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새벽별 (4)
* * *
새까만 허공 위에 위태롭게 놓인 다리는 겨우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았다. 길게, 길게 저 끝 어둠까지 놓인 다리. 한 사람이 건너기엔 공간이 조금 남았지만 난간도 없는 다리를 둘이서 아슬아슬하게 건널 이유가 없다.
"뛰어! 다리 건너편에서 막으면 훨씬 나으니까!"
창공은 암흑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저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가장 최상의 경우는 아예 몬스터의 추적을 뿌리치는 것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렵고, 그다음으로 나은 건 유리한 위치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
좁다란 다리의 끝단이라면 몬스터의 수적 우위도 힘을 잃게 된다. 화력에서 이쪽이 우위에 있고 동시에 일어나는 접전이 1 대 1로 제한된다면 저쪽은 무의미한 축차투입을 반복하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할 성싶었다.
다리만 건너면 훨씬 낫다. 그 일념으로 일행은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앞으로 뛰었다. 공동에서부터 계단까지, 계단에서부터 다리까지 뛰고 오르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야말로 마지막 힘을 다해 희망의 빛이 비치는 저편으로 뛰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희망은 너무나 쉽게 깨어졌다.
"앞에도 놀이야!"
"젠장!"
앞에서도 투박한 무기를 든 놀들이 잔뜩 대기 중이었다. 아니, 일행을 향해 짓쳐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다시 뒤돌아 도망치자니 원래 그들을 추격하던 놀의 무리는 계단을 올라 다리 초입에 들어섰다.
생각이 끊어질 것만 같고,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상황이지만 창공은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이런 때에 최선의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돌파한다! 멈추지 마! 여기서 멈추면 다 죽어! 남나유! 맨 앞에서 뚫어! 륀! 뒤 받쳐!"
"으아아아아아!"
나유가 함성을 지르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검이 다시 한번 푸르게 빛났다. 달도 별도 없는 밤바다에서 파도에 희롱당하는 배에게 비친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어쨌거나 실제로도 그녀가 길을 얼마나 잘 뚫느냐에 따라 일행의 생사가 갈린다.
"비켜 새끼들아아아!"
뚫으려는 나유와 막으려는 놀의 접전. 검의 궤적에 따라 푸른 실선이 허공에 그어지고, 선이 지나갈 때마다 놀의 신체가 양단된다. 무기를 들었던 팔은 손에 무기를 쥔 채로 하늘을 날고,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리던 머리도 저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싸우면서 원래대로 전력 질주를 할 수는 없었다. 속도는 빠른 걸음 수준으로 늦춰지고, 뒤에서 추격해 오던 놀과의 거리도 어느덧 5m 안쪽으로 좁혀졌다. 후미를 담당하는 전투원은 어택과 아스터. 그들은 몬스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적들을 까부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아스터는 차치하고서라도 나유와 어택의 마나가 유지되는 이상 쉽게 밀릴 일은 없다.
그리고, 속도가 늦춰짐에 따라 아린 또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활과, 현과, 음에 마나를 담아 엮은 선율이 다시 한번 어둠과 함성으로 가득한 공간을 압도한다. 아린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이전 연주가 일행들을 향한 버프였다면 이번 연주는 몬스터들을 향한 디버프였다. 그녀가 심상으로 의도한 효과는 움직임의 저해. 다만 아직 완벽하지 않은 탓인지 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진 않았다. 그저 멈칫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정도.
그래도 일선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물건에서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면, 싸움터에선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가른다.
"좋아! 좋아! 이 약골 새끼들! 오늘 날인 줄 알아!"
신이 난 나유가 함성을 질렀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추락하고, 조금만 손을 멈추어도 목숨이 위태롭다. 하지만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새어나와 팔과 다리에 옮겨붙어 모든 공포와 피로를 불태운 것 같이 느껴졌다.
"륀! 뒤로 완전히 물러나!"
"괜찮겠어?"
"자꾸 옆에서 불빛이 왔다 갔다 거리면 더 방해된다고!"
"마음대로."
완전히 자신이 붙었는지 륀의 지원도 거절한 나유는 더욱 기세를 더해 앞으로 약진했다.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앞쪽에서는.
"아, 씨! 한 놈 흘렀다!"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만 같던 후미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말았다. 유난히 체구가 작은 놀 하나가 정신이 없는 어택과 아스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에 불과했지만,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창공과 아린, 히사시. 둘은 전투원이 아니고 하나는 근접 전투원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창공은 황급히 활을 들었지만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몰린 탓에 사격각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영웅은 난세에 탄생하는 법.
"으랴아!"
때애애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놀이 하늘을 날아 저 아래 암흑으로 사라졌다. 히사시가 프라이팬으로 놈을 가격한 것이다.
"어딜 들어오고 난리야!"
"야... 히사시."
"서 상! 맡겨주십시오! 저도 싸울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고 너도 되네?"
"예?"
급박한 와중에도 멍하니 창공을 바라보던 히사시는 창공의 시선이 자신의 프라이팬에 향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파란색 기운에 팬이 휩싸여 있는 게 아닌가.
"오... 오오...! 드디어 나도 마나가...!"
하지만 허무하게도 기운은 흩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팬은 그냥 팬으로 남았다.
"이, 이게 왜 안 되지?"
