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49화 (149/178)

〈 149화 〉 새벽별 (5)

* * *

막을 수 없던 트롤은 기어이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이라는 게 없어 보이는 놀들은 계속해서 다리 입구에 형성된 방어선을 돌파하려 기를 썼고, 벽에 처박힌 나유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피해야 해."

륀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트롤을 쓰러뜨린 건 단 하나의 마법이었지만, 그 마법을 사용하느라 힘이 쭉 빠진 것처럼 보였다.

"어, 어서... 놈은 다시 일어날 거야..."

"죽은 게 아니라고?"

"무력화... 무력화일 뿐이니까... 아직..."

하지만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당연히 다리를 틀어막고 있는 어택과 아스터도 물러나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몬스터들은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일행의 목숨을 노릴 게 뻔하다.

놈들의 체력이 무한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미 일행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고, 적의 체력이 다하기 전에 그들의 체력이 먼저 다해 따라잡힐 거라고. 그렇게 되면 무참히 도륙 당하는 미래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때, 어떻게든 생각을 짜내려 주위를 둘러보던 창공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유의 몸 위로 드러난 벽의 틈새. 무너진 벽 너머에 공간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창공은 재빨리 나유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며 새까만 틈새 저편을 쳐다보았다.

"륀! 여기 공간이 있어! 이 안으로 피하자고!"

"공간이...?"

과연 저 안으로 도망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륀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어차피 선택지가 없다는 결론밖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크게 소리치며 일행을 인도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 천천히! 서창공이 있는 곳으로!"

틈새 안쪽은 의외로 넓었다. 차갑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닐지라도 한동안 사용된 적이 없었으리라.

"창공... 창공아... 나 잘했지...?"

"가만히 있어."

빛 하나 들지 않음에도 나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는지 그에게 속삭여왔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창공에겐 별 감흥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일행들은 하나씩 틈새 안으로 몸을 날렸다. 가장 먼저 아린과 히사시, 아스터와 어택, 마지막으로 륀. 다리를 틀어막고 있던 방어선이 뚫렸기에 놀들이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왔지만 륀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Kirreso!"

천장을 가리키며 소리를 치는 륀. 공간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크게 울렸다. 거기에 크게 울린 소리는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지며 바윗덩어리들이 틈새를 빼곡하게 틀어막았던 것이다.

우르르르...

몬스터들이 내는 불쾌한 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꿈 저편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고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마저도 곧 들리지 않게 되자 일행들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고, 힘이 빠져나간 자리를 이제까지 도착이 유예되었던 피로가 잔뜩 대신해 다리를, 엉덩이를, 손바닥을 아래로 이끌었다.

"크허... 허윽.... 하아... 하아..."

그중에서도 륀의 소모가 제일 심했다. 쪽잠을 자는 와중에도 발광 마법을 지속했고, 연달아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느라 몸에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지팡이에 간신히 상반신을 의존하고 있을 뿐, 이미 쓰러진 거나 마찬가지다.

"아스터. 아스터?

"허억... 네... 창공 님..."

"이리 와서 나유 좀 치료해. 벽에 세게 부딪혔어."

아스터도 격렬한 전투를 치르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유일한 치료사가 그녀였기에 전투 이후에도 휴식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았고, 숨을 잔뜩 헐떡이면서도 무릎걸음으로 나유에게 기어와 치료를 시작했다.

"흐으읏... 흐윽..."

그녀의 손이 쉴 새 없이 부들거리고 얼굴에서는 땀이 계속 흘렀다. 하지만 아스터는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했고, 나유는 비교적 다른 일행들과 같은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친 영혼이 피로에 쩐 몸을 간신히 이끄는 상태로.

"다, 다, 다른 분들은... 다치신 분... 없으신가요...?"

"..."

"없다니 다행... 다행이네요..."

그제서야 안도한 얼굴로 쓰러지는 아스터. 사실 자잘한 긁힌 상처쯤은 다른 일행들, 특히 그녀와 함께 최전선에서 싸웠던 어택에게도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아스터에게 나 좀 치료해 달라고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일행은 하나같이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휴식을 만끽했다. 그나마 가장 멀쩡한 히사시가 뭐 도울 게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에 드러누울 수밖에.

"아이고... 죽는다..."

"우리 벌써 죽은 거 아니야?"

"죽었는데 이렇게 피곤하다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숨을 좀 돌리자 농담도 주고받는 사람이 나온다. 하지만 일어나기는 싫었는지 결코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비타에 들어와서 취한 휴식이라고는 단 세 번. 정글에서 한 번, 동굴 입구에서 한 번, 세 갈래 길에서 수면 한 번.

잠도 점 같지 않은 잠이었던 게, 딱딱하고 차가운 동굴 바닥에 몸을 뉘었던 데다 중간에 일어나서 불침번을 서고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있었으니 제대로 된 휴식일 리 만무했다. 그런 형편이니 지금처럼 쉴 수 있을 때에 최대한 쉬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응? 뭐라고?"

"어?"

다들 한마음으로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려 노력하던 차에, 가장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나유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창공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이상하네."

