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피어싱
* * *
동굴 안에서 새벽별을 찾은 이후 창공은 곧바로 원래 있던 바닷가로 복귀할 것을 천명했고, 일행들에겐 전혀 이의가 없었다. 사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을 찾는다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수확 자체는 있었던 데다 더는 땅속과 정글을 헤매기 싫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목표가 다분히 추상적이었으니 확실한 소득 한 가지만 제대로 건진 것만 하더라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리라. 그렇게 일행은 백사장에 야영지를 차리고 접선 예정일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의외로 비타는 정글 안쪽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꽤나 휴식을 취할 장소로서 괜찮은 곳이었다. 하얀 백사장,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에메랄드빛 바다. 남태평양이나 인도양의 유명한 관광지를 떠올리게 한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하거나, 나무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거나, 모닥불을 피우고 캠프파이어 분위기를 내거나...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휴식을 즐기는 시간이 꿈처럼 지나갔다.
이렇게 창공 일행은 다시 원양어선을 얻어 타 이스트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 울어버릴 것 같아."
이스트리항 제3부두에 발을 디딘 나유가 감회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원양어선은 그녀를 필두로 계속해서 부두에 창공 일행을 토해냈다. 진정한 비타 원정길의 종막이었다.
하루아침에 시장을 잃은 도시는 아직도 다소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별다른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예전의 그 여관에 짐을 푼 일행은 함께 모여 향후 일정을 논의했다.
알펜시아의 도서관에서 얻은 정보는 비타에 뭔가 전설이 있었다는 정도. 새벽별을 얻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일행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가장 첫 번째로 나온 의견은 일정 이전에 이스트리에서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나유의 새로운 검집도 만들어야 하고, 그 외 일행들도 각자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했기에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그럼 결국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까."
창공은 어택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병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될 날이 머지않았겠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걸어야 할 길을 나타내 주는 나침반도, 등대도 없다. 오로지 감에 의존해서 경로를 잡아야 한다.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네."
"뭔데?"
"우리의 친구 포를렌탈 교수. 분명 일면식도 없는 사이잖아요. 우리가 비타로 간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우리 일정을 알고 방해를 했을까... 생각해 보니 이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죠. 어쩌면 거기에서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륀."
"아, 응."
"포를렌탈 교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파도비... 동키르케 지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지 않을까 싶네. 심문한 결과 훨씬 사안이 중대하다 싶으면 웨리로 이송됐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고. 그렇게 되면 지부장이 탑주에게 문책을 받게 될 테니까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을 거야."
"자기가 덮을 수 있는 문제는 자기 선에서 해결한다는 건가."
"그렇지 뭐. 마법사 사회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음... 지금쯤이면 얼추 결과가 나왔을 거야. 주인님이라고 했던가. 그 정체 불명자에 대한 정보도 결국 밝혀내지 않았을까 싶네. 마법사들에겐 여러 수단이 있으니까."
분근착골이라도 한다는 걸까. 아니면 자백 마법약이라도 먹인다는 걸까. 아무튼 꽤나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누군가가 일행을 방해하려 했다. 포를렌탈 교수가 하수인에 불과했던 이상 그 주인님이라는 작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교수의 주인님을 추적해 정체를 밝힌다면 지구로 돌아가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적어도 창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전에 쓰러진다면 륀에게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간호를 받는 신세가 될 테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륀.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좀 써 봐. 포를렌탈 교수를 만나러 가겠다고. 혹시나 웨리로 이송됐다면 그리로 가야겠지."
"이스트리에서 웨리까지라. 키르케를 대각선으로 크게 횡단하는 일정이 되겠네. 엄청 길고 지루할 테지만 인상적인 경험이 될 거야. 하늘 높이 솟아오른 첨탑. 마법과 지식의 고향. ...아, 물론 죽을 때까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아쉽게도."
륀의 말에 아스터가 고운 얼굴을 살포시 찌푸렸다. 사제인 그녀는 웨리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실이지만 어쩐지 언니가 자신을 잔뜩 비꼬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그렇다고 '언니도 교황청 건물에 범접하지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신을 향한 찬미의 결정체, 영혼의 안식처인 그곳을...' 이라고 해 봤자 아무런 타격도 들어가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고 말이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어, 창공아. 잠시만."
회의를 끝내고 일어나려던 창공을 나유가 붙잡았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나중에 하자. 다녀올 데가 있어서."
"다녀올 데? 어딘데?"
"개인적인 문제라."
그는 손을 휘휘 내젓고선 그대로 여관을 나섰다.
'어차피 오늘 같이 자자는 얘기겠지.'
정중한 섹스 신청에 대한 응답이야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으니 당장 들을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보다는 어서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번화가를 지나 조금 한적한 뒷골목으로 길을 잡은 창공은 손쉽게 성인용품점을 찾아냈다. 작은 마을에도 당당히 있는데 이스트리 같은 도시에 없을 수 없다.
"어서옵쇼... 에트로지?"
