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새벽별 (7)
* * *
새로운 무기의 성능시험은 다음으로 미뤄지게 되었지만 아쉬울 이유는 전혀 없다. 괜히 싸우는 것보다 적들이 알아서 달아나 준다면 더 좋은 일이니. 게다가 현재 창공 일행의 목표는 동굴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만 그건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일이고, 신차를 뽑았으면 집 앞에라도 한 바퀴 시승을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럴진대 불길을 뿜는 신기한 검의 주인이 된 나유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나쁜 놈들아... 지들 유리할 땐 싸우고 불리할 땐 도망치고... 싸우게 해 달라고...!"
분한 표정으로 새벽별을 붕붕 휘둘렀지만 변하는 건 없다. 이제 공동에는 공포와 혼돈으로 내지른 비명의 잔향조차 남아있지 않으니.
"알아서 잘 처리됐네."
다만 창공에게 있어선 최고의 시나리오다.
"나유야. 이제 그만 가자."
"으휴... 으이그으... 그래."
여전히 출구가 어느 쪽인지 확신이 안 선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마음은 훨씬 여유로웠다. 일단 물밀듯이 밀려드는 미친 몬스터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큰 위안을 주니까.
저벅저벅...
이렇게 일행은 다시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저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제발 이쪽 방향에 나가는 길이 있기를 바라면서.
"저, 륀 상? 왜 놀들은 도망간 걸까요? 정말 저 검 때문에?"
위협이 위협이 아니게 된 상태에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는 건 상당히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제일 먼저 나서서 지루함을 깨뜨린 사람은 바로 히사시였다.
"나도 모르지. 말했잖아. 저건 마법검이 아니라고. 뭐, 그렇지만 추측은 할 수 있으니까 의견을 말해 주자면... 이 동굴을 설계한 자의 의도라고 봐야 할까나."
"의도 말입니까?"
"기둥에 새겨진 장식이라던가 문에 걸린 마법 등으로 보아 상당히 힘을 가진 세력이 이 공간을 축조했겠지. 마법으로 봉인된 문을 통과하는 것 외에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저 몬스터들은 의도적으로 이 안에 남겨져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어. 축조자의 의도."
"그 의도라는 건 도대체 어떤 의도입니까?"
"방금 김아린의 말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 역시 이 동굴은 새벽별을 두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야. 뭐, 기본 토대는 천연 동굴이었겠지만 상당한 수준의 인공적 개조가 가미되었겠지. 따라서 저 몬스터들은 아마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살아있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는 말은 남 상이 검을 뽑지 못했더라면..."
"다들 지쳐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겠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행이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일행은 나유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륀의 마음속에 불쾌한 파문이 일렁였다. 파이프를 미치도록 피우고 싶었지만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몬스터들의 이상행동도 설명이 되겠지. 최소한의 지성도 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맹렬함. 몬스터에 대한 기록은 최소 500년 전 기록이긴 하지만 거기에 따르면 그렇게까지 처절한 놈들은 아니었어."
"으음..."
"거기에 지독하기 짝이 없던 몬스터들이 검의 주인 앞에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지. 너무나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모습이야. 그러니까 저것들에게 의도적인 조작이 가해졌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거지."
"검의 주인이 아닌 자들은 솎아내고, 검의 주인 앞에서는 물러나는 그런?"
"맞아."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군진 몰라도 성격이 좋지는 않아 보이네요. 여길 만든 사람들."
3천 년 전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남의 세상 역사이니 지구인들에겐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었지만 다이셀리시아 사람인 퐁파두르 쌍둥이에겐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시 인간의 수준은 이 정도로 뛰어나지 못했다.
단순히 이런 동굴을 만드는 것까지야 어떻게 되더라도 몬스터에게 이 정도로 고급스러운 정신 조작을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3천 년 전은커녕 현대에도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아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초고대에 현대 문명 이상으로 융성하고 발전했던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어깨를 펴지 않을까, 하고 륀은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겐 상당히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이성적으로. 바보 천치들 같으니.'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잡담이 계속 이어졌지만 무더운 여름날 가끔씩 불다가 끊기는 바람처럼 산발적이기만 했다. 결국 피곤하기도 하고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할 주제도 없었으니까.
일행을 둘러싼 공간마저 그대로였다면 정말로 지루해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대공동은 공동이 되고, 공동은 통로가 되어 확실히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정지."
일행을 선도하던 륀의 발걸음이 멈추자, 뒤에서 따라가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일제히 멈추었다. 통로 중간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구멍. 말 그대로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이다.
"앞에 구멍이 있어. 꽤 크니까 조심해. 음... 어택. 당신이 앞으로 나와서 바닥을 두들 줬으면 좋겠어. 이곳 암반이 취약한 곳일지도 모르니까."
