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41화 (141/178)

〈 141화 〉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

* * *

"아, 이거 잘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을 든 어택이 만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른 야채와 육포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스튜. 별것도 아니었지만 힘들고 지친 때에 따듯한 음식은 언제나 위안이 되는 법이다. 설령 정글에서의 식사일지라도.

"고다. 어때. 이제 겨우 첫날이긴 하지만 식량은 충분할 것 같아?"

"아껴서 먹는다면 2주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힘들면 더 먹게 되니까... 그렇게 본다면 부족한 편이죠.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자체 수급이 필요할듯 싶습니다만."

"이스트리에서 사 온 거 있잖아. 접이식 낚싯대. 아무래도 민물고기는 좀 위험하니까 바다에 나가서 낚시를 하자고."

"바다 생선... 으아아. 초밥 땡긴다."

나유가 하늘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히사시가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전문 요리사도 아니고, 힘들 때 생각나는 지구의 음식은 이길 수가 없다. 상상과 추억의 입맛을 어떻게 이길까.

"히사시 오빠. 우리 진짜로 초밥 한 번 해 먹자. 응? 기회가 되면."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죠."

"만들어 본 적 있어?"

"편의점이랑 회전 초밥집에서 사 먹은 것밖에는."

"오빠는 일본 사는데 초밥도 안 만들어 먹어? 하긴 한국인들도 김치 안 담그는구나."

중천에 떠오른 지 오래던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당초 계획은 저녁이 되면 해변가로 돌아가 야영 준비를 하는 것이었지만 의외의 발견이 있었고, 물 근처라는 이점 때문에 이 위치를 버릴 수 없었다.

따라서 야영도 이곳에서 하기로 결정. 결국 다 같이 둘러앉아 저녁 한 끼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엄밀히 말해 다 같이인 건 아니다. 한 명이 빠졌으니까.

"뭐, 퐁파두르 교수께서는 설명만으로도 밥 위에 날생선 올린 건 질색하는 모양이지만. 그러니까 더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니 륀 상, 밥도 안 먹고 큰일입니다."

일행 몇몇은 빛나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은 륀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 문 앞에서 암호 추측에 매달린 지 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처음 발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 자신만만했던 륀은 점점 시간이 걸리자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는데, 가면 갈수록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고 행동에 힘이 들어갔다. 급기야 '열려라, 열려!' 하고 턱도 없는 말을 내지르거나 아예 힘을 주어 문을 밀기도 했다.

자꾸 열리지 않으면 짜증이 나서라도 잠시 물러날 법도 한데, 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듯 문 앞에서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륀 상! 저녁 드시죠! 1인분 남겨 놓았습니다만!"

"필요 없어!"

배도 고프지 않은지 저녁도 거절하는 지경.

"그래도 밥은 먹고 하지..."

"냅둬, 아린아. 저러다 말겠지."

일행 내에서 유일하게 마법적 지식이 있는 륀이 이런 지경인데 다른 일행들이라고 별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그녀를 제외한 여섯은 그저 열리기를 바라며 식사를 계속했다.

"륀 상! 진짜 먹습니다?"

"먹어! 귀찮게 하지 말고! 지금 생각하고 있단 말야!"

결국 아린이 한숨을 쉬고선 륀 몫의 깨끗한 그릇에 스튜를 퍼담았다. 아무리 안 먹겠다고 해도 결국 어리석은 고집일 뿐. 끼니를 거르고 고민한들 해답이 갑자기 나오는 건 아니다.

"자기가 안 먹겠다는 왜. 그냥 냅둬."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간 그녀는 그릇을 들고 륀의 옆에 서서 다시 한번 빛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윗부분에 새겨진 간단하기 짝이 없는 두 문장.

[보호하기 위해 이 문을 만들다.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

과연 이 두 개의 문장에서 암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뭐가 있다면 아린 전에 륀이 먼저 깨달았을 터이다.

"교수님. 일단 드시고 하세요."

"하아아, 필요 없다니까. ...일단 고마워."

결국 륀은 못 이기는 척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린이 그녀의 옆에 앉으려는데, 갑자기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는 륀.

"깔고 앉아."

"괜찮아요."

"앉아. 당신은 이제 아래쪽 차갑게 하면 안 좋아. 좀 더 자기 몸 상태에 대한 자각을 가지라고."

"...감사합니다."

륀의 배려를 받아들인 아린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모자 위에 살포시 앉았다. 어쨌거나 륀 또한 아린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록 이스트리에서 그녀를 편들어 주지는 않았더라도.