"돈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주인이 원하는 대답을 건네고, 날카로운 눈으로 매대를 훑는다. 그가 원하는 물건은 거기에 있었다.
동그랗고 얇은 고리. 반지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작다. 간단한 귀걸이 같기도 한데, 어쩐지 귀걸이 느낌은 나지 않는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그것을 집어 들어 살펴보는 창공에게 주인이 은근슬쩍 다가온다.
"그게 뭔지는 아시오?"
"사람 몸에 다는 거 아닙니까."
"그걸 달면 사람이 아니게 된다고 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지!"
유두에 다는 피어싱. 창공이 찾는 물건은 다이셀리시아에도 물론 존재했다. 대체로 나무로 만들어진 다른 성인용품과는 달리 피어싱은 금속 재질이었는데, 약하고 소중한 위치에 착용하는 피어싱이니만큼 부러지면 곤란하니 당연하지만 이러다가 쇳독이 오르면 큰일이다.
"이거 재질이 뭡니까? 설마 철은 아니겠죠."
"에이, 그러다가 쇳독 오르면 어쩌려고. 아르토스에서 난다는 청백은이라우. 아... 에트로지라 청백은이 뭔지 모르시나?"
"설명해 주시죠."
"보면 알겠지만 금처럼 누렇지도 않고 보석들처럼 그렇게 번쩍이지도 않잖수? 그래서 귀족 나으리들이 장신구로 써먹지는 않는데 쇠처럼 단단하지도 못해서 무기로 써먹지도 못한단 말이지."
"그렇군요."
"도대체 이걸 어디다가 써먹나, 하고 아르토스인들이 의외의 사용처를 발견했는데, 아예 입에 물고 있어도 쇳독이 전혀 오르지 않는다는 거요. 그래서 틀니를 만들다가... 이런 것도 만들게 된 거지."
꽤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이걸로 한 짝. 그리고 아래쪽에 다는 거 없습니까?"
"아래쪽? 있긴 하지만 세상에...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그런 것까지 다는... 부럽구만!"
유두링에 클리링. 언젠가 한 번 창공이 여자에게 달아 보고 싶었던 피어싱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 번 해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대상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륀으로 정했다.
"구멍 뚫는 기구까지."
"그건 공짜로 챙겨드리겠수."
* * *
"...읏."
잠에서 깨어난 나유는 몸을 일으켰다. 창밖의 해를 보니 이제 곧 저녁 먹을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옆 침대를 보니 아린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그 상태로 잠시 뭘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창공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벌써 같이 잠자리를 같이 한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그에게 졸라서라도 오늘 밤 침대 옆자리를 따낼 생각이었다.
똑. 똑.
"창공아. 나유야. 들어가도 될까?"
"..."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창공도 잠든 걸까. 아직 밤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그냥 돌아가려던 나유는 발을 멈추고 문고리를 붙잡았다.
"헤헤헤... 창공아아아. 문 안 잠갔으면 각오하라구. 내일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짜낼 테니까."
하늘도 그녀의 편인지 손잡이는 그대로 쑥, 돌아갔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들어가는 나유. 짐작대로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후우..."
나유는 침대 옆에 서서 창공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사랑하는 사람. 원망스러운 사람. 모든 걸 주고 싶은 사람. 제 마음도 모르고 잠에 빠진 창공에게서 눈이 떼어질 줄 모른다.
"내 마음도 모르고. 바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로 덮칠 생각이었지만 나유는 창공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저 투정 부리며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팔을 조심스레 안쪽으로 집어넣고,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던 차였다.
"...?"
침대 옆 선반. 그 위에 누런 종이봉투 하나. 그녀의 부탁도 뿌리치고 밖에 나간 창공이 가져온 것일까. 나쁜 짓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나쁜 짓일수록 멈추기 어려운 법이다.
'이게 뭐길래 내 말도 뿌리치고... 나쁜 건 창공이 너니까!'
의외로 봉투는 가벼웠다. 손바닥을 펼치고 뒤집어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금속 링 세 개. 전체적으로 작았지만 하나는 나머지 두 개보다 크기가 작았다. 거기에 디귿자 모양으로 된 기구 하나. 작은 집게 모양인데 한쪽 끝에 바늘이 달려 있다. 마치 사이에 뭔가를 집어넣고 구멍을 뚫는 기구처럼 생겼다.
분명 처음 보는 물건이긴 했는데... 나유는 이것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거... 피어싱...'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고 궁금했던 의문은 바로 '창공은 누구에게 이 피어싱을 달려 하는가'.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륀... 그 여우 같은 년이구나.'
역시 그랬다. 앞에서는 도도한 척하지만 뒤로는 개목줄을 차고 알몸 산책을 즐기며 창공을 독점하는. 분명 그 음탕한 계집이 스스로 창공에게 피어싱을 졸랐음이 틀림없었다. 남자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수법이 아니겠는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손안의 피어싱을 노려보던 나유는 그것들을 가지고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