"오케이... 어, 잠깐만. 여기 어딘가 분위기 익숙하지 않아?"
"그거야 당연하지. 이틀 동안 이 동굴에 갇혀 있었으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한 번 잘 봐."
사람들은 어택의 말에 일제히 주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륀의 말대로 계속해서 동굴벽 아니면 몬스터들만 봤다 보니 그게 그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어택의 말대로 이 장소가 익숙한 것도 같았다.
"우리가 아래로 떨어진 곳 아니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뱉은 창공의 말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렇다는 말은 이 길이 맞다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출구가 있다는 거네?"
희망의 불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 지긋지긋한 동굴에서 나갈 수 있는 희망. 어택은 환희에 찬 얼굴로 열심히 바닥을 두들겨 안전을 확인했다. 만약 여기서 또 아래로 고꾸라지게 된다면 희망은 단숨에 몇 배나 되는 절망으로 바뀌게 되리라.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에 하늘로 통하는 계단... 거기에 몬스터들이 정말로 새벽별 때문에 물러간 게 아니라면 다시 싸움을 반복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마나까지 써가며 새빨간 눈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어택을 아무도 비웃지 못했으리라.
"아무래도 우리가 빠진 저 구멍을 제외하면 연약한 지반은 없어 보여."
정말로 이 구멍이 그 구멍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빠진 저 구멍'이라는 말은 너무나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이 들뜬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일행은 신중하게 발길을 내디디며 구멍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빙 돌아 움직였다.
정말로 길을 제대로 잡은 게 맞다면 다음에 나타나야 할 구조물은 바로 계단. 상당한 높이의 오르막 계단일 테지만 그들은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웃음 지으며 계단을 오를 자신이 있었다.
지팡이에서 뿜어지는 빛이 닿는 곳, 다시 말해 일행의 시야가 닿는 곳 저 끝에서 통로가 끊기는 게 보였다. 심장박동이 올라가고 호흡이 빨라진다. 계단. 계단. 계단. 계단이 나타나야 한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지구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면 오로지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어야만 한다.
"으... 으아아아!"
"계단이다아아아!"
그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좁고 가파른 계단이 일행을 맞이했다. 펄쩍펄쩍 뛰는 나유, 소리를 지르는 히사시, 서로를 얼싸안는 사람들과... 쓴웃음을 짓는 창공.
이제 말은 필요 없었다. 피로는 어느 순간 싹 사라지고 발에 날개가 달린 듯 층계를 오르려 분주히 움직이는 다리가 가볍기만 했다. 내려갈 때도 꽤나 길이가 되던 계단은 오히려 올라갈 때 더 짧았다.
고지에 오르고 아주 잠깐의 약진 끝에 닫힌 문에 나타났을 때에 더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Melon!"
아스터의 쾌활한 목소리에도 꿈적하지 않는 문에는 조금 놀랐지만...
"마법으로 닫힌 문은 안에서 열 땐 그냥 밀면 열려. 자."
륀의 손길에 너무나도 쉽게 밀리는 문을 보자 다시금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틈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하얀 광휘는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륀이 마법으로 만든 빛도 밝았지만, 역시 태양에게는 비할 수 없었다.
탁 트인 공간에 펼쳐진 녹음과 푸른 호수. 습기를 가득 머금은 꿉꿉한 바람과 더운 공기. 풍경은 좋았으되 환경은 불쾌하다.
하지만 이 불쾌한 환경이야말로 그들이 애타게 찾던 지상낙원이었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불쾌하며 쾌적한 바깥공기를 마음껏 머금었다.
"잠시 휴식하죠."
"서 상. 기왕에 나왔는데 지금 밥이라도 하면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난 잠깐 이 근처에 좀 다녀올게."
"아, 창공아. 담배 타임? 같이 가자."
창공은 나유의 제안을 간단히 뿌리치고선 홀로 정글을 향해 걸어갔다. 모습은 진작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어지간해선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이파리. 아직 떨어진 지 그렇게 오래는 되지 않은 듯 푸르고 촉촉했다.
뒤를 돌아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이파리를 입에 갖다 대고 세게 틀어막았다.
"...!"
기침.
기침.
계속 이어지는 기침.
짭짤함. 비릿함. 불쾌함. 미끈거림. 뜨거움.
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고, 목구멍이 불타오른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기침과 피, 먼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둑에 막혀있던 물이 한꺼번에 터질 때처럼.
"퉷... 퉤엣..."
피는 이미 이파리 따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피. 그나마 옷에 묻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일까.
창공은 빨갛게 물든 잎과 땅바닥을 보며 앞으로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남았을지를 가늠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위한 빛인 새벽별은 그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