"에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리는 창공이었지만 그는 내심으론 일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륀이 언젠가 했던 말대로 마나는 처음 꺼내는 게 제일 어렵지 자꾸 하다가 보면 숨 쉬듯이 무기에 두를 수 있다. 여타 일행들처럼. 히사시도 결국엔 그리되리라.
아무튼 이 뒤로 일행의 기세는 더욱 올랐다. 마치 흥겨운 놀이라도 하듯 검을 휘두르는 나유의 쾌진격 덕분에 드디어 다리의 끝단에 다다른 그들. 흉악한 몬스터인 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초기로 풀을 베어넘기듯, 마체테로 넝쿨을 자르듯 우수수 처리되었으니.
이제 다리의 입구를 확보했으니 안정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적의 공세를 돈좌시킬 차례. 후미를 담당하던 어택과 아스터가 그대로 다리를 맡고, 나머지 일행들이 뒤를 받쳤다.
"수고했어. 정말로."
"에헤헤... 나 잘했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죽을 듯한 표정을 짓는 나유에게 창공이 칭찬을 해 주니 좋아서 죽을 듯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바뀐다. 나유는 이제껏 날뛰었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안전이 확보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휴식이 필요했다.
문제라면, 운명이 그녀에게 휴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쿵... 쿵...
어둠 저편에서 육중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발길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놈이 모습을 빛 아래 드러내는 데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족히 4~5m는 되어 보이는 키. 커다란 덩치. 아무렇게나 만져 놓은 듯한 생김새. 단추만한 두 눈깔에 듬성듬성 입 바깥으로 튀어나온 뻐드렁니.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인상이다.
"저건 트롤이잖아...! 도대체 여긴 어떻게 된 곳이야!"
륀이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 모르긴 몰라도 놀처럼 단칼에 나가떨이지진 않을 터.
"내가 읽었던 문헌에 따르면 놈의 피부는 두껍고 마법 저항력도 높아서 쉽게 처리할 수 없어. 유일한 약점은 두개골이야. 하지만 이건..."
"내가 할게. 어떻게든 막아 봐야지."
결국 지금 당장 손이 비는 나유가 나설 수밖에. 륀은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에 들었던 칼을 집에 꽂아 넣었다.
"난 마법을 준비할게. 마나를 일점에 집중한다면 아무리 놈이 마법에 저항력이 있어도 저지할 수 있을 거야. 다만 조금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알았다고. 시간 좀 끌지 뭐."
"나도 엄호할 테니까 최대한 노력해 봐."
"그래."
나유는 창공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선 트롤에게 용감히 달려갔다. 놈의 손에 들린 묵직한 몽둥이가 그녀의 머리 위로 내리꽂힌다. 피해야 할까, 맞서야 할까. 나유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미 많이 지친 상태지만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어떻게든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두른다. 푸른 기운으로 보호받는 검에 트롤의 몽둥이가 닿는다.
콰아아앙!
"아흐으윽!"
다행히도 검이 부서지는 일은 없었다. 마나 덕분이다. 하지만 마나로 몸까지 보호받는 건 아니었기에 충격은 전달되었다. 나유의 무릎이 반쯤 굽혀지고, 얼굴이 고통으로 물든다.
손이 찌릿찌릿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검을 놓고만 싶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는 대신, 기합을 내지른다.
"이야아앗!"
서서히 밀려나는 몽둥이. 그러던 와중 트롤의 팔에 빛줄기 하나가 꽂혔다. 창공이 쏘아붙인 화살이었다. 과연 가죽이 두껍다는 륀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듯 마나를 담은 화살이 관통하지도 못했다. 나유에겐 작은 충격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약간의 틈이 생기자 땅바닥을 굴러 몸을 피한 그녀는 트롤의 다리 부분을 날쌔게 베었다.
태앵!
이게 정녕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맞단 말인가. 마치 검으로 바위를 친 것 같았다. 차라리 창공의 화살이 꽂힌 건 대단히 선방한 수준이다. 그쯤에서 나유는 트롤에게 맞서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피하며 시간을 끄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버티면, 버틴다면 륀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야만 했다.
안 그러면 죽게 생겼으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창공은 이를 꽉 깨물며 화살을 장전했다. 화살통에 담긴 화살은 채 열 개도 채 남아있지 않다. 한 발 한 발이 소중한데 트롤에겐 별 타격도 없는 것 같다. 슬쩍 륀을 곁눈질하니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이미 옛날 옛적에 토벌당했으니 그들에 대한 정보는 종이 위의 글자로밖에 습득할 수 없다. 실전 경험이 없으니 한 번의 타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선에서 트롤을 감당하는 나유는 죽을 맛이었지만.
"허억... 허억..."
이제 한계였다. 몸 안에서 마나를 뽑아내는 것도 한계. 연이어 창공의 화살이 꽂혔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다시 큰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몽둥이. 다리가 철근같이 무거워 몸을 날릴 수도 없던 나유가 간신히 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검에 실린 푸른빛은 너무나 희미했다.
"아악...!"
검이 산산조각 나고 나유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우르르... 소리가 나며 무너지는 벽. 륀의 마법이 완성된 건 바로 그때였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앞으로 뛰쳐나가 마치 창을 내지르듯 지팡이를 트롤에게 찌른다.
"Fheaberamp!"
작게 폭발하는 소리. 폭음과 함께 뒤로 고꾸라지는 트롤.
쿠웅!
굉음과 함께 먼지가 풀썩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