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새벽별 (2)
* * *
"다들 기상!"
"으아아... 지금이 밤이야, 낮이야?"
"시간상으로는 오전 8시."
"이럴 수가!"
일행들은 자고 일어난 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에 대해 절실하게 느꼈다. 의지할 빛이라고는 륀의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빛이 전부. 그나마도 켜켜이 쌓인 동굴의 짙은 어둠에 비하면 반딧불처럼 미약하기만 하다.
기상의 만족스러움이야 어찌 됐든 제일 먼저 다행인 점은 일행에게 절실한 수면을 취하는 동안 한 번도 습격이나 이상 징후의 발생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가리를 벌린 통로들에선 수상한 낌새라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은 어둠 속의 또 다른 어둠을 바라보며 긴장을 해야 했지만 끝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게 어딘가. 어쩌면 이 동굴 안에는 적대적인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까지 들었다.
"일어났으면 아침 준비하자고."
"저기... 서 상. 문제가 있습니다만."
"물이 없다고?"
"물도 물이지만 그... 땔감이."
"아."
동굴 안에 땔감으로 쓸만한 연소재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결국 일행들은 건포와 더럽게 딱딱한 비스킷을 생으로 씹어먹었다. 모든 식량은 이런 상황에서도 먹을 수 있게 생식할 수 있는 것으로만 챙기긴 했지만, 역시 따듯한 국물이 주는 안정감과 포만감에는 비할 수 없다.
오독! 오도독!
돌 같은 비스킷 씹는 소리가 모두의 입안에서 맴돈다. 모르고 들으면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작은 거에 감사하라지만 이건 너무 작은데."
"아린 님. 조심하세요. 제가 듣기로 임산부들은 잇몸이 약해져서..."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직접적으로 말은 없었지만 이 소박한 아침식사는 모두가 같은 마음을 품도록 만들었다. 어서 이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세 개의 통로 중 유일하게 오르막인 통로. 가장 오른쪽 통로로.
통로 안은 좁은 편이었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엔 충분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는 없는 정도의 넓이. 따라서 병장기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
이런 폭 때문에 일행들이 의지하고 있는 빛이 더욱 사그라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뒤로 어둠. 꽉 찼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하는 빛. 숨소리마저 울리는 듯한 좁은 통로.
최악의 환경이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꿋꿋하게 전진하는 길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나마 계속해서 오르막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은 마음의 위안거리가 되었다.
이런 그들의 용기가 보답받은 것일까. 길고 좁은 통로는 마침내 끝났다. 순간적으로 공기가 확 트이는 느낌이 나며 공간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별도, 달도 없는 밤바다 위에 등불 하나를 들고 표류하는 그런 느낌.
"위험하긴 하지만 빛을 더 키울 필요가 있겠어. 동의해?"
"그렇게 해. 어차피 이 정도로 넓은 공간이라면 빛이 아무리 작아도 다 보일 테니까."
"Illubinamant becimo!"
주문 영창과 함께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빛이 세기를 순식간에 더했다. 이제까지의 빛이 등불이었다면, 지금의 빛은 등대.
그리고 등대의 불빛이 주변을 비추자 곳곳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온다.
열 사람은 모여서 팔을 활짝 벌리고 끌어안아야 할 정도의 굵기. 그러한 굵기의 기둥이 빛이 닿는 범위까지만 해도 어림잡아 서른 개는 넘겨 우뚝 솟아 있다.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천장은 어찌나 높이 있는지 빛조차 닿지 않는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상상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크기. 거대한 공동과 공동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들. 간단한 두 요소이지만 순수한 크기에 다른 요소가 개입할 틈은 없다. 단순히 크기만으로도 터무니없이 작은 존재들을 압도하기엔 충분하다.
도대체 이 공간을 빚어낸 손은 누구의 손일까. 인간의 업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연과 우연이?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평하고 매끈한 바닥과 여러 문양들이 장식된 기둥은 이 공간이 철저하게 인간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이런 건 불가능해. 4세기 이전의 인간들은 이런 건축이 불가능했을 텐데..."
"지금도 이렇게는 어려워."
쌍둥이 자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의 총본산인 웨리. 교단의 총본산인 라티움 섬 교황청. 두 건축물 다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건축물이고, 그녀들은 두 건물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 바라보는 자기 얼굴처럼 수없이 봐 온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놀랄 수밖엔 없었다. 크기와 질량은 모든 것을 압도했다. 우스울 정도로.
"...놀랄 시간 없어. 앞으로 계속 가자. 공간은 넓어졌지만 대형은 유지하고."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창공의 지시 아래 일행은 다시금 발걸음을 뗐다. 과연 이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공간은 누가, 왜 만든 공간일까.
