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50화 (150/178)

〈 150화 〉 새벽별 (6)

* * *

"흠! 흠흠! ...어쨌든 뽑았으면 된 거잖아? 봐. 이거 내 거 맞다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아무튼 검을 손에 넣는 데에 성공한 나유는 히죽히죽 웃으며 검을 붕붕 휘둘렀다.

"언니... 그거 안 뜨거워요?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는데."

"딱히?"

실제로 검은 아직도 닿는 모든 것을 불사를 기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정작 손에 쥔 나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녀야말로 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거 참 큰일이네. 계속 불붙은 채라면 곤란할... 어라."

나유가 검을 바라보며 이대로는 곤란하다 중얼거리자 마치 거짓말처럼 불길이 사라졌다. 뭐랄까, 뽑히는 것도 그렇고 불길도 그렇고 참 쉬워빠진 검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창공으로서는 어딘가 꺼림칙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살다가 보면 의외로 일이 쉽게만 풀리는 날도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의심이 든다고 검을 다시 꽂아 넣으라 하는 것도 타당하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검사는 해 봐야지."

"응?"

"나유야. 일단 잘했는데 그 검에 뭐 이상한 건 없는지 한 번 보기나 하자."

마치 품에 안은 자식을 빼앗아 가겠다는 말을 들은 어미처럼 몸을 움츠리는 나유. 원래 쓰던 무기가 박살 난 상황에서 멋들어진 검을 새로 얻었는데 검사부터 하자고 하면 혹시나 버리고 가야 할까 걱정부터 드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니겠는가.

다만 창공의 말도 틀린 건 아니라 나유는 불안해하면서도 결국에는 승낙했다. 손잡이를 꼭 붙잡고 날을 보여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기꺼워할 조건이었던 게, 괜히 잡았다가 불이라도 붙으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조사원은 륀과 아스터였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봐도 뭘 알 리가 없으니 마나에 민감한 륀과 신성력, 삿된 힘에 민감한 아스터가 적격이었다.

"음..."

툭, 툭.

륀은 지팡이 끝으로 검날을 건드리며 신음을 흘렸고, 나유는 긴장되는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마법의 힘이 담긴 무기에 대한 이야기야 흘러넘치고, 실제로 영구적인 마법 효과가 부여된 무기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이 검에서는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는 말은 불이 타오르게 만든 건 마법이 아니라는 뜻인데..."

"신성력도 아니네요. 신성력도 아니지만..."

검날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놓인 아스터의 손에서 따스한 빛이 뿜어졌다. 상처를 치료할 때와 같은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에 반하는 사악한 힘은 더더욱 아니고요. 성유물성에 가져가서 정밀하게 조사해 본다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아마 그분들도 받아주진 않겠죠. 사악한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성유물이라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도 웨리에 가져가서 알아본다면 더 자세한 조사가 가능해. 마나 증폭을 이용한 비파괴검사라거나,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다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내 생각엔 검의 주인이 그걸 원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연하지."

아무래도 지금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분위기에 고무된 나유가 승리의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학자로서 탐구심이 인 륀에겐 아무래도 아쉬운 일이다.

"뭐 당신이 그렇다면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음? 잠깐만."

륀의 시선이 검신에 꽂혔다. 자그마한 노란 불길이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타오르며 무언가를 새기는 게 아니겠는가.

[Nastriam]

"글자... 고대어 아니야?"

"'새벽별.'"

쌍둥이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 뒤에 잠깐 서로를 마주보고선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래도 그 검의 이름 같네."

"새벽별... 뭔가 예쁘장한데?"

"잠깐만. 남나유. 반대쪽 면도 보자. 거기에도 뭔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나유가 검을 돌리니 과연 륀의 말대로 반대편에도 새롭게 나타난 글자들이 있었다.

[Licix samarrex nunamsin]

"가장 어두울 때..."

"가장 어두울 때를 위한 빛."

해석에 영 자신이 없어 보이는 아스터와는 달리 륀은 자신이 언어학자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읽어내렸다.

"뭐? 말도 안 돼. 빛은 Lic이잖아. Licix가 아니라. 게다가 그 해석대로라면 samas여야 하는데."

"당연히 신학교 수준에서는 그게 한계겠지. 이 문장은 입구에 쓰여있던 고대어와 같이 4세기 이전 고대어의 문법이 적용되어 있어. 명사 주어의 끝에 그래서 ix가 붙는 거야. samarrex는 samas가 빛이나 어둠을 수식할 때에만 한정적으로 변형되는 격이고."

신학교 수준 운운하는 그녀의 말에 아스터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실제로 고대어에 대해 보다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쪽은 마법사들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의미는 그거야. '새벽별, 가장 어두울 때를 위한 빛.'"

"끝내준다... 그러면 이 검이 4세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뜻이야? 그럼, 그럼..."

"지금이 3331년이니까 3천 년 정도 됐다는 거겠지. 아니면 그 이후에 만들어진 다음 문장만 옛날식으로 새겼거나. 자세한 건 조사해 보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몰라."

