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새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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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무수한 것이 바로 영웅이 사용하는 무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장 유명한 영웅의 무기로는 역시 아네르의 무기를 꼽을 수 있다. 엘프의 왕 엘렌튀네가 아잔틴 2세에게 우정의 증표로 주었다던 활이라거나, 아퀴탄의 필립 3세가 사용했다던 기병창 등등...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이들이 사용했던 위대한 무기.
그러한 환상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대저 사람이란 물건에 의미를 담길 좋아하는 생물일진저. 왕이 위대한 선왕의 물건을 이어받아 사용하며 자신도 그처럼 위대하게 되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이런 바람들이 항상 헛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교황청 수장고에서 은밀하게 보관하고 있다는 성물에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다고 전해지지 않던가. 어느 성인이 입었던 수의, 어느 성녀가 땀을 닦았던 수건 등등... 실제로 성물과 접촉하여 불치병이 나은 기록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럴진대 어찌 영웅의 무기를 단순히 상징으로만 치부할 수 있으리오. 비록 천 년도 더 전의 기록이기는 하나, 엘프가 만든 화살통에선 결코 화살이 주인의 의사에 반하여 쏟아지는 일이 없다고들 하였고 어느 영웅이 썼던 검은 결코 이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하니... 그 무구들이 모두 실전되어 전설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애석하기만 하다.
이처럼 많은 전설들이 어찌 다 거짓이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일부 무기들의 경우에는 분명 다른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내용이 각각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사람들이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중 가장 많은 유형의 전설은 바로 '불을 뿜는 검'이라 할 수 있다. 사용자가 손잡이를 잡으면 검신이 불꽃에 휩싸이는데, 결코 주인을 다치게 하는 법이 없으며 오직 적들에게만 공포와 고통을 주는 그런 검.
필자가 조사한 결과 불길에 휩싸이는 검에 대한 전설은 키르케 내에서만 무려 81가지나 되었으며, 이 전설들은 모두 각기 다른 검에 얽힌 전설이었다. 81개의 검 모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무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모두가 환상의 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대저 모든 전설에는 반드시 원형이 존재하는 법. 정말로 '불을 뿜는 검'이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리라 누가 속단할 수 있겠는가.
저 수많은 전설들이 모두 하나의 검을 가리키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 모험가와 사가들이 이를 밝혀주지 않는 이상 '불을 뿜는 검'에 대한 전설은 영원히 전설과 낭만의 영역에서 모습을 감춘 채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을 희롱하리라...
슈만 알베르트 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낭만과 신화의 시대, 그곳에서 들려온 영웅들의 무기를 찾아서] 中
"그나저나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
다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에도 륀은 약간 붉어진 얼굴과 상기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떠벌거렸다.
"아니, 다른 세상에서 당신들이 넘어왔다는 것쯤은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말야. 정말로 당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듣게 되다니! 아, 거기엔 또 어떤 마법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혹시 알아? 고대어와 당신들 언어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교수님..."
"아니야. 그렇게 쉽게는 단정 지을 수 없어. 한 번만!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나조차 너무 당황해서 당신들 말을 음성기호로 적을 생각을 전혀 하질 못했어! 이렇게나 나 자신을 원망스러워할 순간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논문 하나... 서너 개가 통째로 날아간 셈인가. 아니지. 논문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눈앞의 지식을!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지식을... 으으으... 우리 다시 내려가면 안 될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다시 저 아래로 내려가서 언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길 원하는 륀. 그녀의 제안에 다른 일행들의 안색이 나빠졌지만 륀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안 돼."
"으읏..."
결국 유일하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창공뿐.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안 돼. 정신 차려. 아직 우리는 출구가 어느 쪽인지도 모르는 상황에다가 적들 한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가롭게 네 연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안 돼."
"...흐으으으으으."
깊디깊은 저 아래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듯한 일장 탄식.
"알았어... 포기할게."
"좋아."
솔직히 말해 륀의 마음은 아직도 저 내리막 아래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창공의 말이 합당하다. 지금은 여유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몸을 통제하는 주인님이 명령하시는데 듣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일단 앞으로 계속 가죠. 뭔가 특징적인 장소가 나올 때까지. 다들 힘든 거 알겠지만 경계 늦추지 말고."
이후로도 회색빛 동굴 벽이 그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던 칙칙한 회색의 돌벽은 어느 순간부터 칠흑같이 새까만 색깔의 돌벽으로 바뀌었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유.
