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 (2)
* * *
들뜨던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문을 열었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제야 시작일 뿐이다. 안에 어떤 것이 있을지, 어떤 위험이 있을지 그 모든 것이 미지수인 상황. 하지만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는.
그렇게 일행은 활짝 열린 문 앞에서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암흑 속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저녁 식사까지 마쳤고 내일까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일단 진행시키고 보는 게 의외로 좋은 결과를 불러오곤 했다.
"륀. 저번에 지팡으로 주변을 비추는 마법 있었잖아. 그거 지금도 문제없지?"
"물론이지."
"좋아. 이번엔 네가 맨 앞에서 일행을 선도해. 그 뒤에 나유랑 나. 내 뒤에는 아린이랑 고다 너. 맨 뒤에는 형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뭘 보게 될지도 모르고. 만약에 무슨 일이 있거든 흩어지지 말고."
창공은 다시 한번 일행에게 주의를 했다. 다들 죽을 고비도 넘겨 보았고 갑작스레 전투가 일어나도 혼비백산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지만, 경각심이라는 건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게다가 이번에 그들이 향하는 곳은 칠흑 같은 어둠 속. 륀이 지팡으로 사방을 비춘다 해도 탁 트인 바깥에서 태양 아래를 활보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다들 문제없죠? 문제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물통에 물 가득 채워요. 아스터. 축성해."
"네, 창공 님."
물통 가득 채우고, 정신 챙기고, 짐도 챙겼으니 이젠 정말로 저 안을 향해 떠날 차례였다. 륀을 필두로 한 명씩. 한 명씩 문 안의 어둠에 삼켜지기 시작한다.
"Illubinamant!"
륀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제서야 일행은 이 안쪽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검은 암석으로 사방이 둘러싸이고, 저 안쪽 통로에는 빛이 닿지 않는다. 흡사 동굴과 같은 곳이었다.
푹푹 찌는 바깥과는 달리 안쪽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시원하며 건조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덕분에 싸늘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까지 이 장소는 중립적인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앞에 계단이 있네. 다들 발조심해."
앞쪽에서 나온 륀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려 퍼진다. 그녀의 말대로 계단이 있었는데, 폭이 좁고 가팔라 한 걸음씩 조심조심 내디뎌야 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끝없이 아래로만 향할 것 같던 계단이 드디어 끊기고, 평지가 나타났다.
"...바람 소리가 나는걸."
"바람 소리?"
"잘 들어 봐."
일행은 잠시 멈춰 서서 륀의 말대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정신을 집중하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미약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방금 그들이 내려온 입구 쪽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곳에 출구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하긴 어차피 여긴 자연 동굴이 아니니까... 이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군. 자연적인 동굴을 토대로 인위적인 조작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으니."
"어차피 자연 동굴에는 문 같은 건 없잖아. 이 안에도 그런 비슷한 게 있을지 누가 알겠어."
"당신 말이 맞아. 게다가 방금 우리가 내려온 계단... 확실하게 누군가의 손을 탄 흔적이 있더라고. 뭐, 누가 건설했든 살아있진 않을 테지만. 설령 몬스터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아, 몬스터는 저런 문을 만들 재주가 없으니까 여기에 없겠구나."
"그러고 보니 몬스터들은 다 토벌되었다고 전에 아스터가 그랬던 것 같은데."
"응. 인간의 역사는 몬스터와 대립했던 역사기도 하지. 적어도 500년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토벌이 이루어졌고, 이제 북대륙이건 남대륙이건 몬스터는 남아있지 않아. 혹자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저 깊은 산골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증거가 없는 이상 그런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륀. 물어볼 게 있는데."
그녀의 말을 들으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어택이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여기 비타는 제대로 된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잖아. 그럼 몬스터가 남아있을 수도 있겠네?"
"뭐어... 가능성의 측면에선 완전히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안쪽에는 없어. 애초에 몬스터들은 마법적 재능이 없거든. 방금 우리가 지났던 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는 뜻이지."
"저 문이 계속해서 닫혀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으읏."
어택의 반론. 여유롭게 말을 늘어놓던 륀이 일순간 당황했다.
"확실히 그렇게 친다면... 하지만 가능성은... 으음...! 하지만 아직까진 누군가가 최근에 이곳을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어. 게다가 우리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머물렀던 곳. 이 동굴에 거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바깥 호수는 상당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장소일 테지. 하지만 뭔가 특징적인 점은 없었잖아."
추측의 영역이긴 해도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잠시 불안감을 끌어올렸던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앞으로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기로 할까. 말을 할 때에도 조심조심 말하고."
"좋은 생각이야."