영롱한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던 나유는 활짝 웃으며 만세를 불렀다.

"언제 만들어졌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새벽별! 넌 내 거야!"

"..."

어택은 그런 나유와 자신의 볼품없는 쇠빠따를 번갈아 바라보고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내 무기는 어디 있는 거냐..."

"거기 있잖아, 오빠. 오빠 손에."

"시끄러워!"

"응, 오빠 무기는 방망이야.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어. 메롱! 메롱 메롱!"

"...망할."

"자, 이제 그만합시다."

결국 창공이 나서서 최종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 동굴에서 개고생한 게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네요. 찾아보면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일단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 한 번 듣죠."

그가 주위를 한 번 둘러봤지만 듣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다들 이 끔찍한 동굴에서 나가고 싶은 건 한마음이었으니까. 큰 수확이 있었던 나유에게도 이 동굴은 이제 그냥 동굴일 뿐이다.

"나가죠, 그럼.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나."

"글쎄. 여기 생각보다 넓어 보여. 일단 한 번 둘러보자고."

어택의 제안에 따라 주변 벽을 짚어가며 죽 따라가니 큼지막한 통로가 하나 있었다. 그 외에 통로는 없었으니 당연히 일행의 발길도 그곳으로 향했지만... 창공은 자꾸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오빠."

결국 망설이던 아린이 나설 정도로.

"어딘가 꺼림칙한 점이라도 있나요?"

"너무 작위적이야."

통로 안에서 창공과 아린의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치다가 끝내는 의미도 불분명한 잔향음으로 뭉개졌다.

"작위적이라는 게..."

"나유 이름을 불렀다는 검. 바위에 꽂힌 채로 제발 뽑아가라 준비되어 있었지. 검을 뽑은 다음에는 여기로 가시면 된다는 듯 뚫린 통로. 일이 너무 쉽게만 풀린다는 생각 안 들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예 처음부터 이걸 위한 거였다면요?"

"무슨 말이야."

"이 동굴 자체가 검의 보관 장소였던 거죠. 생각해 봐요. 입구의 문에 쓰여있었던 글귀."

"'보호하기 위해 이 문을 만들다?'"

"네. 그 보호의 대상이 검이었다면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게 이렇게 외진 곳에 검을 두었다면?"

"뜻이 모호한 문장이었잖아. 이 검으로부터 바깥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 안에 봉인했을 수도 있지."

"만약 그랬다면 더 철저하게 봉인하지 않았을까요."

"그럴듯하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일이 좋게 풀리면 좋아하면 된다는 거죠. 물론 긴장을 완전히 풀어서야 안 되겠지만. 오빠 인생은 항상 최악의 연속이 아니었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다이셀리시아에 뚝 떨어져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잡나 했더니 죽을 병에 걸린 건 최악의 연속이 아닐까. 어쨌든 아린은 아직까지 모르는 일이다.

그 뒤로 일행은 말없이 걸었다. 기존 칼집은 크기가 맞지 않아 손에 들고 검을 휘두르는 나유의 콧노래를 제외하면 발소리밖엔 들리지 않는다.

길은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아니었고, 마치 이쪽 방향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넓이를 더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통로가 활짝 열리고 계단을 오르기 전과 비슷한 대공동이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 방금 거긴 아니겠지?"

"말끔하잖아. 별다른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선 다른 장소가 아닐까."

동일한 장소라면 시체나 핏자국이 도처에 널려있을 터. 하지만 공동은 말끔했다. 청소를 하더라도 이토록 말끔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닌 이상 이곳은 새로운 장소였다.

하지만 새로운 장소라도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하나는 커다란 기둥 사이를 걷는 창공 일행이고, 둘은...

[키키키키킥...]

[끼이이익... 끼익...!]

"언제 나타나나 했네!"

"모두 기둥 쪽으로 붙어!"

"김 상! 이쪽으로!"

이제는 정겹다 못해 끔찍할 지경인 놀. 동굴의 거주민인 몬스터들이다. 사방에서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모습이 자연스레 데자뷔를 일으켰다.

"좋아, 성능 시험 한 번 해 볼까!"

딱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 멋진 무기를 얻고 기세가 잔뜩 오른 나유의 존재다. 그녀는 방어망의 선두에 서서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어디 와 봐! 불맛 보고 싶은 새끼들부터 덤벼!"

화르륵!

나유의 말에 응답하듯 새벽별에서 붉은 화염이 화산처럼 솟구친다. 한데 그 순간, 미친 듯이 돌진해 오던 놀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곧바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끼기기... 끼에에엑!]

[캬아아악! 캬아악!]

저희들끼리 치고받고 밟히는 끔찍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다시금 힘겨운 전투를 준비하던 일행은 무기를 내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몬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렇게 놀의 무리는 비명과, 피와, 시체, 부러진 무기들을 남기고...

그 외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아니 이런 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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