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43화 (143/178)

〈 143화 〉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 (3)

* * *

"으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가 좁은 통로 안에서 벽을 타고 이리저리 돌며 몸집을 한없이 불려간다. 바닥에 난 구멍 아래. 끝없이 수직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끊임없이 튼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경사가 밑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뚫려 있는 통로였는지 벽면은 부드러운 흙과 이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은 쉴 새 없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놀이동산에 가면 있는 커다란 미끄럼틀을 연상케 하는 통로. 하지만 단지 연상케 할 뿐이고, 길이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디까지 내려가는거야아아아아아!"

정신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데다 메아리까지 치니 누가 지른 비명인지는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 지른 비명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미끄럼은 갑자기 끝이 났다. 저 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게 아닌가. 륀의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과는 느낌이 달랐다. 말하자면, 동굴 출구 저편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으아아악!"

가장 앞에서 미끄러지던 어택을 부드러운 흙바닥이 마주했다. 벽면에 비스듬히 뚫린 작은 구멍에서 마치 토해내는 것처럼 일행들이 쏟아진다. 맨 아래에 어택, 그 위에 창공과 아스터, 다시 그 위로 나유와 륀...

"꺄아악!"

마지막으로 칼란드라를 붙잡은 채 배를 꼭 감싸 쥔 아린까지. 샌드위치를 쌓은 것처럼 사람들이 바닥에 잔뜩 쌓였다.

"얘들아... 숨, 숨 막혀..."

"위에 빨리 비켜!"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들 정신이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탄 이들은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에 살며시 몸을 눕혔다. 일곱 남녀는 그렇게 바닥에 엎어져서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만약 적대적인 무언가가 지금 일행을 노리고 있다면 꼼짝없이 당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장 일어설 수도 없는데.

"으아아..."

"에고고고..."

때아닌 죽는소리가 공간 안에서 휘몰아쳤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아스터였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일행들을 찬찬히 살폈다. 이윽고 입이 열리며 청량한 목소리가...

"Est­ce que tout le monde va bien?"

"뭐... 뭐라고...?"

나기는 났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너무나도 익숙한 아스터의 목소리인데, 말하고 있는 사람도 아스터가 맞는데, 갑자기 멀게 느껴지는 이 느낌.

"...Qu'est­ce que tu as dit?

자고 일어났더니 한 집에 살던 가족이...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이 웃고 떠들었던 가족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황당함? 놀라움? 의문?

바로 공포였다.

"아스터. 잠깐만. 뭐라고 하는 거야? 천천히 말해 봐."

"Monsieur Tchan gon? Qu'est­ce qui s'est passé...?"

"잠깐. 잠깐만."

이쯤 되자 어지간한 창공이라도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아스터가 뭐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모, 모르겠는데..."

"갑자기 왜 저래? 저거 고대어야? 륀!"

멍한 표정으로 아스터와 창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륀은 어택의 외침에 살짝 움찔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Tu viens de m'appeler, non?"

"돌아버리겠네."

말 그대로 미칠 지경이었다. 륀도, 아스터도 이런 때에 장난을 칠 사람들이 아니다. 설령 아스터가 살짝 장난을 쳤다 하더라도 요새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진 륀이 동생의 장난에 장단을 맞출 리도 없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로 갑자기,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지구 출신 일행들과 다이셀리시아 출신 쌍둥이 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잠깐만."

이쯤에서 갑자기 창공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히사시를 돌아봤다.

"야. 고다."

"..."

"너 아무 말이나 해 봐."

"...あの... ソさん...? ??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か...?"

"좆됐네."

그가 신경질적으로 마른 세수를 시작했다. 일이 고약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もしかして?き?れないんですか."

"..."

"へえ... そうか. ソさん???わからないんですね. ならこの?を?て??の不を!"

웃는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는 히사시. 그러던 그 순간, 아린이 갑자기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

"?さん. やめてください."

"えっ...!"

"お?ちゃん???わかっています. 大の??で??に?したんですよ. ???."

차마 비극을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아린은 히사시에게 창공이 일본어 강의에서 회화가 유창했다는 사실을 전달해 주었다.

