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새벽별 (3)
* * *
창공 일행의 고군분투는 계속되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선율과,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푸른 불빛들. 놀이라 불리는 생명체들은 계속해서 헛되이 죽어나갔다, 마치 열강 군대의 기관총좌 앞에서 쓰러지는 원주민의 군대처럼.
벌써 바닥에는 시체가 그득히 쌓여있다. 압도적인 전력 차. 하지만 정작 승전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일행들의 표정에는 질린 기색이 가득하다. 하나를 베어넘기면 둘이 다가오고, 빈 공간이 생기기 무섭게 조악한 무기를 든 놀이 자리를 채웠다.
실제로 빛이 닿는 곳에는 놈들의 모습만이 있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죽인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죽인 수 이상의 놀이 시야 안, 그리고 시야 바깥에 남아 있으리라.
머릿수를 갈음하는 압도적인 화력은 적의 공세가 돈좌될 때까지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숫자의 차이에서 오는 전력 차를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가. 창공 일행은 완벽 초인이 아니었다. 마나는 결국 체력이나 정신력처럼 한계가 있는 힘이고, 영원히 뽑아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창공 일행은 이제까지 장기전을 한 번도 치러 본 경험이 없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몰랐지만, 적어도 한계가 다가온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연하던 손놀림에 점점 흔들림이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말끔했던 나유의 검로는 더 이상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헉... 헉... 이 자식들 언제까지 몰려오는 거야아아!"
나유가 앞에 나타난 놀 하나를 다시 베어넘기며 소리쳤다. '이게 몇 번째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물에 젖어 녹아드는 휴지조각처럼 흐물흐물해져 흩어진다.
"일단 계속 버텨!"
"버티고 자시고 이놈들은 두려움도 없는 거냐고!"
일리 있는 지적. 하찮은 벌레에게도 공포라는 게 있어 죽을 것 같으면 몸을 피한다. 생명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이다. 공포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
한데 지금도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놀들에겐 공포가 전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일방적인 싸움이라면 기세가 꺾일 만도 하지 않은가. 후퇴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뭇거린다던가...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처음처럼 지금도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죽음 앞에 몸을 던진다.
[키에에에!]
[키캬카캇!]
사람 신경 긁어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소모전으로 가면 자신들에게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떻게?
"젠장!"
어쩐지 가벼워졌다는 느낌에 무심코 화살 통을 바라본 창공이 탄식을 내뱉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화살은 어느새 절반도 못 되는 양으로 떨어져 있었다. 최대한 아껴서 쏜다고는 했지만 화살은 결국 소모품.
화살이 다 떨어진다면 적어도 전투에서 창공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총알 없는 소총수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대로는 안 돼! 빠져나가자!"
"헉... 허억... 어디, 어디로...?"
어택이 이 지경이거늘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힘겨운 숨소리를 들으며 창공은 여기서 계속 싸우다간 개죽음밖엔 안 당한다고 확신을 가졌다.
"원래 나아가려던 방향! 일점 돌파! 택이 형이랑 나유는 맨 뒤! 앞에는 나랑 륀! 중간에 나머지! 길 뚫을 테니까 엄호해!"
그는 탈출로 방향에 활을 겨누고 시위를 한가득 당겼다. 화살촉이 푸르게, 푸르름이 쌓여 하얗게 보일 때까지 빛이 모여들었다.
끼기기기기기...
만곡되었다 싶은 활이 더욱 굽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저러다가 활대가 부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엘프의 활은 창공이 이제까지 만져 본 어느 활보다 튼튼했으며,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창공은 마음속으로 경로상에 있는 모든 놀들이 꿰뚫려 박살 나는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철갑탄이지 소이탄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둘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해내야만 한다.
투웅!
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그는 숨을 잔뜩 들이켰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마나가 한 번에 대량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런 사수의 소모에 보답하듯, 화살은... 아니. 푸르다 못해 하얀 빛깔의 빛줄기가 놀의 무리를 꿰뚫었다.
파바바바박!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살점과 핏물이 이리저리 비산한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갈가리 찢어놓은 것처럼 화살의 경로 양옆으로 족히 1m는 되는 공간에 있던 놀들은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놀랄 시간도 없었다.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질 뻔한 창공은 급하게 자신을 부축하는 아스터를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달려!"