한동안 두 여인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열릴 리는 없지만. 사실 눈빛으로 문이 열렸다면 진작에 열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혹시 문장 안에 힌트가 있는 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보호하기 위해' 라는 말을 중심 가닥으로 잡고 관련된 고대어를 모조리 말해 봤지. 결국엔 다 실패했지만."

"아니면 더 드러나지 않은 뭔가가 있다거나..."

"음, 그건 아닐 거야. 숨겨진 마법이 더 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몇 번 말했지만 나 꽤나 우수한 마법사거든. 하아... 풀어야 하는데. 내가 풀어야 하는데."

"너무 부담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교수님이 못 하신다고 비난할 사람 아무도 없고요. 애초에 교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저 글을 읽을 수 있었겠어요. 문제가 뭔지도 몰랐겠죠."

"...아스터가 읽었겠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걔도 고대어에 대해서 좀 아니까. 교단 고대어의 수준이 뻔하기는 해도 이 정도는."

"교단에서 사용하는 고대어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고대어는 다른가요?"

"크게 다르지는 않아. 다만 읽는 방식이 조금 다르지. 예를 들어... 자."

그녀는 땅바닥에 'Ci'라는 단어를 썼다.

"우리 마법사들은 이 단어를 '키'라는 발음으로 읽어. 반면에 교단 사제들은 '치'라고 읽지."

"왜 그런 차이가...?"

"내가 전에 이걸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교단에서 사용하는 고대어는 교단의 총본산인 라티움 섬과 그 주변에서 사용하던 방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어. 반면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고대어는 좀 더 보편적인 발음에 가깝지."

"대단하네요! 옛날에 쓰던 언어를 그렇게 연구하시다니."

"사실 이미 실전된 언어라서 딱히 의미가 있진 않아. 게다가 웨리와 교단은 서로 무관심한 불간섭을 유지하고 있으니... 딱히 관심을 가지는 마법사들이 없더군."

"하지만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교단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네요. 발음 연구도 하시고."

"왜냐하면 아ㅅ... ...됐어.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보다 이 암호를 풀어야 해."

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뭐가 됐든 문을 열어야 이곳 비타까지 와서 고생하는 보람이 생겨난다. 만약에 열지 못하고 2주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면... 상당히 끔찍한 상상이다.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 젠장, 도대체 뭔데."

"친구여... 말하고...?"

순간 아린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생각. 답이 이렇게 간단할까 싶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동시에 왠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교수님. 혹시 전제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전제라니."

"'친구여, 말하고 들어가라.' 이 문장이 친구라면 암호를 알 테니 그걸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친구여'를 말하라는 게 아닐까요?"

"..."

그녀의 말에 륀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문에 새겨진 글귀를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그런 경우가 있다. 다른 뜻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미친 듯이 고민했는데 막상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Melonic, ahco ut besa un... 설마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리가..."

"그치만 아직 시도 안 해 보신 거죠?"

"맞아. 시도는 안 해 봤어. 흠, 흠! ...Melonic."

제발 열리라는 심정의 표현인지 륀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하지만 그 두 눈에 담긴 열망도 무색하게, 여전히 문은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껏 달아올랐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다.

"아닌... 거네요."

"안타깝지만."

결국 실망감에 가득 차 고개가 잔뜩 숙여진다.

그러나... 다시 번개처럼 고개를 드는 륀.

"아니야.ic는 특수한 조사. 실제로 한 단어만 발음할 때엔 읽지 않아."

"그렇다면..."

"Melon!"

쿠구구궁...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육중한 소리. 돌문이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활짝 열린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내가 말했잖아! 고대인들이 사용하는 암호의 수준은 상당히 낮았다고! 그럼 그렇지! 역시 뻔한 문제였다니까!"

그녀는 뚫린 암호를 평가절하하는 자신의 말과는 반대로 몸으로는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활짝 드러내었다.

"여, 열렸다!"

"미친... 이렇게 갑자기?"

한편 맛있게 식사를 하던 일행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놀람과 기쁨이 섞여 있다면, 륀은 오로지 기쁨뿐이었다.

"김아린! 잘했어! 정말 잘했어! 내 학생이었다면 무조건 A+야! 아아, 당신이 마법사가 아닌 게 정말 안타까워! 만약 그랬다면 조교로 들인 다음 내 연구실에 당신 침대랑 책상을 마련해 줬을 텐데...!"

칭찬 치고는 무시무시한 칭찬이었지만 그만큼 륀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 주는 말이었다.

"아... 아하하... 네에. 그 저... 감사합니다."

어쩌겠나. 그저 웃어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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