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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59화 (159/178)

〈 159화 〉 드러남

* * *

두 여인이 창공의 밑에 깔려 달콤한 신음을 내뱉고 있을 무렵, 륀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웨리의 동키르케 지부로 이송되었을 포를렌탈 교수에게서 어떤 정보를 이끌어냈는지 묻고, 직접 방문해 그녀와 대담을 나누어도 좋은지 허락을 구하는 것.

따라서 륀은 이스트리의 우체국으로 향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멀리 떨어진 이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선 양피지에 구구절절 사연을 적어 우편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 점은 마법사 아닌 일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똑같은 점은 딱 거기까지. 보내는 우편의 종류까지 같은 건 아니다. 우편 마차나 선박으로 운송하는 일반 우편과는 달리, 륀이 이용하는 우편은 전서구편이었으니까.

당연히 일반 우편에 비해 수십 배가 비쌌지만 교수인 륀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빠르기는 비교가 안 되고, 보안적인 측면에서도 몇 배나 더 나은데 그깟 돈이 문제랴.

물론 이런 전서구편이 아무 도시에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퐁파두르 박사?"

그렇게 우체국에 도착해 편지를 작성하려던 찰나, 륀은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페르미 교수님? 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인가요. 진리는 나의 빛."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기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세상 참 좁다니까."

눈가에 주름으로 새겨진 세월의 흔적.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새하얀 백발. 살짝 굽은 등. 그러나 추레하지는 않은 노신사는 반가운 얼굴로 륀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리오 페르미. 륀이 박사과정을 밟을 때 마법이론의 학과장이었고, 교수로 임용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고향인 키르케로 전출을 간 노교수였다.

비록 배운 기간은 짧지만 어쨌든 은사는 은사. 특히 륀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도교수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써 준 교수였기에 륀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퐁파두르 박사. 휴직계를 냈다는 말은 들었는데... 키르케에 있는 걸 보니 지금은 여행 중인가?"

"네... 말하자면 그렇게 되죠."

"정교수나 되는 사람이 휴직 몇 년 한다고 뭐라 나무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퐁파두르 박사는 마법이론의 미래야. 너무 오래 쉬면 우리들도 곤란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박사의 다음 논문만 기다리고 있는데. 죽기 전에 한 편이라도 보고 죽어야지 않겠나."

"노력할게요."

"변함없이 겸양은 안 하는군."

"해 드릴까요?"

"됐네. 젊고 자신감 넘치는 교수가 우리 마법이론에 필요했으니까. 그 마음 오랫동안 간직하게. 다만 너무 당당하기만 하면 곤란해. 남자들은 조금 순종적인 면이 있는 걸 좋아하니까. 그러고 보니 박사 자네도 이제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닌가?"

"그렇기야 하지만."

"자네 나이도 벌써 스물하나야. 둘셋 먹은 아이 하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만나는 남자는 있나?"

"앗... 그게..."

"세상에."

페르미 교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있단 말인가? 퐁파두르 박사 자네에게 남자가?"

"흠, 흠! 왜 그리 있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죠?"

"그야 자네 정도되는 여인은 어울리는 사내를 찾기가 어려우니까. 특히 퐁파두르 박사 같은 웨리의 보물의 눈에 일국의 공작인들 눈에 찼을까. 그래서 그 복된 사내는 대체 누구인가? 어디, 내게 살짝 귀띔해 주지 않겠나?"

"글쎄요. 아무리 페르미 교수님이라 해도..."

"실례했네. 하지만 부디 이해해 주게. 늙은이에게 이제 남아있는 거라고는 망령밖에는 없어서 말일세."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난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학문에 나를 바치겠다 맹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 하지만 이렇게 끝에 다다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성취감과 자부심 만큼이나 진득하고 커다란 외로움이 있더군."

그랬다. 페르미 교수는 80 가까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와 동침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대마법사라는 영광된 칭호를 얻을 정도로 높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

"아..."

그 어두컴컴하고 차디찬 자기성찰에 륀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서야 깨달은 게지. 업적은 인생을 휘황찬란하게 만들지만, 그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어떤가. 박사는 그 남자를 사랑하나?"

"사랑..."

륀은 창공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간에 가깝게 자신을 취한 남자. 자존심과 명예를 짓밟고 능욕한 남자. 때로는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들 정도로 증오스러운 남자.