"나만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나도 그래."
"바람 소리도 안 들리네요..."
그녀의 말대로이긴 했다. 깊은 동굴 안이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소리는 들리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물 떨어지는 소리나 미약하게 바람이 흐르는 소리 등등. 하지만 지금 사방에는 기분 나쁠 정도의 침묵만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글쎄. 우리가 너무 깊고 조용한 곳에 있어서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륀. 앞에 뭐 보이는 건 없어?"
"없어. 하지만 통로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그건 다들 눈치채서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이었다.
"일단 계속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 어쨌든 통로가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나가는 길도 있을 테니까."
정확히는... 그러길 바라야 한다. 하지만 창공은 자신의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다른 일행들도 애써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창공과 일행들이 그토록 바라던 '무언가'가 그들 앞에 튀어나왔다.
"오..."
"새로운 통로다."
먼저 전체적으로 둥글게 생긴 자그만 공간. 그리고 한쪽에 입을 벌린 세 개의 입구. 그 안쪽에는 지금까지 일행이 지났던 통로와 마찬가지로 암흑만이 가득하다. 륀이 가까이 다가가 지팡이로 불빛을 비추었지만 저 멀리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군."
"감으로 찍을 수는 없어. 우리 목숨도 세 개가 아니란 말이야."
"상의해서 결정해 보자고."
이쯤에서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각자 둥글게 둘러앉았다.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세 개의 통로 쪽에 눈길이 가는 게 영 불안한 모양새다. 어둠은 그 자체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데, 어둠에 감싸인 아가리가 세 개나 있으니 불안감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냐를 결정하기 전에 말이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어택.
"여기에서 잠을 좀 잘 건지 아니면 길을 하나 정해서 갈 건지 그것부터 정하자고."
"형 생각은 어떤데요."
"난... 솔직히 여기가 휴식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야. 이 공간은 출입구가 네 개나 된다고. 저 앞쪽 세 개랑 우리가 방금 들어온 쪽."
"그렇죠."
"반드시 습격당한다는 건 아니지만 항상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야 하니까. 내 생각에는 일단 조금 더 나아가는 편이 어떤가 싶어."
창공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택이 말한 대로 이 장소는 적을 맞아 싸우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이 동굴 안 자체가 전부 미지의 공간인데 더 나아간다고 휴식에 적당한 장소가 있을 것인가. 아니, 있기나 할까?
"형 말이 맞기는 한데... 지금 모두들 너무 지쳤으니까. 그게 문제지."
"그렇긴 해."
애초에 바닥이 무너져서 이곳까지 내려오기 전만 하더라도 곧 숙면을 취할 참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 지금까지 쭉 걷기만 했으니 쌓인 피로는 말이 필요 없는 상태.
과연 야영지로 적합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나아갈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이 남아있을지 그게 문제다.
"다들 나 봐요. 말은 안 해도 다 몸 상태 메롱이잖아. 안 그래요?"
표정관리라는 게 그리 쉽지 않다. 대놓고 '나 더는 못 가겠소' 할 수는 없지만 이미 한계인 몸 상태가 표정에 다 드러나게 된다. 어지간히 통제력이 상당하지 않은 이상은.
하지만 지금 일행은 자기 통제력이 높다 하더라도 도무지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며칠을 항해한 끝에 도달한 섬에서 정글을 헤매고, 땀으로 목욕을 할 지경에 이른 다음 동굴 탐험. 이미 한계다.
"쉴 수밖에 없겠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다음으로 어느 쪽으로 향할 거냐의 문제인데... 의견 있는 사람?"
"네, 창공 님. 저요."
아스터가 곧바로 손을 들어 응답했다.
"경사를 조사해 보면 어떨까요? 일단 저희는 밑으로 계속 떨어진 상태니까요. 지금도 원래 위치에 비하면 많이 올라오긴 했지만 출구를 찾으려면 계속 올라가는 길을 택해야겠죠."
일단 납득이 가는 의견이었다. 어차피 출구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면 적어도 위로 올라가고 싶다. 결코 내려가는 길만은 안 된다.
"그건 쉽지. 륀."
"에구구구..."
륀은 창공의 눈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통로를 비추었다. 세심하게 경사를 살핀 그녀는 유일한 오르막은 맨 오른쪽 통로임을 알렸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이제부터 8시간 휴식합니다. 2인 1시간씩 교대로 불침번."
과연 그 앞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 바로 지금 당장 눈앞에 적이 나타나더라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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