모두들 창공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꼭 사람이나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 출입을 제한하는 별다른 장치가 없다면 맹수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이렇게 보니 동굴 안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주위에 흐르는 평온은 곧 깨질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함으로 변했다. 다들 무기를 꽉 움켜쥔다. 아스터는 진작에 검을 빼어든 채였고, 히사시는 프라이팬을 두 손으로 거머쥐며 주변을 날카롭게 탐색했다.
어차피 륀이 만들어낸 빛이 미치지 않는 곳을 아무리 노려본들 보이는 건 없었지만. 그런 곳엔 오로지 미지의 암흑뿐이다.
"그럼 출발. 다들 무슨 소리 안 들리나 귀 잘 기울이고."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이기는 했지만 이후로의 행군에는 부하가 상당히 걸리게 되었다. 언제 뭔가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몸과 정신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때쯤 뭐라도 튀어나와 줬으면 좋으련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계속 사방을 경계하고 있으니 피로가 배로 쌓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통로는 계속해서 일직선이라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나 지금 깨어있는 거 맞지?"
"나유야. 조용히 해."
"헤으으..."
결국 이 터질 것만 같은, 하지만 결국 시원하게 터지지는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유가 참지 못하고 혼잣말을 했지만 곧바로 창공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 이상으로 책망하지는 않았는데, 결국 그도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시위에 화살을 매긴 채로 언제든지 당길 수 있게 팔에 힘을 풀지 않고 있는 상황. 이러다가 싸우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일단정지."
다들 더는 버티기 어려운 한계의 직전. 창공이 정지 신호를 보낸 건 그때였다.
"후우..."
"흐아..."
곳곳에서 숨을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빛에 의지하고, 사방을 경계까지 하느라 걷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 생각보다 긴 거리를 걷진 못했지만 어쨌든 벌써 동굴 안에 들어온 지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쉽긴 해도 쉬는 게 나쁘지는 않은 상황.
"아무래도 이 안에서 자야겠는걸."
"그렇게 해요. 어차피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정글이라 마음 편히 자지는 못할걸요."
아린이 창공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거기에 왔던 길을 돌아갈 생각을 하노라면 그건 그것대로 지치는 일이다.
"택이 형. 어때요. 난 오늘은 여기서 멈추려고 하는데."
"괜찮은 생각이야. 다들 많이 지쳤어. 오늘은 쉬었다가 내일 힘내서 가자고. 문제는 불침번들이네. 륀이 잠들면 빛도 꺼질 거 아냐. 대책이 필요해."
"아! 그거라면 괜찮아."
거기에 생각이 미친 륀이 빠르게 대답했다.
"자는 중에도 지팡이만 손에서 놓치지 않고 있다면. 난 벽에 기대서 자야겠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은근한 눈빛으로 창공을 응시했다. 열락의 기대를 품은 시선. 어서 창공에게 봉사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암컷의 눈이었다. 사실 몇 시간 전에 창공에게 자극당했을 때부터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창공도 륀의 그런 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침번 시간을 잘만 조절한다면 섹스까지는 무리더라도 얼마든지 입으로 봉사를 받을 수 있을 테니.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조금 앉아서 쉴까."
"다들 무기는 손에서 떼어놓지 마요."
"알았어. ...아구구!"
곳곳에서 터지는 앓는 소리.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주무른다. 다리와 발에 몰렸던 피가 빠지는 느낌과 함께 행복이 전신에 퍼져갔다.
그렇지만 예상이나 했을까. 몸을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불행이 때를 기다렸음을.
쩌적... 쩌저적...
"이게 무슨 소리야?"
"뭐 갈라지는 소리 같은데요?"
"갈라진다고...?"
동굴 안에서 듣기에는 한없이 불길한 소리. 다들 재빠르게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벽? 천장? 그도 아니면...
"바닥이다!"
"아으 씨, 하필이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바닥에는 거대한 금이 여러 개가 가있었다.
"움직이지 마!"
섣불리 움직이다간 정말로 무너지고 만다. 륀은 머릿속에서 창공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고 크게 소리쳐 경고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사람씩 움직여. 여기서 벗어나야 해. 가장 체중 많이 나가는 사람부터... 어택."
"알았어."
지명을 받은 어택이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거의 바닥에 붙은 채로 조심스럽게. 다행스럽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괜찮은 것 같."
콰지직!
"으아아아아아!"
"꺄아아악!"
바닥은 무너졌다.
뻥 뚫린 구멍은 일행을 심연의 심연 속으로... 끊임없이 빨아들였다.
원래 그들이 있던 자리엔 희미하게 남은 비명의 잔향과 새카만 구멍만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