하지만 그만큼이나, 미워하는 만큼이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안겨서 앙앙대며 복종의 말을 늘어놓고, 그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 싶었다. 더욱 천박하게, 더욱 비참하게.

계속 생각이 나는데, 가슴이 쥐어짜일듯 아픈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하늘을 날던 재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날개가 뜯겨져 추락했지만, 그녀는 그 추락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것 같아요."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륀.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졌다니 참 다행일세. 되도록이면 아이도 빨리 갖는 게 나아. 마침 휴직 중이니 잘 된 일이 아닌가. 중요한 연구를 할 때에 아이가 생겨버려서 곤란해하는 여교수들을 내 많이 보아왔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네. 베리스트림 교수님이 그러셨죠."

마법사가 되고 륀의 첫 지도교수였던 브리트 베리스트림 교수는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덜컥 임신해버리는 바람에 다른 교수에게 그동안의 연구 실적과 정보들을 넘기고 출산과 육아에 전념해야만 했다.

륀으로서는 더 실력 좋은 페르미 교수에게 도움을 받게 되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지만 어쨌든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다.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남자 따위 안 만나고 만다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결국은 이리 되었지만.

'아이...'

그녀의 머릿속에 행복한 얼굴로 부른 배를 쓰다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모르긴 몰라도 창공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의 씨를 받아 임신한다 해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그가 살아있을진 미지수다.

높은 확률로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며, 륀은 그런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한다. 하지만 임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더욱.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프기 짝이 없을 자신의 모습을 세차게 흔들어 연기로 흩어버린 륀은 정신을 차리고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 페르미 교수를 일깨웠다.

"교수님. 그런데 교수님은 어떻게 이곳 이스트리까지...?"

"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인데 주책없는 늙은이가 삿된 소리를 지껄였군. 부디 날 용서하게나."

"중요한 일이라니요?"

페르미 교수는 이제까지 나누었던 훈훈한 이야기 따윈 마치 없었다는 양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동키르케 지부에 큰일이 일어났네. 교수 열 명이 한꺼번에 실종됐어."

"교수 열 명. 설마...!"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다른 누구도 아닌 박사 자네가 그들을 이스트리로 청하지 않았던가."

"맞는 말씀이지만 저는... 잠깐만요. 그렇다면 이송 중이던 포를렌탈 교수도?"

"행방이 묘연하네. 이거 참,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교수가 열 명. 정교수는 여덟 명이었단 말일세. 사상 초유의 일이야. 전시를 제외하고서 수 천년 되는 웨리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페르미 교수의 말에는 과장이 한 줌도 없었다. 교수급 마법사 열 명. 전투력을 떠나서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설사 주제도 모르는 도적떼가 습격했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손목을 잘라 사죄해야 할 급이다.

국가를 초월한 다이셀리시아의 정치 집단. 웨리와 교단. 키트라 제국의 황제조차 함부로 마법사들을 대하지 못했거늘, 어느 간 큰 자가 있어 교수들을 습격했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가 없다. 이건 전투력 문제가 아니다.

적대적인 누군가에게 습격당한 게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사라졌다는 말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더더욱 가능성이 없다.

"그라치아니 교수는 분명 이스트리에서 출발한다는 전서구를 보내왔네. 그게 벌써 저저번주로군. 이스트리에서 파도비까지는 걸어서 여덟 시간 정도. 이 주일이면 오리걸음으로 왔어도 도착했어야 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늘로 솟구쳤는가, 땅으로 솟구쳤는가? 만약 그런 마법이 있다면 배우고 싶을 정도야. 나도 사라지고 싶으니 말일세.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세상에."

"그래서 결국 하다 하다 조사를 위해 내가 직접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

"설마 오늘부터 조사하기로 하신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그래도 서신이 도착하고 둘째 날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네. 그거야 호송할 마법사도 있고, 뭐 하다가 보면 하루 이틀 정도야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사흘은 결코 아니야. 사흘째 되는 날부터 조사를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거로군요..."

"아니. 흔적은 찾았다네. 아마도."

"아마도... 라는 말씀은?"

"대량의 혈흔."

륀은 제 팔뚝을 으스러질 듯 꽉 쥐었다.

"누구의... 혈흔인가요?"

"조사 중이네. 혈흔만으로는 어떤 사람의 것인지 판명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실종과는 관련이 없는 전혀 별개의 혈흔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네. 증거는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랬듯, 이번에도 일은 쉽게 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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