몰라도 암호의 수준이 낮았거든."
한 번 목청을 가다듬은 뒤, 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Efahiha."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Quepu."
이번에도 마찬가지.
"음... 이것도 아닌가.Perba."
여전히 문은 빛나기만 할 뿐, 응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뒤돌아봤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는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