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드러남 (2)
* * *
"...결국 지금까지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이거 참,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지부장은 잘 있을런지. 안색이 좋지 않던데."
"이런 일이 생겼는데 좋을 리가 없죠. 자기 잘못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자기 관할 아래에서 생긴 일이니."
그 뒤로도 륀은 페르미 교수에게 정보를 얻어내려 애썼지만 결국 저쪽에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실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은 명백히 혼란에 빠져있었다. 혼란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목을 매달고 싶은 심정일 걸세."
"어휴... 웨리에는 보고했나요?"
"당연하지. 고작 지부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웨리도 지금 남아도는 인력이 없는 모양일세."
"중요한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교수들이나 생도들에게 강의하는 교수들을 제외해도 꽤나 있을... 아, 설마?"
"자문회의 시기이지 않은가. 자문단의 역할을 수행하러 전 세계 각지로 많이들 빠져나갔다네."
마법 교수들이 왕실이나 공작가 자문단에 이름만 달아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있었는데, 하필 지금이 1년에 한 번 있는 그런 시기였다.
륀은 휴직 중인 데다 명예 자문단이라 상대적으로 의무가 적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정식 자문위원직을 맡고 있는 다른 교수들은 성실하게 참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돈이 나오니까.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돈 없이는 연구를 할 수 없는 법이다.
"세상에... 설마 이런 틈을 타서..."
만약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이 실종 사건이 벌어졌고, 웨리가 취약해지는 시기적 특성을 이용해 저지른 것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륀은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지만 페르미 교수는 머뭇거리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까지는 진상의 끄트머리조차 붙잡지 못한 상태네. 언제나 그렇듯, 섣부른 판단은 위험해."
"...결국 당분간은 동키르케 지부 자체적으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나마도 일단은 중지하기로 했네. 웨리의 확실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다시 말하지만 무려 열 명의 교수야. 그중에 정교수는 여덟 명이고. 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면 글쎄... 지부가 온 힘을 다해 조사한들 별수 있겠나."
"으음..."
"내가 최후의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파도비에서 이곳 이스트리까지 길을 되짚어 왔지만... 역시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네. 이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야."
"웨리에서 지원은 언제쯤 온다고 하던가요? 아무리 사람이 없더라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빠르면 2주. 일단 아퀴탄과 노르마크에 자문단 적을 두고 있는 교수들이 돌아오는 대로 급히 뽑아서 보낸다더군. 자네도 알다시피 웨리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그 둘이지 않은가. 키르케도 접경국이긴 하지만 수도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빠르면 2주. 신속한 수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2주는 너무나 긴 공백이다. 물론 마탑주라고 그걸 모를 리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2주라고요...? 이럴 수가."
"자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 우리 지부도 완전히 업무가 정지된 상태야. 그 교수들은 우리 지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편한 대로만 말했네요."
"아닐세. 그럴 수 있지. 나도 답답하기 그지없는 건 매한가지니 오히려 내가 하고 싶던 말 대신한 셈 치세. ...후우. 어쨌든 난 이만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네. 일단 지부의 수습이 먼저야. 지부장도 조금 보좌가 필요한 것 같고."
"그렇게 하세요. 바쁘신 분 제가 붙잡았군요."
"무슨 말을.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네.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찾아오게. 좋은 포도주를 기꺼이 딸 테니."
"반드시 그렇게 하죠. 그럼...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길."
"음. 퐁파두르 박사도. 몸조심하게."
페르미 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륀은 곧바로 우체국을 나서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부에 편지 따위를 쓸 때가 아니었다. 사실 편지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위로하는 편지조차 받을 정신이 없을 테니까.
이번 사건이 일행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직까진 미지수. 그러나 결코 관련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마법사들이 호송하던 포를렌탈 교수는 창공 일행의 일정을 모종의 방법을 통하여 알고 있었으니까. 그 의문을 해결하려던 차에 터져버린 미심쩍은 사건.
'주인님이라고 했었지...'
그녀의 머릿속에 포를렌탈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인님. 포를렌탈 교수는 주인님이라는 자를 모시고 있었다. 아마 교수는 일행의 정보를 주인님을 통해 알았으리라.