"피곤해서 잘못 들었나 보지."

"으음... 그런가...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목소리."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확실히 피곤한 상태라면 잘못 듣는 일도 있으니 나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닌데!"

다시 몸을 일으키기까진 5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지금도 들린단 말야."

"...뭐라고 하는데."

"내 이름. 내 이름을 자꾸 부르고 있어."

이쯤 되자 다른 일행들도 절로 오싹한 기분이 들어 마음 편하게 쉴 수 없었다. 결국 이 동굴 안에 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팔자였다.

"아, 또 불렀다. 정말 안 들린다고? 이게?"

"나유야. 네 '이름'을 불렀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그래서 난 네가 부른 줄 알고... 으음. 가만히 들어 보니 네 목소리는 아니네. 어, 잠깐만.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게 문제였다. 이게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면 정말로 문제가 심각해진다. 수천 년 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알려진 이곳에 누가 있어 나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른단 말인가. 그것도 지구에서 넘어온 그녀의 이름을.

"창공아."

어택이 굳은 표정으로 창공을 불렀다.

"아무래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는."

"마음 편하게는 못 있겠죠. 어쩔 수 없지. 모두 일어나요."

정말이지 사람 미치게 하는 동굴이 아닐 수 없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게 된다면 정말로 미치게 되지 않을까. 창공은 속으로 수천 마디 푸념을 늘어놓으며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너무나 지쳐있던 데다 당장의 위협에서 도망치느라 제대로 파악할 생각도 못 했지만 이 안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워낙 전 공동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긴 했지만 결코 꽉 막힌 곳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막힌 곳도 아니었다. 소리가 들려온다며 나유가 향한 쪽엔 계속해서 어둠이 펼쳐져 있었고, 륀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빛조차 끝까지 닿지 못했다.

"더 커지고 있어. 목소리가. 이젠 확실하게 들려."

"다른 말은 안 해?"

"응. 그냥 '남나유... 남나유...' 하고. 꽤나 중성적인 목소리라 성별은 모르겠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오빠. 그... 어쩐지 조금 따듯해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이상한 현상 또 하나. 점점 주변 공기가 따스해져 갔다. 차디찼던 바닥도, 벽도. 동굴 안이 아니라 동굴 컨셉으로 인테리어된 건물 안에 있다는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로.

열기는 나유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향할수록 점점 기세를 더해갔다. 처음에는 그저 온기가 가신 정도더니, 따스해졌다가 이제는 후끈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리고... 저 앞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일행들 모두가 그것에 시선이 꽂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검이었다. 어느 전설처럼 바위 위에 꽂힌 검. 번쩍이는 칼날에 고풍스러운 손잡이. 멋들어진 바스타드 소드.

문제는 그 검이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변을 잠식한 열기는 바로 이 검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저 검이야. 분명해."

나유는 홀린 듯 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동안 쓰던 검은 트롤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처참하게 부러지고 말았다. 무기를 잃고 무력해진 때에 눈앞에 나타난 검.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소설 속에서나 보던 용사와 검의 만남이 아니겠느냐고.

"여기까지 왔으면 내가 잡아야 하지 않을까?"

"진심이야?"

하지만 창공에겐 한없이 꺼림칙할 뿐. 말도 안 되는 일은 다이셀리시아로 넘어오고 나서 몇 번이나 보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검이 이름을 불렀다는 것부터가 수상쩍은데 불타는 검에 손을 얹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 나이브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음... 창공이 네가 보기에는 내가 항상 막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살다가 보면 감으로 행동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근거는 없어도 말야. 뭐, 혹시라도 다치면 아스터가 알아서 해 주겠지."

"심한 화상은 무리예요..."

"뜨거우면 바로 뗄 테니까. 응?"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창공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향했더니 제발 뽑아달라는 듯 검이 있는 상황. 너무나 작위적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함정이다!'라면서 발길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

"륀."

"별다른 마법적 조치는 느껴지지 않아."

창공이 자신을 부를 줄 알고 있던 륀은 곧바로 의도를 파악하고 대답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창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기분파인 나유라도 뜨거운 손잡이를 억지로 잡겠느냐며.

"아싸! 그럼 한 번 해 볼까!"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난 표정으로 씩씩하게 검으로 다가가는 나유. 아무리 그래도 곧바로 손을 얹기는 긴장이 되는지 입맛을 다시며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 갑자기 나유의 눈이 떠지고, 재빠르게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위로 당겼다.

"으랏차!"

쑤욱...!

그러자 거짓말처럼 뽑혀 나오는 검. 마치 바위가 아니라 바위처럼 생긴 묵에 꽂혀있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어, 시발."

이 허벌스러움에 어지간한 나유마저 당황하고 말았다. 어딘가 내력 있고 잔뜩 의미심장해 보이는 무대장치는 다 마련해 놨더니 이게 뭐란 말인가. 뽑은 나유도, 말린 창공도 무안해질 지경이다.

"..."

그렇게 불타는 검을 손에 쥔 여인과 그녀의 일행은 뻘쭘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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