바로 그러던 순간이었다. 전신에 따가울 정도의 압박감이 가해지고, 온몸의 털끝이 곤두선다.
[킥... 킥킥킥킥킥킥킥...]
[키에에에에에에...!]
"어쩐지 쉽게 간다 했다."
"누, 누구야! 이리 나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짐승이?
아니, 짐승도 아니다. 신경을 잔뜩 긁어대는, 공포를 자극하는 이 소리. 평범한 맹수 따위가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전투 준비! 당황하지 마!"
창공은 그렇게 소리치며 내리고 있던 활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각자 무기를 꽉 쥐고 적습에 대비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그들을 옥죄었다.
[키에에엑! 케에에에엑!]
[끄아에에에!]
어둠 저편에서 불빛이 켜진다, 아니, 생겨난다. 한 쌍의 타오르는 듯한 불길이 수 없이. 점점 커지던 그것들의 정체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이었다.
이족 보행. 덩치는 성인 남자 정도. 온몸에는 털이 가득한데 어깨 위에 얹어진 대가리는 개의 그것과 흡사하다. 개도 그냥 개가 아니고 사나운 맹견의 대가리.
"말도 안 돼!"
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놀이잖아! 분명 몬스터는 500년 전에..."
"여기까지 토벌군이 오진 않았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정신 차려!"
"그, 그렇지!"
그들의 정체는 몬스터였다. 몬스터이긴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지구에서 온 일행들보다 다이셀리시아 원주민인 퐁파두르 쌍둥이가 더 놀라는 기색이다.
사실 이세계에 갑자기 끌려온 사람들 입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상할 게 있으랴. 토벌되었다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반대로 몬스터가 철저하게 토벌되고 이젠 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세상을 살던 쌍둥이에겐 오히려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몬스터는 현실의 위협이었고,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은 맞서 싸워야 할 존재다.
"시작하죠!"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아린의 손. 오른손에 살포시 쥐인 활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음을, 화음을, 선율을 만들어낸다. 알알이 부서지는 부른 빛무리.
공포와 떨림은 저편으로, 용기와 투쟁심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적어도 그녀의 연주가 계속되는 한은 그럴 것이다.
피잉!
그에 질세라 창공도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았다. 허공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하나 생기더니, 그대로 놀들의 무리를 관통하며 피분수를 일으켰다.
[끄에에에엑!]
이윽고 다시 시위에 매겨지는 화살. 놀의 무리도 가만히 있다간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일행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세. 머릿수는 질량. 엄청난 질량이 일점으로 쇄도한다.
"Unfatunasio!"
륀의 주문과 함께 선두에 섰던 놈들이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일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쿠웅!
묵직한 것과 묵직한 것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공동 안을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완전히 접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놀들은 쓰러진 동료를 밟으며 계속 전진했으니까. 우지끈!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피할 수 없는 접근전. 하지만 쇄도하는 질량에 맞설 수 있는 화력이라면 창공 일행도 갖추고 있다.
"이야아아아아!"
나유는 뛰쳐오는 놀들에게 역으로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파랗게 빛나는 그녀의 검신. 마나를 담은 칼날은 놀의 신체를 너무나도 쉽게 베어냈다. 마치 달군 칼이 버터를 순식간에 일단하는 것처럼.
"별거 아닌 새끼들이 깝치고 있어! 다 죽여버려!"
빠아아악! 퍼억!
어택도 질세라 방망이를 휘둘렀다. 절삭력이라면 몰라도 파괴력은 어택이 나유보다 훨씬 앞섰다. 그의 방망이가 놀에게 휘둘러질 때마다 살조각과 피보라가 이리저리 비산하고, 차라리 나유의 칼에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처참한 시체들이 생겨난다.
극단적인 찌르기용 칼을 뽑아든 아스터도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좁은 전장에서는 그녀가 유리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볍게 뛰어다니며 칼로 놀의 머리를 꿰뚫는다.
"이이익..."
히사시는 그들의 뒤에서 프라이팬을 꼭 거머쥔 채 사방을 노려보았다. 가장 중심에서 보호받는 아린의 최종 방어선인 셈이다. 그녀의 연주가 끊기면 굳건하게 버티는 마음의 지지대가 무너지고,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지지대가 무너진 마음이 언제까지 버틸지는 미지수. 살아남고 싶다면 반드시 아린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평형은 유지되었다. 물량에는 화력으로. 괜찮은 대처법이다.
하지만 그 화력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