단순히 장난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틈을 타서 창공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리라 천명했던 히사시는 상당히 꺼림칙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공과 마주했다.

가만히 히사시를 지켜보던 창공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어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だね."

"うう...!"

가볍게 히사시의 난을 제압한 창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우리 언어를 하나로 묶어주던 뭔가가 풀어진 것 같네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겐 지금 이 말이 한국어로 들릴 거고. 고다는 일본어. 그리고 륀이랑 아스터는... 아퀴탄어."

"Tu as dit Aqitan? Oui, je parle aquitanais maintenant!"

아퀴탄이란 말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아스터가 필사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부디 자신의 뜻만은 전해지길 바라는 사람처럼. 당연하게도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지긴 요원한 일이었다.

"Intéressant."

침착함을 되찾은 륀도 한 마디 거든다.

"C'est donc le langage que vous utilisez pour... J'aimerais qu'il y ait quelque chose pour enregistrer ?a. Bien sûr, je peux écrire la prononciation, mais c'est limité."

"나 울고 싶어진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듣던 어택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오빠도? 나도 그래."

나유도 마찬가지. 물론 다른 일행이라고 사정이 나은 건 아니다.

"ソさん. これからどうされるのですか."

"?だってそれが?かるはずないだろう."

이제부터의 방침을 묻는 히사시의 질문에도 창공은 부정적인 대답밖에는 내놓을 수 없었다. 사실이 그렇다. 일단 히사시와는 말이 어느 정도 통하지만 퐁파두르 쌍둥이의 경우엔 참 사태가 심각하기 짝이 없다.

한쪽은 마법. 다른 한쪽은 치료.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막막할 수가 있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여행을 가서도 몸짓과 그림을 통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지만 이건 평화로운 동굴 여행이 아니다. 급박한 상황에선 그럴 여유도 없다.

"Tout le monde! Commen?ons par comprendre la situation."

아무래도 막막한 벽에 봉착한 기분이 들어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륀이 손뼉을 치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Levez la tête et regardez le plafond. Il y a une lumière là­bas."

그러면서 천장을 가리키는 그녀. 어쨌건 고개를 들어 보라는 뜻은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무수히 반짝이는 빛무리가 보였다. 분명 아무 빛도 들지 않을 지하인데도 통로 끝에서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도 밤하늘의 별처럼 알알이 박힌 그 빛무리는 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륀의 지팡이도 빛나고 있었기에 다들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동안 모두 천장만 쳐다보았으나... 결국 그녀의 진의는 무엇이었던 걸까.

"Tu t'es un peu calmé? Détends­toi d'abord. Même si tu ne comprends pas ce que je dis de toute fa?on."

영문 모를 말을 하는 륀. 다만 왼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조금 진정해 보자는 뜻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고민은 잊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지금 륀에게선 처음 그녀와 만났던 그때. 보름달이 뜬 밤바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범접하기 어렵고 신비에 둘러싸인 것 같은.

문득 창공에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지금, 륀은 그에게서 잠시나마 완전히 해방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모두의 앞에서는 도도하면서도 그에게는 순종하는 여인일까.

"륀. 수첩 꺼내."

무시할 법도 했지만 즉흥적으로 의문 해소를 결정한 창공은 그녀에게 다가가 뭔가를 쓰는 손짓을 했다. 역시나 바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어. 이세계인에게도 통했는지 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Est­ce que tu le veux? ...Maître..."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마지막에 덧붙인 한 마디. 그는 륀의 마지막 말에서 미묘한 한숨이 묻어 나온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둡고 질척이는,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뜨거운 한숨.

아마도 '주인님'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창공은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뭐든지 확인이 필요한 법. 륀과 바짝 붙어 선 다음 몸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야를 차단하며, 깃펜의 깃털 부분으로 슬쩍 륀의 가슴을 쓸어 본다.

"vous avez raison."

그러자 방금 전의 뜨거운 한숨과 함께 속삭이는 륀.

"Mon corps est toujours à toi."

말은 안 통해도 마음이 통한다면 일단 반은 된 것 아니겠는가.

비록 주인과 노예 간의 마음일지언정.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