"이야아아아아!"
"비켜, 새끼들아아아!"
다들 소모가 심했지만 완전히 소모된 건 아니었다. 제자리에서 지키는 데에만 쓰이던 화력이 돌파에 쓰이니 놀들은 이제까지처럼 무력하기만 했다. 피비린내와 불쾌한 냄새, 밑에서 찰박이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베어넘기고, 옆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은 쳐내고, 뒤에 따라붙는 놈들은 떼어낸다. 달리고 달린 끝에 일행은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일행을 포위했던 놀의 무리는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맹렬하게 추격을 개시했고, 일행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다른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달릴 수밖에. 언제고 깨어질지 모르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희망을 품고서.
"헉, 헉, 헉...!"
"아이고, 숨차!"
어쨌거나 아무리 힘들어도 살려면 뛰어야 했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저 앞에 난간도 없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 뒤로도 공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지만 계단 뒤로는 막다른 곳일지도 모른다.
우연하게도 모든 일행원은 아무런 의사 표현도 없이 합치를 이루었다. 계단을 오르기로. 빛도 들지 않는 땅 밑에 떨어졌으니 위로 올라갈 기회가 있거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가 다 같았다.
탁탁탁탁!
그렇게 일곱 남녀는 원래부터 당연히 그 길이었다는 것처럼 다 함께 계단을 올랐다. 위를 쳐다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발을 헛디디지 않게, 중간에 멈추지 않게 힘을 쓰는 것만 해도 죽을 지경이었다.
"하아악! 하아! 하아...!"
"아, 아린아... 올라가. 올라가!"
"죄, 죄송... 푸하! 하아! 하아!"
가장 먼저 한계에 맞닥뜨린 사람은 아린이었다. 이제까지의 행적을 보면 체력은 떨어졌지만 정신력으로 틈을 메꾸는 타입이었는데 기어이 임신한 신체가 발목을 잡은 것 같았다. 결국 정신력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나오는 거니까.
"야! 김아린! 네가 사람들 다 죽일래!"
하지만 그녀가 임신 초기가 아니라 만삭이었더래도 창공에겐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임신 따위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에 아린 자신도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창공은 그 합의를 철저하게 이행할 생각이었다.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겼잖아!"
"가요! 헉... 가, 갈 거예요!"
순간 아린의 눈빛이 불타오르며 있지도 않았던 힘이 그녀의 몸 안에서 샘솟았다.
'김아린은 약해도 하늘이 엄마는 강해!'
그녀 자신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창공이 항상 하는 말마따나 모든 일에 위험부담은 따르고, 그 부담의 종류가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각오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나약함 때문에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살아서 나중에 아이를 낳고 말해 주고 싶은 것,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려면 없는 힘 따위는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 새끼들 온다!"
아린이 다시 계단을 오르고, 맨 뒤에 있던 어택은 다급하게 적의 접근을 알렸다. 정말인지 놈들에게 활이 없는 게 참 다행이었다. 좁다란 계단 위에서 화살 세례를 받으면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올라가! 쭉쭉 올라가! 멈추면 다 죽어!"
맨 앞에서 일행을 선도하는 창공과 륀은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달렸다. 하나의 계단이 뒤로 넘어가면 다른 하나의 계단이 다시 앞에 나타난다. 무한히 반복되는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미 피로로 가득한 온몸에 다시 쌓이는 피로가 어쨌든 그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별로 기쁜 증명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기쁜 일은 조금 뒤에 일어났다. 끝없이 위로 이어질 것만 같던 계단에 꼭대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하나 꼭대기는 평평한 대지가 아니었다. 길고, 얇은 다리가 앞에 있었다. 역시나 방금 오른 계단처럼 난간 따위는 없고 떨어지면 곧바로 나락.
아무리 봐도 불안정해 보이는 다리의 모습에 일행이 잠시 멈칫거렸지만 처음부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계단을 내려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건너는 수밖에.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다리를.
딱히 큰 두려움이 들지는 않았다.
목적지를 모르는 길 따위는 이미 떠돌이들에겐 익숙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