따라서 이번 일은 포를렌탈 교수의 '주인님'이 행한 일일 가능성이 있었다. 륀은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가 페르미 교수에게 자신의 추측을 알려주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라치아니 교수가 이스트리를 출발할 때 전서구편으로 간략하게 알렸을 테니까.
게다가 주인님의 정체에 접근할 수 없는 한,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어차피 '신원 미상의 범인'과 '신원 미상이며 포를렌탈 교수의 주인님'이 동일인이라 한들 현 상황에서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잡고 보면 뭐든 밝혀질 것이다.
아무튼 창공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공교롭네. 주인님이라니.'
생각해 보면 륀에게도 주인님이 있지 않던가. 지금에 이르러선 부정할 마음조차 없었다. 비타에서 각자의 언어를 이어주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겼을 때, 륀은 자신을 희롱하는 창공에게 그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속삭였으니까.
[이걸 원하시나요? ...주인님...]
[맞아요. 제 몸은 항상 주인님 거니까요.]
이젠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대놓고 욕을 하고 매도해도 창공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륀은 감히 창공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거스르기는커녕 굴복의 달콤함에 목말라 무릎을 꿇고 암컷이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늘, 오늘은... 안아달라고 해야겠어.'
마지막으로 창공에게 안긴 날이 언제던가. 이스트리에 도착해서 사건을 해결하고 비타에 다녀온 지금까지 주욱 몸이 외로운 상태로 있었으니, 한 달 가까이 지난 셈이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치마 안으로 새어들어와 팬티를 스치자, 문득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축축하게 젖어들었다고.
'주인님께 안기면... 오늘도 뒷보지를 사용하시겠지. 난 비참하게 울부짖으면서 제발 앞보지를 사용해 달라고 간청할 테고 주인님께선 그런 날 꾸짖으시며 엉덩이를... 아아...'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처녀를 바치겠다 여러 번 말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창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처음에 그토록 반항했는지 미칠 정도로 후회됐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고 애타는 만큼 아랫배에서 전신으로 쾌감이 퍼져나갔다.
피학성애. 언젠가 책에서 읽고 이런 변태도 있는가, 하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설마하니 그게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숨이 거칠어지고, 시야가 흔들린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더 이상 마법사들의 실종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창공을 만나 일어난 사건을 설명한다는 목적은, 어느새 창공을 만나 그에게 안긴다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여관 문을 황급히 열고,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보고 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건 알 바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안을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
창공의 방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환희의 웃음이 지어졌다. 이젠 감출 생각도 없었다.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몸을, 마음을 허락해선 안 된다는 내면의 소리 따윈 이제 욕망의 폭풍에 잠겨 들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그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였다.
"흐아아앙! 하으으응...! 주거허... 나 주거버려허..."
"가고 싶지 않아요... 제발 더느흔...! 용서, 용서해 주세요..."
저 안에서 들려오는 암컷의 울부짖음. 아니, 암컷들의 울부짖음.
륀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문에 귀를 바싹 붙였다.
"히이이잇...!"
"응호오오옷..."
남나유. 그리고... 동생 아스터. 틀림없었다. 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창공을 유혹했음이.
분노? 허탈?
뭔진 몰라도 더는 문을 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륀은 깨달았다. 오늘 밤 륀은 패배했다고. 다른 암컷들 때문에 창공에게 안길 수 없다고.
"싼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창공의 목소리. 륀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를 한가득 조였다. 사정을 받는 것처럼. 그녀의 주인님을 기분 좋게 만들려는 것처럼. 하지만 창공은 문을 사이에 두고 저 너머에 있고, 륀의 조임은 느낄 수 없다.
보지에서 토해낸 애액 한 방울, 두 방울... 아니. 세 방울이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이미 팬티는 더 습기를 머금을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있었다.
"..."
귀를 떼고,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륀. 아무리 자위를 하더라도 이 패배감과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차갑고 쓸쓸한 침대 위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다 잠에 들면, 분명 처량하기 짝이 없으리라.
그럼에도 륀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 * *